한국근현대사 인물탐구 윤봉길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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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삼엄한 검문검색을 통과하는 데 양장을 한 27세의 이화림이 도움을 주었다. 이화림은 김구가 중심이 된 애국단의 주요 단원으로, 윤봉길과 함께 일본인 부부로 가장하여 거사하기로 했다가, 두 사람을 한꺼번에 잃을 수 없다며 김구가 간곡히 말리는 바람에 윤봉길의 신변보호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화림은 윤봉길 의거 뒤, 테러만으로는 조국의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고민으로 김구와 결별한다. 이후 조선의용대
) 조선의용대: 김원봉(金元鳳)이 1938년 중국의 임시수도 한커우에서 창설한 한국 독립무장부대. 처음에 200명에 불과하던 병력이 1940년 초에는 300명을 넘어서기도 했으나, 동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에 광복군이 조직된 뒤로 점점 이탈자가 늘어났다. 이렇게 되자 1942년 4월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하기로 결의하였고, 동년 5월 총대장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과 제1지대장을 겸하고, 의용대는 제1지대에 편입되었다. 조선의용대는 우리 민족으로 구성된 독자적 부대로 중·일간의 국제전에 처음 참전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설립연도 : 1938
구분 : 독립무장부대
소재지 : 중국 한커우
설립목적 : 일본 군벌을 타도하여 동양의 영원한 평화 완성
주요업무 : 적진 교란, 첩보, 선전
살림을 돕고, 해방후 조국에 의술이 꼭 필요하리란 생각에서 의술을 공부하지만 막상 해방이 오고나선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중국에 머물며 중국에서 유공자 대접을 받다가 돌아가시었다.
조선의용대는 세칭 "연안파"라 불리는 출신들로 남한에선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금기가 되었다. 독립유공자 선정에 있어서 그것은 관계없다 하지만, 사회주의 계열 인사는 배제된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이로써 같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어도 어느 노선을 따랐느냐에 따라 실질적으로 혜택을 받고 못받고가 결정되게 되었다.
독립유공자 선정과 그 혜택에 관하여 말이 길어졌지만 결국 윤봉길 의사는 성공한 거사를 했고, 해방 전에 순국하였으며, 조선의용대 등의 노선을 따르지 않고 김구가 이끄는 애국단에 소속하였던 결과로 그 후손 또한 정당한 대가를 받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일반인들이 윤봉길 의사를 이봉창, 백정기, 이화림, 곽재기 등 지금껏 예를 들어 설명한 주변 인물들보다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성공한 거사를 했고, 해방 전에 순국하였으며, 조선의용대 등의 노선을 따르지 않고 김구가 이끄는 애국단에 소속하였던 결과라는 것이다.
결국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윤봉길 의사가 아닌 많은 독립투사들은 당대에 윤봉길과 같이 독립활동을 하였더라도 후대에 다른 평가를 받았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윤봉길 의사가 꽤나 좋은 조건에서 순국하였다는 것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잘 죽었다는 식의 말이 좀 이상하지만은, 지금은 어떠한지 몰라도 내가 교육받은 것을 떠올려 볼 때 일제치하 독립투쟁과 이후 임시정부와 관련한 국사교육에서 김구, 유관순, 안중근, 안창호, 신채호 그리고 윤봉길은 필수 아이콘이었었다. 그만큼 역사에 이름을 떨칠 인물이 되기가 어디 쉬운가를 말하는 것이다.
미국이 승전선언을 하고 이라크 전을 마무리지었다지만, 이라크에서 보복성 테러, 자살폭탄 테러를 언제 또 하게 될지 그것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이라크인 들이 미국에 대항하여 자살폭탄테러하는 행위와 윤봉길이 일제에 대항하여 도시락폭탄을 던진 행위는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인가?
일본이 윤봉길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독립투쟁활동에서 의거로 인정하고 있다. 난해한 문제이지만 억압자인 일제와 피억업자인 조선의 정당성, 타당성, 당파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편들 것인가의 문제의 맥락적인 입장(역사, 사회, 문화적인 바탕을 고려)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견지'는 아무래도 존재하기 힘든 것이 아닐까 싶다. 의열단과 관련한 테러활동에 대한 내용에서 이미 인용한 바 있지만, 다시 한번 인용하자면, 국민대 조봉걸 명예교수는
"의열투쟁은 정의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고 타격 목표가 분명하며 공개적 행동이라는 점에서 테러와는 분명히 구별돼야 한다." 라고 하였다.
이라크인 들의 자살폭탄테러를 살펴보면서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던 윤봉길과 다른 독립투사들을 떠올렸다면 지나친 비약이 될까? 조선독립후 이제 반세기가 조금 지났지만 벌써 많이들 잊고 사는 것 같다. 이라크 정부도 미국도 기타 다른 나라도 다 싫다며 시위를 하는 이라크인들을 뉴스화면을 통해 접하자니 여러모로 반성이 된다. 이들처럼 나라가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에 대한 걱정 없이 살고 있는 것은 독립활동을 통해 죽어간 많은 선조들의 피와 땀이 일구어낸 역사인 것을 어느새 간과하고 지내왔기 때문이다. 과제를 통해 독립투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며 글을 마친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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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ndependence.or.kr/ (독립기념관)
http://members.tripod.lycos.co.kr/icanzeus/mahun.htm
http://www.history21.org/frame.htm
http://my.netian.com/~wally02/h3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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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13
  • 저작시기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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