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의 배경과 영향 그리고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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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편전쟁의 배경과 영향 그리고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Ι. 아편전쟁

1. 아편전쟁의 배경

1) 광동무역체제(廣東貿易體制)
2) 아편 전래와 은의 유출
3) 이금론(弛禁論)과 엄금론(嚴禁論)
4) 임칙서의 아편 대책

2. 아편전쟁의 경과

1) 전쟁의 시작과 「천비조약(川鼻條約)」
2) 청조의 대영 선전 포고와 「광주화약(廣州和約)」의 조인
3) 영국의 침략 전쟁 확대와 청조의 항복
4) 아편전쟁의 패인
5) 남경조약(南京條約)과 일련의 불평등 조약의 체결

3. 제2차 아편전쟁

1) 조약 개정과 애로우호 사건
2) 영․프 연합군의 북상과 「천진조약(川津條約)」
3) 영․프 연합군의 북경 점령과 북경조약의 체결

Ⅱ.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1. 아편전쟁과 일본

1) 일본의 쇄국
2)아편전쟁에 대한 정보
3)일본이 문을 열다

2. 아편전쟁과 조선

1)조선의 쇄국
2)아편전쟁에 대한 정보
3)서구열강을 그대로 따라한 일본

3. 아편전쟁이 동아시아에 영향을 끼친 것들

Ⅲ. 맺음말

본문내용

던 흥선 대원군이 세력다툼 끝에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개화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어서 개화파들이 점점 고개를 들고 있었다.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게 되자 일본은 1875년에 조선에 사신을 파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중앙 집권적 국가를 건설해 나가던 일본은 그 과정에서 불만을 가지게 된 무사 계층의 관심을 해외로 돌리고자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이 대두되었던 시기였는데 원하는 것들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간 일본은 1875년 9월20일 조선 해안을 측량한다는 구실로 영국에서 수입한 운요호 등 군함 3척을 이끌고 강화도 앞바다로 간다. 강화도는 한강 어귀에 위치했기 때문에 서울에 접근하는데 가장 가까워 서울 위협에 될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 곳으로 향한 것이였다.
조선과의 전투가 벌어지게 되고 강화도에 거주하던 많은 사람들이 살육을 당하게 된다. 그 후 일본은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게 되는데 무력시위를 하면서 조선에게 이번 전투의 책임이 있다며 조약을 맺을 것을 강요하게 된다. 결국 1876년 2월 26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고 조선은 일본에 개항을 하게 되었다.
「강화도 조약」은 일본이 서구열강에 문을 열었던 방법 그대로를 베껴왔다. 자신들이 원하는 국가에 강압적으로 문호를 열게 하고 항구를 개방시키며 영사재판권을 챙기는 등 자신들이 미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내용을 그대로 우리에게도 강요한다.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우리 나라는 해외에 문을 열게 되지만 그것은 자유로운 무역이 아닌 서구열강의 침탈이 시작되는 것이였고 일본 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의 서구열강과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된다.
3. 아편전쟁이 동아시아에 영향을 끼친 것들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중국은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국을 하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도 서구 열강의 위협 아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고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를 그대로 베껴온 일본은 조선이 문호를 열도록 만든다. 그리고 오랜기간 일본에게 약탈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결과는 아편전쟁을 겪으면서 한중일이 각기 다른 상황과 다른 대응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중국은 애초에 동아시아에서 서구 열강들이 가장 원하는 곳이였고 조선과 일본은 그 다음의 일이였다. 아편전쟁은 중국에서 애국적인 사대부들을 각성시켜, 서양 문물에 관심을 갖게 하고 폐정의 개혁을 원하게 되지만 중국의 황제나 다른 지도층들은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거리낌없이 국가의 주권과 이익을 팔아버렸다. 아편전쟁 후 지도층들은 실패에서 교훈을 배우지 않았고 화의를 맹신하며 자신들의 편안함만을 생각했다.
반면에 일본의 지도층은 서구열강의 위협 속에서 중국의 지도층과 달리 비교적 깨어 있었다. 일본에 페리가 왔을 때 주동적으로 일련의 개혁조치를 시도하려고 했다. 어리석고 수구적이기만 했던 중국의 정부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였다.
문호를 연 후에도 중국과 일본은 달랐다. 중국은 갈수록 심화되던 사회모순이 태평천국운동으로 폭발하고 그들의 창끝은 지도층을 향해 있었으며, 외국 침략세력도 공격했다. 그러나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지도층은 외국의 침략자들과 결탁하여 이 운동을 진압했고 서양 열강에 의지하고 그에 복종하는 상태만 더욱 심해졌다.
일본에서도 문호를 열고 농민과 도시 빈민들의 폭동이 적지 않게 일어났지만 태평천국운동처럼 거대한 규모의 움직임은 없었고 일본의 지도층은 어떻게 하면 서양 열강의 위협 속에서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에 집중했다. 그리고 하급무사들을 골간으로 하는 유신파가 민중의 막부 통치와 외국침략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존황양이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1857년 일본이 미국에 의해 개항한 후 등장한, 천황을 지지하고, 서구 열강은 배척할 것을 주장한 존왕양이파들의 정견을 가리키는 뜻도 있다.
의 기치를 들고 막부를 타도해내고 왕정을 복고시켰으며 메이지 유신을 실현했다.
중국과 일본이 아편전쟁으로 인해 서구 열강에게 휩쓸리며 문호를 개방할 때 조선에는 서구 열강의 본격적인 침입은 없었으나 이것을 무조건 다행이라고 여기기엔 조선의 해외에 대한 인식인 갑갑한 수준이였다. 비록 계속 쇄국정책을 고수 중이였지만 아편전쟁에 대한 소식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의 정세에 대한 준비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일본은 계속 발전해 나가서 메이지 유신까지 이를 때 조선은 개화파가 아직 힘을 얻지도 못하고 있었고 병인양요가 일어나 서구 열강의 발을 들이지 못하게 전투 중이였다.
Ⅲ. 맺음말
이 발표문을 통해 아편전쟁과 이로 인해 한중일 세 나라가 겪은 일들을 알아보게 됐다. 아편전쟁과 강화도 조약은 교과서에서 배우거나 누군가에게 듣게 됐을 땐 큰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아편전쟁으로 인해 일본도 문호를 열고 발전을 이룩해 그들이 당한 그대로 조선을 침략한 사실을 볼 때 세 나라 사이엔 분명 연결고리가 있었다.
아편전쟁과 관련된 일련의 상황을 볼 때 역사에 만약은 없으나 당시 조선이 좀 더 능동적으로 대처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개화파도 뒤늦게 힘을 얻게 되고 강화도 조약 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 생각에서 쇄국이 올바른 길이였다. 지금의 생각으로 모든걸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부터 시작해서 한국의 근세사나 근현대사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당하기만 하고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함에서 느끼는 답답함이 존재할 것이다. 상황도 다르고 과정도 달랐지만 조선의 능동적이지 못했던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런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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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하,『중국근현대사① 근대: 개혁과 혁명(上)』, 대명출판사, 2004
중국사연구회,『중국근대사』, 청년서, 1990
무원,『중국근대사』,천성림 역, 예전사, 1999
F.웨이크만, 『중국 제국의 몰락』,김의경 역, 예전사 ,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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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6.04
  • 저작시기20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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