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21) 홍세태의(洪世泰)의 시와 위항실정(委巷實情)
1) 삶과 의식
2) 시에 나타난 위항실정(委巷實情)
가. 당시풍의 수용
나. 자의식과 감상성
다. 조선 산수와 사실성
라. 위항실정과 교유
◇◆ 맺는말
1) 삶과 의식
2) 시에 나타난 위항실정(委巷實情)
가. 당시풍의 수용
나. 자의식과 감상성
다. 조선 산수와 사실성
라. 위항실정과 교유
◇◆ 맺는말
본문내용
협을 따라 그 동생 김창흡과 더불어 단양을 구경하고 자신은 다시 청평산에 노닐었다. 그리고 이듬해 둔전장 일로 송도를 거쳐 배천을 다녀온 것을 보면 이 시의 제목을 얼마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둔전장으로 가기로 했는데 낙마하여 그 일을 미루고 생계가 급한데도 불구하고 단양 충주 제천과 청평산에 유람했다는 것이다.
기구는 생계를 위해 황해도의 둔전장으로 가기로 했는데 도리어 단양으로 유람가는 자신의 우활한 삶의 방식을 말한 것이고, 승구는 생계에 급급해서 황해도로 가는 게 좋은지 아니면 단양과 청평산으로 유람가는게 좋은지는 하늘이 정하는 것이라 알 수 없다고 했다. 곧 생계에 매달리는 것과 유람하고 시를 짓는 것은 자신에게 경중을 가리기 힘들만큼 둘 다 중요한 일이고, 따라서 생활인과 시인으로서 의미는 하늘이 정할 뿐이라는 것이다. 전구는 결국 그는 청평산으로 유람가는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고, 결구는 자연 속에 노닐며 시를 짓는 데에서 자신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생활도 접어두고 산천을 유람하고 시를 지으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과 교유하기를 즐겼던 것이다.
金莘老와 安重觀 朴士賓 金時敏 鄭後僑 鄭來僑가 술을 들고 오고 李秉 淵이 따라와 兪好仁의 운으로 함께 시를 지음
(金莘老與安國賓,朴士賓,金士修,鄭惠卿,鄭潤卿携酒來過。李一源追至 用溪韻共賦)
계곡 물과 사람의 뜻은 만고에 흘러 머물지 않고
여러분 오신 게 반가운데 누가 이 정자를 알았을까.
살구꽃은 봄비에 피어나고 산 빛은 사방이 푸른데
항상 적막하게 누워 있다가 오늘에야 문밖에 나왔네.
溪流與人意 萬古活無停 獨喜來諸子 誰知有此亭 杏花一雨白 山色四隣靑 寂寞常高臥 吾今出戶庭 (柳下集, 券6, 418쪽)
그가 65살(1717, 정유년) 봄에 사족과 중인이 한 무리가 되어 시우인 홍세태를 찾아온 것이다. 김신로(金莘老), 안중관(安重觀), 박사빈(朴士賓), 김시민(金時敏), 이병연(李秉淵) 등은 사대부들이고, 정후교(鄭後僑), 정래교(鄭來僑) 그리고 자신은 중인이다. 이렇게 신분을 뛰어넘은 망형지교(忘形之交)로 사회를 즐겼던 것이다. 한 수 건너 실린 작품도 이들이 다시 모여 시회를 연 작품이다. 같은 책, 같은 곳. 太僕李主簿遣騎邀余 與金莘老 安國賓 朴士賓 金士修 鄭惠卿 鄭潤卿 登君子亭 呼韻共賦.
수련에는 계곡 물과 사람의 뜻이 영원히 흘러가는 것이라 하여 사람의 의지나 정이라는 것도 흐르는 물처럼 변하는 것이라고 했다. 함련에서 이런 이치를 뒤집고 시우를 찾아 신분의 간격도 버리고 보잘것없는 유하정(柳下亭)을 방문한 이들에 대한 반가움을 토로했다. 경련은 봄비 온 뒤의 살구꽃과 푸른 산 빛을 그 반가움의 눈으로 그려낸 것이고, 미련은 망형지교(忘形之交)를 맺은 시우들과 어울려 모처럼 봄놀이를 하게 된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시로써 신분의 장벽을 넘어 사대부 시인과 여항 시인이 함께 어울리는 폭넓은 교유를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항 시인의 시적 능력을 과시하고 그들과 천기(天機)를 시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사대부와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그래서 그가 시명(詩名)을 얻어 여항인으로 하여금 독서에 분발하게 한 공이 있다는 평을 얻었던 것이다. 南有容, 省稿序, 雷淵集, 권11. 始滄浪徒手起委巷 一唱爲正音 名動士大夫間 而閭井之人 各自奮 自五尺童子 咸知挾策讀書之爲貴 嗟乎 是誰之力也.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홍세태는 여항인의 시단인 낙사(洛社)에서 중심적인 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사대부 시인들과도 망형지교를 맺어 시로써 일세에 이름을 날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위항의 실정을 시로 표현하고 사대부로 하여금 그들의 처지와 재능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게 했다.
