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조선의공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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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식민지조선의공업화

2. 그 실태

3. 배경

4. 결론

본문내용

장기적으로 조선경제의 자립적 경제구조를 전망하기는 곤란
3) 물적자원
당시 미군당국이 추정한 귀속재산의 가치는 약 3,053억 엔으로 당시 세출규모의 약 9배에 달하는 것
해방 후의 혼란 남북분단 등으로 인하여 귀속공장은 한국전쟁 발발 전에 이미 그 상당부분이 파괴, 유실
새로 개체되는 신규시설은 지난날의 일본제 시설로부터 대부분 미국제 시설로 치환되었다는 점도 중요
4) 인적 자원
암스덴 - 실상 세계적 수준으로 보 때 한국의 교육투자는 식민지로서는 드물게 높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교육투자라는 것도 실은 한국인을 일본사회에 동화시키려는 일본 식민정책의 소산이었을 뿐이다. 고등교육과정에는 농업과 의학을 제외하고는 기술분야가 거의 없었다며 식민지기의 인적자원의 축적에 대해서는 부정적
두가지 점 지적 가능. 비록 한정된 것이기는 하나 기술교육 또는 공업교육이 확대, 초등교육 확대의 의의를 과소 평가
식민지공업화의 진전이 양질의 노동력을 수요하게 된 것이 초등교육 확충의 한 요인
기술교육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으나 학슴이 가능한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 학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전문기술 또는 공업 교육을 받은 기술자들의 현저한 증대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한국이 독립한 이후에 가능하였다.
3. 공업화에 대한 조선인의 대응
1) 농민과 지주
①농민경영의 변화
- 다비농법의 성립 :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여서 질소비료 생산
웃거름에 적합한 속효성의 비료
높은 기술과 값싼 전력으로 낮은 가격의 비료공급 가능
- 농업생산의 다각화
1930년대 후반에는 면화를 중심으로 하는 특용작물, 채소, 과일, 축산물의 구성비 증가
이 작물의 구성비 상승은 수요의 증가에 의해서 가능
수요증가는 공업화와 관련 : 섬유(면화, 누에고치)
채소의 주된 소비지는 상대적으로 공업화된 도시지역
- 농가부업 생산물의 구성변화 : 가마니제조의 비중이 증가하고, 직조의 비중이 감소
②지주의 농외투자
100정보 이상 소유지주 880명의 37% 정도가 농외투자(총 889건)
지주의 농외투자가 본격화되는 것은 대개 1920년경
- 1910년대 후반의 공업성장기에 투자욕구 축적
- 토지조사사업으로 지주의 토지자본이 화폐자본으로 전환할 가능성 증대
- 조선회사령의 철폐
1933-37년에도 지주의 농외투자는 증대
- 공업의 급성장기
-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 대자본과의 분업관련 하에서 조선인 영세회사 급증
1938년 이후 전시통제로 이러한 투자붐은 사라짐
지주의 농외투자의 방향
- 농산물가공업에 투자
- 농산물 유통부문에 투자 : 운수업, 창고업
- 금융업에 대한 투자 : 농업경영의 운전자금 또는 토지구입자금 마련을 위해 은행업, 보험업, 신탁업 등에 투자
- 농업경영과 무관한 농외투자 : 제조업, 토목/건축업, 인쇄업, 광업, 철도업, 상업 등
2) 근대적 노동자계급의 형성
근대적 노동자계급 :
공장이나 광산 등의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취하고 있는 기업에 취업하고 있는 정규적 노동자층
사업장에의 정착도가 높고 자본의 직접적인 관리하에서 집단적이고 규칙적인 노동을 요구받는 노동자군
1933-42년의 10년 사이에 공장, 광산 및 토건노동자의 수는 223,115명에서 744,023인으로 증가
1938년까지는 광산 및 토건노동자가 공장노동자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
근대적 노동자계급의 존재를 확인하는 지표
- 노동자의 정착도
- 기술, 기능, 숙련의 향상
광산노동자의 경우 1943년 재직연수가 1년 미만인 비율은 44.6%
특히 탄광의 경우 이동율이 연 200%에서 500%
재직연수가 1년미만인 공장노동자도 46.8%
방적공장 노동자의 연이동율은 119%에서 204% 사이, 근속연수도 1년 전후
1940년 일본인 공장노동자의 연이동율은 15%에서 20% 수준
다만 재직연수가 3년 이상인 사람도 20%가 넘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
1939년에서 1944년까지 기술자 및 기능자수는 229,022인에서 485,188인으로 증가
이중 조선인은 187,599인에서 405,067인으로 증가
수적으로는 조선인이 많으나 기능의 정도는 일본인이 훨씬 높았음
전쟁기간 일본인 노동자에 대한 징병으로 조선인 노동자의 육성이 필요
- 초등교육의 확대 : 취학율은 1930년대에 14.5%인 것이 1945년에는 50-60%
- 기술교육 또는 공업교육의 강화 : 학교, 직업훈련소, 공자의 양성소
- 기업내 또는 공장 내에서의 기술교육 또는 기능공 양성제도의 확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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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10.06.12
  • 저작시기2003.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18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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