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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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의 도자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중국 도자기의 유래

2. 중국도자기의 역사
ㅁ청자(靑磁)의 탄생
ㅁ초기의 청자(靑磁)
ㅁ수대(隋代)의 자기
ㅁ당(唐)의 청자

3. 중국 도자기의 발전과정
앙소토기와 용산토기
상대(商代)의 백도(白陶)
주대(周代)의 도기
한대(漢代)의 명기(明器)
당대(唐代)의 백자(白磁)
송대(宋代)의 관요(官窯)
원대(元代)의 경덕진(景德鎭)자기
명대(明代)의 다양한 채색 도기
청대(淸代)의 도자기 수출

본문내용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북송의 궁정에서 사용한 도자기의 일부는 멀리 절강이나 강서에서 공급해오기도 했지만 북송의 관요(官窯)로서 가장 이름이 높았던 것은 하북성 정주(定州)의 간자촌(澗磁村)에서 제작된 자기들이었다. 여기서 당말에 이미 녹색의 유약을 두껍게 바른 백자가 제작되었다. 정요(定窯)의 아름다움과 진가는 단순히 유약이나 장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형태의 절묘함과 순수성에 있다. 후에 휘종(徽宗)은 정요를 궁정용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결정하고 새로 두곳의 관요를 여주(汝州)와 수도의 성내에 설치하였다. 여요의 자기는 담황색 또는 주황색의 바탕에 엷은 보라색을 띤 청록색 유약이 덮여 있으며 표면전체에 돌비늘과 같은 잔금무늬가 그물처럼 펼쳐져 있다. 정요, 여요와 함께 감식가들로부터 ‘우후천청자(雨後天靑磁:비온 후 맑은 하늘과 같은 자기)’라고 불리는 균요(均窯)는 여요보다 무겁지만 표면에 엷은 보라색을 띤 푸른 유약에 무수히 많은 조그마한 기포들이 퍼져 있어서 한층 매혹적인 부드러움과 따사로움이 넘쳐난다. 이외에도 용천요(龍泉窯)에서 만들어진 청자는 중국의 수출품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원대(元代)의 경덕진(景德鎭)자기
원대에는 14세기 중엽부터 용천요를 대신해서 강서성 경덕진에서 제작된 도자기가 풍미하게 되었다.15세기 중엽에는 경덕진이 중국 최대의 요업 중심지였다. 그곳은 생산품을 강과 호수를 통해 남경으로, 대운하를 통해서는 북경으로 운반해 갈수 있는 파양호(陽湖)의 호반에 자리잡고 있어서 지리적으로 이상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이 지방 일대에는 무진장한 도토층이 산재해 있었고 고령토의 주산지인 고령촌이 경덕진에서 불과 45Km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에 짙은 청록생, 검푸른색, 자주색이 지배적인 삼채기(三彩器)나 백자에 5색의 채유로 그림을 그려 넣은 오채기(五彩器)들도 매우 유명했다.
명대(明代)의 다양한 채색 도기
도자기는 명대에 일변한다. 송대에는 대체로 무지의 청자와 백자가 많이 만들어졌으나 명대부터는 각종 문양을 넣고 채색도 청색, 홍색, 황색, 녹색 등으로 다양하고 화려한 작품이 다수 만들어지게 되었다. 제작지도 송대에는 각지에 이름난 요가 산재해 있었으나 명대에는 주로 강서성 경덕진의 관요를 중심으로 생산되었다. 특히 가정(嘉靖) 연대는 도자기 생산의 절정기였으며 다양한 채색 도자기가 대량으로 생산되어 국내 소비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청대(淸代)의 도자기 수출
청대에 오면 도자기들이 외국으로 많이 수출되는데, 1653년 네덜란드에서는 대만을 경유하여 그들이 원하는 도자기 목형 견본까지 보내올 정도였다. 이 때 수출용으로 제작된 것들은 모양이 기이하거나 장식이 야단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송대 도자기처럼 미묘하고 세련된 맛을 풍기고 있고 형태, 표면, 빛깔 등 고적적인 완벽함을 갖추고 있는 간색의 작은 그릇들이었다. 그러나 18세기 말에 이르면서 서구에서는 자신의 가마에서 생산된 자기들로 자급자족하게 되었기 때문에 중국자기에 대한 정열은 식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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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6.16
  • 저작시기2007.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19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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