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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한 그녀의 작품 <모세>가 매년 벨라스아르테스 미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 2등상을 수상했다.
그녀가 죽고 1984년 멕시코 정부는 프리다 칼로의 모든 작품을 국보로 지정하여 명실 공히 멕시코의 대표 화가로 인정했다.
4.평가
프리다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였고 여성의 신체와 이를 둘러싼 성적 금기의 경계를 진보적으로 타파했으며, 나아가 멕시코 혁명 이후 식민지 시대의 잔재에서 벗어나 멕시코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회복하여 그들 나름의 민족적 정체성을 찾는 멕시코주의의 성립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프리다 칼로가 살아있던 당시에 그녀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적 평가에 치중해 있었다. 그녀의 전시회를 본 많은 유명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그녀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초현실주의자의 필수 덕목인 악마적 아름다움을 지녔다.”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자의 이상형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그녀에게는 연극적 자질과 상당한 기벽이 있었다. 프리다는 항상 의식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연기했고, 그녀의 이국 취향은 금방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초현실주의 비평가 니콜라스 칼라스
“일종의 신화적 인물로, 이 세상사람 같지 않게 오만하며 절대적 자신감에 차 있는 동시에 너무나도 부드러우면서 난초처럼 남성적”-줄리앙 레비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초현실주의 시각에 맞혀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한 그녀의 작품을 초현실주의로 해석 하는 것은 단지 초현실주의자들의 관점이었다. 디에고를 포함한 몇몇 분별 있는 평론가들만이 프리다의 미술과 정통 초현실주의 사이의 차이점을 인식했다. 디에고는 그녀의 그림들이 언제나 그녀 자신의 내면과 외면, 그리고 세계를 그려 내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녀를 초현실주의자로 분류하는 견해들을 일축했다. 미술 사학자 안토니오 로드리게스 역시 프리다에 대한 일련의 논문에서 그 점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프리다는 초현실주의자가 아니며 오히려 현실에 깊이 뿌리박은 화가, 특출하게 사실적인 화가이다. 프리다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작품과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선정적인 꿈 풀이 세계에서의 방황이 아니라 자신의 끔찍한 경험에 관한 자서전이다.” 프리다 또한 자신이 초현실주의자가 아님을 강력히 피력하였다.
(짧은 머리의 자화상, 1940년/부러진 척추, 1944년/나의 탄생, 1932년)
이후 페미니스트 미술가들이 여성적인 속성과 여성 경험의 가치를 재평가 하면서 프리다 칼로의 작품들이 새롭게 조명을 받았다. 이러한 평가는 1970년대 팽배했던 페미니즘 연구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여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이 왕성했던 당시 분위기에 의한 것이었다. 기존의 여성이나 여성의 몸을 주제로한 작품들은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서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소모품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리다 칼로는 이러한 관습에서 과감한 일탈을 시도했다. 피 흘리고 고통 받는 여성 누드를 그림으로써 그녀의 그림은 더 이상 남성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그림이 아니었다. 때문에 프리다 칼로의 작품은 그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페미니스트들이 공격하고자 했던 정형화된 여성 차별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발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페미니스트들의 여성 몸에 대한 관심은 임신 출산등 여성 특유의 생물적 경험이나 여성만이 경험하는 생리적 특성, 여성적 속성, 레즈비언이즘, 여성과 대지 자연의 연계성 등의 테마로 확대되는데 이 모든 요소들이 프리다 칼로의 삶이나 그림, 글에서 끊임없이 등장하였다. 때문에 프리다 칼로의 모든 것은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흥미로운 연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평가로 프리다 칼로의 작품은 고국 멕시코보다 오히려 미국과 유럽에서 더욱 유행했으며 이러한 유행이 오늘날에 이르러 세계 곳곳에서 그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그녀가 초현실주의던 페미니스트건 그녀는 자신의 그림이 어디에 속하고, 또 무엇을 의도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프리다는 단지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그림으로 승화하고자 했고, 그녀의 인생을 그림에 담고자 하였다. 초현실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현실을 넘어서 상징적으로 나타내었고, 페미니스트라기 보다는 누구보다도 솔직하고 대담했던 그녀가 성장하면서 겪은 아픔이 후에 당시 상황,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노골적이고 솔직한 그림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림을 잘 알진 못하지만 어느 작가의 그림보다도 의도나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이해아고 공감할수 있는 것 같다.