◇◆ 맺는말
홍세태는 숙종, 경종 때 주로 활동했던 위항시인(委巷詩人)이다. 신분이 미천했던 탓으로 하급 관리를 전전했으나 시로써 이름을 얻어 사대부들도 그를 알아주었고 어려움에서 구해 주기도 하였다. 그는 최기남(崔奇男) 이후 활성화되기 시작한 위항 시단에서 중심적 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위항시인의 시를 모아 <해동유주(海東遺珠)>를 묶어내기도 했다.
그의 삶과 의식에서 짚어낼 수 있는 특징들이 그의 시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천기론(天機論)을 주장하여 중인층의 인격적 평등성과 인간의 진솔한 감정이나 천성 또는 본원적 순수성을 내세웠으며, 조선시의 개성을 옹호하고 위항문학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였고, 위항시인의 시에서 드러나는 울분이나 비애도 자연스런 감정의 유출로 보았다.
둘째, 그는 어려서부터 당시에 치중하였고 특히 비장하고 감개한 시풍을 지녔던 고적(高適)과 잠삼(岑參)과 비슷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김창협 형제의 송시지향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만년까지 당시, 특히 두시에 대한 수용자세를 버리지 않았다고 하겠다.
셋째, 비천한 사회적 신분으로 인한 자의식과 비분강개의 감상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시인의 주관적 감정을 중시하여 생활속의 즐거움이나 괴로움, 슬픔을 가식없이 표현해 내는 것이 천기(天機)를 표출하는 진시(眞詩)라고 보았다.
넷째, 그는 낙송루시사(洛誦樓詩社)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이른바 진시운동에 참여했던 만큼 조선시의 개성과 조선산수의 사실성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있는 그대로’ 보다 ‘느낀 그대로’에 치중하여 당시의 감흥이나 낭만성을 잇고자 한 점에서 송시풍을 중시한 농암이나 삼연과 구별되는 만큼, 그의 사실성은 조선의 산수와 풍물에서 느낀 감흥을 중시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다섯째, 그는 위항인으로서 겪은 고통과 울분과 슬픔을 오로지 시로 승화시켰고, 이러한 심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같은 처지의 많은 위항인들과 시로써 어울려 위항시단인 낙사에서 중심적 활동을 하였으며, 나아가 그의 재능을 아끼고 그의 어려운 처지를 돌보아 준 사대부들과도 시로써 폭넓게 교유하였다.
끝으로 그는 한국 한시에서 위항시인의 시를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음으로써 전대에 싹트기 시작한 위항시를 집대성하고 다음에 이어질 위항시인의 활동을 선도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이로써 위항인의 삶과 의식이 한국한시의 표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기구는 생계를 위해 황해도의 둔전장으로 가기로 했는데 도리어 단양으로 유람가는 자신의 우활한 삶의 방식을 말한 것이고, 승구는 생계에 급급해서 황해도로 가는 게 좋은지 아니면 단양과 청평산으로 유람가는게 좋은지는 하늘이 정하는 것이라 알 수 없다고 했다. 곧 생계에 매달리는 것과 유람하고 시를 짓는 것은 자신에게 경중을 가리기 힘들만큼 둘 다 중요한 일이고, 따라서 생활인과 시인으로서 의미는 하늘이 정할 뿐이라는 것이다. 전구는 결국 그는 청평산으로 유람가는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고, 결구는 자연 속에 노닐며 시를 짓는 데에서 자신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생활도 접어두고 산천을 유람하고 시를 지으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과 교유하기를 즐겼던 것이다.
金莘老와 安重觀 朴士賓 金時敏 鄭後僑 鄭來僑가 술을 들고 오고 李秉 淵이 따라와 兪好仁의 운으로 함께 시를 지음
(金莘老與安國賓,朴士賓,金士修,鄭惠卿,鄭潤卿携酒來過。李一源追至 用溪韻共賦)
계곡 물과 사람의 뜻은 만고에 흘러 머물지 않고
여러분 오신 게 반가운데 누가 이 정자를 알았을까.
살구꽃은 봄비에 피어나고 산 빛은 사방이 푸른데
항상 적막하게 누워 있다가 오늘에야 문밖에 나왔네.
