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초기
2) 성장기(론 테니스)
3) 현대 테니스 (프로 테니스)
4) 한국의 테니스의 역사
2) 성장기(론 테니스)
3) 현대 테니스 (프로 테니스)
4) 한국의 테니스의 역사
본문내용
9월 용산 철도국 코트에서 오사카 마이니찌 신문사 경성지국이 주최한 제1회 경식정구선수권 대회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아있는 테니스 경기기록으로는 1928년 10월 13일부터 3일간 경성운동장에서 열렸던 제4회 조선신궁경기대회의 전적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8년 8월 만주에서 제1회 조선만주 대항 테니스대회를 개최하는 등 초창기 테니스보급에 열정을 쏟았던 강성태는 훗날 대한테니스협회장에 취임, 한국테니스의 대부로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인기가 높았던 구기는 뭐니 뭐니 해도 연식정구였다. 일본에서 창안된 연식정구는 20세기 초반 현해탄을 건너왔는데 30년대에만 해도 전국대회가 10여 개에 이를 정도로 급속하게 확산됐다.
더구나 조선대표가 연식정구 본산인 일본에서 벌어진 명치신궁대회에서 10연패를 이룩하자 국내에서의 연식정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조선연식정구협회가 발족된 것은 이 무렵의 일이다. 이 단체는 해방 직후 조선정구협회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가 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대한정구협회로 개칭됐다.
정구협회는 연식정구와 테니스를 모두 관장했다. 테니스와 연식정구의 위상이 역저노디기 시작한 것은 40년대 후반부터이다. 주한미군의 영향으로 테니스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고 동호인이 급증하자 유명한 연식정구선수들이 대거 테니스로 전향했다. 정구협회는 48년 9월 국제테니스연맹 ITF에 가입한데 이어 53년 9월에는 대한체육회의 정식 가맹단체가 됐다. 대한 정구협회에서 정식으로 독립하고 사업가인 나추건씨를 초대회장으로 역임된 대한테니스협회는 55년 9월이다.
테니스가 전국체전 종목으로 데뷔한 해는 1946년이다. 그 해 10월 16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27회 전국체전에서는 신택선이 단식, 조두흠-권복인 조가 복식에서 각각 1위를 기록했다. 역대체전 중에서 특이할 만한 대회는 33회 체전이었다. 52년 10월 서울 수복 후 처음 열린 이 대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테니스경기의 시구를 담당, 국가원수로선 유일하게 테니스코트에서 대회 개막을 선포하는 기록을 세웠다.
한국테니스가 국제규칙이 적용되는 국제대회에 처음 참가한 것은 58년 5월 도쿄에서 거행된 제3회 아시안게임이다. 한상원(4대 협회장)이 인솔한 한국팀은 경험부족으로 대개 초반탈락의 분루를 삼켜야 했다. 가장 좋은 성적을 올린 선수는 단식 3회전에 진출한 이상연이었다. 아시안게임 첫 메달을 한국에 안겨준 것은 66년 12월 제5회 방콕 아시아드 여자복식(동메달)이었다. 금메달은 74년 제7회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나왔는데 한국은 이 대회 여자 단체전에 출전, 결승리그에서 중국에 1:2로 패했으나 다른 5경기를 모두 승리해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한국은 60년 데이비스컵 동부예선전, 73년 페더레이션컵에 각각 참가함으로써 세계국가대항전에도 첫발을 내디뎠다. 대학생의 축제인 유니버시아드에는 67년부터 출전하기 시작, 85년 고베대회에서 김봉수가 단식 동메달을 수확했고 영국의 세필드 대회에선 남녀복식에서 나란히 동반우승을 차지하는 개가를 올렸다.
1938년 8월 만주에서 제1회 조선만주 대항 테니스대회를 개최하는 등 초창기 테니스보급에 열정을 쏟았던 강성태는 훗날 대한테니스협회장에 취임, 한국테니스의 대부로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인기가 높았던 구기는 뭐니 뭐니 해도 연식정구였다. 일본에서 창안된 연식정구는 20세기 초반 현해탄을 건너왔는데 30년대에만 해도 전국대회가 10여 개에 이를 정도로 급속하게 확산됐다.
더구나 조선대표가 연식정구 본산인 일본에서 벌어진 명치신궁대회에서 10연패를 이룩하자 국내에서의 연식정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조선연식정구협회가 발족된 것은 이 무렵의 일이다. 이 단체는 해방 직후 조선정구협회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가 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대한정구협회로 개칭됐다.
정구협회는 연식정구와 테니스를 모두 관장했다. 테니스와 연식정구의 위상이 역저노디기 시작한 것은 40년대 후반부터이다. 주한미군의 영향으로 테니스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고 동호인이 급증하자 유명한 연식정구선수들이 대거 테니스로 전향했다. 정구협회는 48년 9월 국제테니스연맹 ITF에 가입한데 이어 53년 9월에는 대한체육회의 정식 가맹단체가 됐다. 대한 정구협회에서 정식으로 독립하고 사업가인 나추건씨를 초대회장으로 역임된 대한테니스협회는 55년 9월이다.
테니스가 전국체전 종목으로 데뷔한 해는 1946년이다. 그 해 10월 16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27회 전국체전에서는 신택선이 단식, 조두흠-권복인 조가 복식에서 각각 1위를 기록했다. 역대체전 중에서 특이할 만한 대회는 33회 체전이었다. 52년 10월 서울 수복 후 처음 열린 이 대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테니스경기의 시구를 담당, 국가원수로선 유일하게 테니스코트에서 대회 개막을 선포하는 기록을 세웠다.
한국테니스가 국제규칙이 적용되는 국제대회에 처음 참가한 것은 58년 5월 도쿄에서 거행된 제3회 아시안게임이다. 한상원(4대 협회장)이 인솔한 한국팀은 경험부족으로 대개 초반탈락의 분루를 삼켜야 했다. 가장 좋은 성적을 올린 선수는 단식 3회전에 진출한 이상연이었다. 아시안게임 첫 메달을 한국에 안겨준 것은 66년 12월 제5회 방콕 아시아드 여자복식(동메달)이었다. 금메달은 74년 제7회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나왔는데 한국은 이 대회 여자 단체전에 출전, 결승리그에서 중국에 1:2로 패했으나 다른 5경기를 모두 승리해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한국은 60년 데이비스컵 동부예선전, 73년 페더레이션컵에 각각 참가함으로써 세계국가대항전에도 첫발을 내디뎠다. 대학생의 축제인 유니버시아드에는 67년부터 출전하기 시작, 85년 고베대회에서 김봉수가 단식 동메달을 수확했고 영국의 세필드 대회에선 남녀복식에서 나란히 동반우승을 차지하는 개가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