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2. 김일성
3. 김두봉 (金枓奉)
4. 무정
2. 김일성
3. 김두봉 (金枓奉)
4. 무정
본문내용
편』은 무정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다. 기록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더욱 주목되는 것은 무정이 서울에 살 때 여운형 선생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조선공산당 초기인물들과 교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23년 중국에 온 무정은 24년에는 북방 군관학교에 들어가 포병과를 졸업했다. 군관학교시절 남구전투에 참가해 천진을 점령하는 전투에서 공을 세운 뒤 졸업, 중국 포병대위로 임명됐고 22세때 포병중좌로 진급,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가 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면 중국공산당 중에서도 원로급에 속한다. 그는 이때부터 중국공산당의 혁명역사에 몸을 싣게 된다. 무정장군의 신화는 이때부터 조금씩 만들어졌다. 27년 장개석의 공산당 토벌때 체포되어 무창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때 무창시 중국학생등 1만여명이 대시위를 하며 즉시석방을 요구했고 무창법원 동지들의 도움으로 상해로 도피했다. 29년 상해대폭동때 폭동지휘부에 참가하다 영국인들에게 체포돼 2개월 동안 투옥됐다가 석방된 뒤 홍콩으로 갔다. 이 같은 경력보다 무정이 중국혁명과 관련된 명성을 굳히게 된 계기는 유명한 2만5천리 대장정 때다. 무정이 대장정에 참가한 10여명의 조선인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선인이라는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무정은 대장정이 끝난 뒤 연안에서 자신이 대장정에서 혼자 살아남게 된 것을 이렇게 회고했다고 한다. 양용의 죽음은 묘하게도 무정과 중국당 지도부의 팽덕회에게 인연을 맺어줬다. 37년 홍군에서 개편된 팔로군 총사령부 작전과장으로 37년 말에는 중국최초의 포병부대인 팔로군 포병단단장(연대장)으로 사실상 포병사령관이 됐다. 그의 진급은 파격적이었다. 대장정 이후 파격적 진급은 무정의 신화를 더욱 키웠고 점차 무정은 팔로군내의 조선인뿐 아니라 그의 이름을 아는 모든 조선인에게 구심점이 되어갔다. 무정은 자타가 공인하는 포병최고의 권위자가 됐다. 그의 권위는 스탈린이 41년 7월 그에게 대독전 참가를 요청함으로써 더욱 커졌다. 결국 가지 않았지만 그 일은 군인 무정의 명성을 확인한 계기였다. 군인 무정은 41년이 되면서 조금씩 다른 행보를 한다. 조선독립과 관련, 적극적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41년 1월10일 태행산 동요에서 대회가 열려 화북조선 청년연합회가 결성됐다. 이 연합회는 규모는 작았지만 중국공산당과 조선인 모두에 의미가 큰 것이었다. 연합회는 팔로군 소속 조선인들과 팔로군 소속이 아닌 조선인을 규합해 별개의 조선인 조직을 만든 것이었다. 42년 7월 열린 연합회 2차대회에서는 이 연합회의 조선해방 성격을 분명히 해 이름을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바꾸고 산하의 군대조직으로 조선의용군을 두었다. @무정은 이 과정에서 중심역할을 했다. 그런데 무정이 화북조선청년연합회 결성 및 의용군 창설에 적극적이었던 것이 본인의 의사인지 당의 지시인지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다. 즉 무정이 조선해방에는 신경을 안 쓰고 중국혁명에만 몰두했다는 빨찌산파나 국내파의 통념과는 다른 증언이다. 무정은 중국내 조선인 규합과 동시에 국내와의 연계도 꾸준히 해나갔다. 해방이 되자 조선혁명에 대한 무정의 관심은 더욱 커진다.