그녀가 죽고 1984년 멕시코 정부는 프리다 칼로의 모든 작품을 국보로 지정하여 명실 공히 멕시코의 대표 화가로 인정했다.
4.평가
프리다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였고 여성의 신체와 이를 둘러싼 성적 금기의 경계를 진보적으로 타파했으며, 나아가 멕시코 혁명 이후 식민지 시대의 잔재에서 벗어나 멕시코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회복하여 그들 나름의 민족적 정체성을 찾는 멕시코주의의 성립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프리다 칼로가 살아있던 당시에 그녀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적 평가에 치중해 있었다. 그녀의 전시회를 본 많은 유명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그녀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초현실주의자의 필수 덕목인 악마적 아름다움을 지녔다.”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자의 이상형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그녀에게는 연극적 자질과 상당한 기벽이 있었다. 프리다는 항상 의식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연기했고, 그녀의 이국 취향은 금방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초현실주의 비평가 니콜라스 칼라스
“일종의 신화적 인물로, 이 세상사람 같지 않게 오만하며 절대적 자신감에 차 있는 동시에 너무나도 부드러우면서 난초처럼 남성적”-줄리앙 레비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초현실주의 시각에 맞혀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한 그녀의 작품을 초현실주의로 해석 하는 것은 단지 초현실주의자들의 관점이었다. 디에고를 포함한 몇몇 분별 있는 평론가들만이 프리다의 미술과 정통 초현실주의 사이의 차이점을 인식했다. 디에고는 그녀의 그림들이 언제나 그녀 자신의 내면과 외면, 그리고 세계를 그려 내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녀를 초현실주의자로 분류하는 견해들을 일축했다. 미술 사학자 안토니오 로드리게스 역시 프리다에 대한 일련의 논문에서 그 점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프리다는 초현실주의자가 아니며 오히려 현실에 깊이 뿌리박은 화가, 특출하게 사실적인 화가이다. 프리다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작품과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선정적인 꿈 풀이 세계에서의 방황이 아니라 자신의 끔찍한 경험에 관한 자서전이다.” 프리다 또한 자신이 초현실주의자가 아님을 강력히 피력하였다.
(짧은 머리의 자화상, 1940년/부러진 척추, 1944년/나의 탄생, 1932년)
이후 페미니스트 미술가들이 여성적인 속성과 여성 경험의 가치를 재평가 하면서 프리다 칼로의 작품들이 새롭게 조명을 받았다. 이러한 평가는 1970년대 팽배했던 페미니즘 연구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여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이 왕성했던 당시 분위기에 의한 것이었다. 기존의 여성이나 여성의 몸을 주제로한 작품들은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서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소모품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리다 칼로는 이러한 관습에서 과감한 일탈을 시도했다. 피 흘리고 고통 받는 여성 누드를 그림으로써 그녀의 그림은 더 이상 남성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그림이 아니었다. 때문에 프리다 칼로의 작품은 그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페미니스트들이 공격하고자 했던 정형화된 여성 차별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발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페미니스트들의 여성 몸에 대한 관심은 임신 출산등 여성 특유의 생물적 경험이나 여성만이 경험하는 생리적 특성, 여성적 속성, 레즈비언이즘, 여성과 대지 자연의 연계성 등의 테마로 확대되는데 이 모든 요소들이 프리다 칼로의 삶이나 그림, 글에서 끊임없이 등장하였다. 때문에 프리다 칼로의 모든 것은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흥미로운 연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평가로 프리다 칼로의 작품은 고국 멕시코보다 오히려 미국과 유럽에서 더욱 유행했으며 이러한 유행이 오늘날에 이르러 세계 곳곳에서 그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그녀가 초현실주의던 페미니스트건 그녀는 자신의 그림이 어디에 속하고, 또 무엇을 의도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프리다는 단지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그림으로 승화하고자 했고, 그녀의 인생을 그림에 담고자 하였다. 초현실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현실을 넘어서 상징적으로 나타내었고, 페미니스트라기 보다는 누구보다도 솔직하고 대담했던 그녀가 성장하면서 겪은 아픔이 후에 당시 상황,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노골적이고 솔직한 그림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림을 잘 알진 못하지만 어느 작가의 그림보다도 의도나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이해아고 공감할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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