溪流與人意 萬古活無停 獨喜來諸子 誰知有此亭 杏花一雨白 山色四隣靑 寂寞常高臥 吾今出戶庭 (柳下集, 券6, 418쪽)
그가 65살(1717, 정유년) 봄에 사족과 중인이 한 무리가 되어 시우인 홍세태를 찾아온 것이다. 김신로(金莘老), 안중관(安重觀), 박사빈(朴士賓), 김시민(金時敏), 이병연(李秉淵) 등은 사대부들이고, 정후교(鄭後僑), 정래교(鄭來僑) 그리고 자신은 중인이다. 이렇게 신분을 뛰어넘은 망형지교(忘形之交)로 사회를 즐겼던 것이다. 한 수 건너 실린 작품도 이들이 다시 모여 시회를 연 작품이다. 같은 책, 같은 곳. 太僕李主簿遣騎邀余 與金莘老 安國賓 朴士賓 金士修 鄭惠卿 鄭潤卿 登君子亭 呼韻共賦.
수련에는 계곡 물과 사람의 뜻이 영원히 흘러가는 것이라 하여 사람의 의지나 정이라는 것도 흐르는 물처럼 변하는 것이라고 했다. 함련에서 이런 이치를 뒤집고 시우를 찾아 신분의 간격도 버리고 보잘것없는 유하정(柳下亭)을 방문한 이들에 대한 반가움을 토로했다. 경련은 봄비 온 뒤의 살구꽃과 푸른 산 빛을 그 반가움의 눈으로 그려낸 것이고, 미련은 망형지교(忘形之交)를 맺은 시우들과 어울려 모처럼 봄놀이를 하게 된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시로써 신분의 장벽을 넘어 사대부 시인과 여항 시인이 함께 어울리는 폭넓은 교유를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항 시인의 시적 능력을 과시하고 그들과 천기(天機)를 시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사대부와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그래서 그가 시명(詩名)을 얻어 여항인으로 하여금 독서에 분발하게 한 공이 있다는 평을 얻었던 것이다. 南有容, 省稿序, 雷淵集, 권11. 始滄浪徒手起委巷 一唱爲正音 名動士大夫間 而閭井之人 各自奮 自五尺童子 咸知挾策讀書之爲貴 嗟乎 是誰之力也.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홍세태는 여항인의 시단인 낙사(洛社)에서 중심적인 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사대부 시인들과도 망형지교를 맺어 시로써 일세에 이름을 날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위항의 실정을 시로 표현하고 사대부로 하여금 그들의 처지와 재능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게 했다.
◇◆ 맺는말
홍세태는 숙종, 경종 때 주로 활동했던 위항시인(委巷詩人)이다. 신분이 미천했던 탓으로 하급 관리를 전전했으나 시로써 이름을 얻어 사대부들도 그를 알아주었고 어려움에서 구해 주기도 하였다. 그는 최기남(崔奇男) 이후 활성화되기 시작한 위항 시단에서 중심적 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위항시인의 시를 모아 <해동유주(海東遺珠)>를 묶어내기도 했다.
그의 삶과 의식에서 짚어낼 수 있는 특징들이 그의 시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천기론(天機論)을 주장하여 중인층의 인격적 평등성과 인간의 진솔한 감정이나 천성 또는 본원적 순수성을 내세웠으며, 조선시의 개성을 옹호하고 위항문학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였고, 위항시인의 시에서 드러나는 울분이나 비애도 자연스런 감정의 유출로 보았다.
둘째, 그는 어려서부터 당시에 치중하였고 특히 비장하고 감개한 시풍을 지녔던 고적(高適)과 잠삼(岑參)과 비슷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김창협 형제의 송시지향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만년까지 당시, 특히 두시에 대한 수용자세를 버리지 않았다고 하겠다.
셋째, 비천한 사회적 신분으로 인한 자의식과 비분강개의 감상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시인의 주관적 감정을 중시하여 생활속의 즐거움이나 괴로움, 슬픔을 가식없이 표현해 내는 것이 천기(天機)를 표출하는 진시(眞詩)라고 보았다.
넷째, 그는 낙송루시사(洛誦樓詩社)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이른바 진시운동에 참여했던 만큼 조선시의 개성과 조선산수의 사실성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있는 그대로’ 보다 ‘느낀 그대로’에 치중하여 당시의 감흥이나 낭만성을 잇고자 한 점에서 송시풍을 중시한 농암이나 삼연과 구별되는 만큼, 그의 사실성은 조선의 산수와 풍물에서 느낀 감흥을 중시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다섯째, 그는 위항인으로서 겪은 고통과 울분과 슬픔을 오로지 시로 승화시켰고, 이러한 심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같은 처지의 많은 위항인들과 시로써 어울려 위항시단인 낙사에서 중심적 활동을 하였으며, 나아가 그의 재능을 아끼고 그의 어려운 처지를 돌보아 준 사대부들과도 시로써 폭넓게 교유하였다.
끝으로 그는 한국 한시에서 위항시인의 시를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음으로써 전대에 싹트기 시작한 위항시를 집대성하고 다음에 이어질 위항시인의 활동을 선도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이로써 위항인의 삶과 의식이 한국한시의 표면에 떠오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