조선정국에 대한 민감한 관심을 갖고 무정은 45년 11월말쯤 조선의용군 간부 70여명과 함께 평양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북의 정세는 그에게 우호적이 아니었다. 1945년 11월말 초겨울의 어느 날 저녁. 평양의 일식집 다마야에는 당시로는 드물게 1백명 가까이 모였다. 중국에서 돌아온 연안파를 환영하는 자리였다. 순배가 돌아가며 주흥이 무르익은 듯했지만 환영대회 분위기치고는 좀 찬듯했다. 대륙의 찬 이슬 속에서 풍찬노숙하며 조국해방을 위해 노심초사했던 혁명가를 맞이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무정입북에 대한 일반대중들의 반응과는 딴판이었다. 대중들에게 무정은 김일성에 버금가는 조선혁명가였다. 그러나 당시 실세인 김일성이 무정과 연안파를 접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앞길이 순탄치 않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입북이후 무정의 행보는 중국혁명에서 보여준 화려함에 비하면 초라하기까지 하다. 입북직전인 45년 10월 서북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에서 제2비서로 추대된 이래 입북후 3차,4차 분국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제2비서로 정치활동을 한다. 그러다 46년 2월 인민군의 전신인 보안간부 훈련대대가 만들어지면서 포병담당 부사령관이 되고 48년 인민군창설 이후에는 제2지휘소사령관에 임명돼 6·25때는 2군단장이 됐다. 그의 행로는 내리막길이었다. 중국에서 뒤를 밀어주는 것으로 간주되었음에도 그는 정치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세력을 굳혀가고 있던 김일성의 강력한 견제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무정은 김일성 입북 훨씬 뒤인 45년 11월말쯤 귀국했다. 그때는 민족진영의 조만식과 소 군정의 지지가 명백한 김일성이 국면을 결정해 나갈 때다. 소 군정의 지도아래 이미 짜여진 국면에서 연안파가 끼여들 여지는 좁은 상황이었다. 무정이 귀국할 때 정치적 야망은 컸다. 무정은 귀국하자 그의 야망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연안파 내에서 마저 말썽이 일었다. 빨찌산파에서는 김일성을, 국내파에서는 박헌영을 지도자로 내세웠지만 연안파에서는 무정을 대표주자로 옹립하려는 노력마저 없었다. 무정의 진로는 자신의 희망과는 다르게 전개돼 갔고 그의 불만은 커갔다. 소 군정 하에서 중국 팔로군 출신이 가질 수밖에 없는 본질적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그는 심지어 개인주의적인 행동이 문제돼 가끔씩 소련사령부로 불려가 조사를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던 무정 문제가 커진 것은 6·25때다. 이 때문에 그는 2군단장에서 철직(직위에서 쫓겨남) 당하고 만포에서 후방부대인 7군단장이 됐다. 그 와중에 그는 결정적 사고를 냈다. @군단장자리에서 쫓겨난 무정은 지병인 위장병이 악화됐다.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으로 와있던 혁명동지 팽덕회의 요청도 있어 그는 잠시 치료차 중국에 갔다가 김일성에게 고국에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받아들여져 국내로 다시 들어왔다. 사망날짜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대륙을 누비던 비운의 혁명가는 입북이후 내리막길만을 걷다 초라한 최후를 맞았다. 47세의 젊은 나이였다.
조선정국에 대한 민감한 관심을 갖고 무정은 45년 11월말쯤 조선의용군 간부 70여명과 함께 평양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북의 정세는 그에게 우호적이 아니었다. 1945년 11월말 초겨울의 어느 날 저녁. 평양의 일식집 다마야에는 당시로는 드물게 1백명 가까이 모였다. 중국에서 돌아온 연안파를 환영하는 자리였다. 순배가 돌아가며 주흥이 무르익은 듯했지만 환영대회 분위기치고는 좀 찬듯했다. 대륙의 찬 이슬 속에서 풍찬노숙하며 조국해방을 위해 노심초사했던 혁명가를 맞이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무정입북에 대한 일반대중들의 반응과는 딴판이었다. 대중들에게 무정은 김일성에 버금가는 조선혁명가였다. 그러나 당시 실세인 김일성이 무정과 연안파를 접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앞길이 순탄치 않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입북이후 무정의 행보는 중국혁명에서 보여준 화려함에 비하면 초라하기까지 하다. 입북직전인 45년 10월 서북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에서 제2비서로 추대된 이래 입북후 3차,4차 분국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제2비서로 정치활동을 한다. 그러다 46년 2월 인민군의 전신인 보안간부 훈련대대가 만들어지면서 포병담당 부사령관이 되고 48년 인민군창설 이후에는 제2지휘소사령관에 임명돼 6·25때는 2군단장이 됐다. 그의 행로는 내리막길이었다. 중국에서 뒤를 밀어주는 것으로 간주되었음에도 그는 정치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세력을 굳혀가고 있던 김일성의 강력한 견제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무정은 김일성 입북 훨씬 뒤인 45년 11월말쯤 귀국했다. 그때는 민족진영의 조만식과 소 군정의 지지가 명백한 김일성이 국면을 결정해 나갈 때다. 소 군정의 지도아래 이미 짜여진 국면에서 연안파가 끼여들 여지는 좁은 상황이었다. 무정이 귀국할 때 정치적 야망은 컸다. 무정은 귀국하자 그의 야망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연안파 내에서 마저 말썽이 일었다. 빨찌산파에서는 김일성을, 국내파에서는 박헌영을 지도자로 내세웠지만 연안파에서는 무정을 대표주자로 옹립하려는 노력마저 없었다. 무정의 진로는 자신의 희망과는 다르게 전개돼 갔고 그의 불만은 커갔다. 소 군정 하에서 중국 팔로군 출신이 가질 수밖에 없는 본질적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그는 심지어 개인주의적인 행동이 문제돼 가끔씩 소련사령부로 불려가 조사를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던 무정 문제가 커진 것은 6·25때다. 이 때문에 그는 2군단장에서 철직(직위에서 쫓겨남) 당하고 만포에서 후방부대인 7군단장이 됐다. 그 와중에 그는 결정적 사고를 냈다. @군단장자리에서 쫓겨난 무정은 지병인 위장병이 악화됐다.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으로 와있던 혁명동지 팽덕회의 요청도 있어 그는 잠시 치료차 중국에 갔다가 김일성에게 고국에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받아들여져 국내로 다시 들어왔다. 사망날짜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대륙을 누비던 비운의 혁명가는 입북이후 내리막길만을 걷다 초라한 최후를 맞았다. 47세의 젊은 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