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계유정난과 인물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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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조의 계유정난과 인물 분석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선정이유
세조, 어떤 왕인가?
1.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2. 그의 정치는 어떠했는가.

Ⅱ. 세조, 오해와 진실
1. 사육신과 그를 택한 사람들
2. 쉽지 않은 정치로의 길

Ⅲ. 역사적 평가와 고찰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데 대부분의 신료들은 아무 문제없이 지나가는 말을 임금에게 지나치게 아부하려던 양녕이 꼬투리를 잡았다. 양녕이 이처럼 나이 들어 더욱 세조에게 아부를 한 것은 여자문제로 자주 탄핵을 받았던 자신을 집안어른으로 깍듯이 대우하던 세조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던 것이다. 안녕은 단종과 세조의 권력 분수령에 철저하게 세조에게 줄을 댄 덕분에 세조에게 극진한 예우를 받고 있었다.
슬쩍 지나가는 말 임금이 창손과 함께 세자의 학문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말하기를, “세자의 학문이 크게 통달하여 장차 국사를 물려주고자 한다.”라고 하자 창손이 대답하기를 “전하의 말씀이 타당합니다.”라 했다. 『조선 군주의 정치기술』, 김만중. 거송미디어. 2003
을 양녕이 사건으로 만들어 일을 확대하자 세조는 가슴 밑바닥에 숨어 있던 콤플렉스가 다시 발동하였다. 그것은 신하들이 자신을 겉으로는 복종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는 정통성이 취약한 군주의 속 좁은 마음이 작용한 것이다.
Ⅲ. 역사적 평가와 고찰
1. 계유정난, 필연적인 사건이었나?
수양대군은 계유정난 이후 자신에게 도전하는 인물은 가차 없이 제거했다. 친동생인 안평대군은 물론이고, 단종복위를 꾀했다는 이유로 동생 금성대군도 죽였다. 한남군, 영풍군 등 나머지 형제들도 대부분 변방으로 내몰았고, 단종의 매부인 정종과 누이인 경혜공주 역시 제거했다. 또 단종의 유모인 혜빈양씨도 제거했으며, 왕비 송시의 아버지인 송현수 마저 수양대군 저주 사건에 연루시켜 제거함으로써 단종의 곁에 그를 위해 충성할 인물이 아무도 없게 만들었다. 종래에는 조카인 어린 단종마저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유배를 보내 죽음으로 내몰았다.
단종은 그저 허수아비처럼 자리만 지키고 있었을 뿐, 모든 실권은 그에게 있었다. 언제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를 것인지 몰랐을 뿐 왕위에 오를 것이란 것을 세상이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 위치에 있었던 단종에게 선택의 여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왕위찬탈이 형식적인 전위로 표현된 것이다. 옥새를 전해준 성삼문이 통곡을 금치 못하였다고 전해진다. 『나는 조선의 왕이로소이다』 문효. 왕의 서재.2009
계유정난을 통해 발생한 공신들은 이미 고려 귀족의 전횡과 맞먹을 만큼 토지와 함께 음직을 주는 특권도 부여했다. 공신들에 대한 절대 신뢰를 보이며 그들을 비호했다. 아무리 큰 공을 세운 공신이라 해도 세력이 필요 이상으로 커지면 가차 없이 숙청을 가했던 태조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 때문에 도성을 벗어나면 공신들의 세상이었고 그들에게 뇌물이 집중되었다. 하여 공신들의 빈번한 범죄로 인해 사회문제가 대두되기도 하였다.
어쩌면 공신들은 세조의 약한 부위가 아니었을까. 종친의 자격이었던 수양대군은 군주를 폐하고 스스로 임금이 됐으니, 그것을 도운 공신들에게 약점을 갖게 된 것이다. 임금으로서 정당성이 취약했던 것 때문에 역모만 아니면 공신들이 마음대로 할 정도로 놔두게 되어버린 것이다.
2. 세조, 역사를 두려워하라
눈에 보이기에는 조선의 발전에 지대한 일을 하였다. 하지만 세조의 무단정치는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특유의 상명하달 방식의 통치는 정국을 경색시켰고,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제거하다 보니 오히려 후퇴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바로 집현전의 폐지였다. 대표적인 학자 배출소였던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정치 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앤 것은 소통하지 않는 왕이 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세조 역시 집현전에서 보낸 시간도 많았고, 그만큼 애정도 대단했다. 그러나 단종복위운동이 집현전에서 비롯된 만큼 그대로 둔다면 역모의 싹이 자라날 것은 분명해 보였다. 세조는 작은 정부를 위해 국정을 건의하고 규제하던 기관인 대간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만 강화시켰다.
세조는 신하들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융성시킨 데는 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야러 모로 유교적 입지가 약한 인물이었기에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 자신에게 있었다. 어린 조카를 죽음으로 내몰고 난 후 내내 죄책감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전국의 사찰을 떠돌아다니며 불사도 짓고, 탑도 세우고, 불경의 한글화에도 힘썼다.
그는 불교에 집착하면서 원상제를 도입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의 세 중신들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서 왕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는 일종의 ‘대리서무제’형식을 띠었는데, 결국 문종이 고명대신들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세조는 보위에 오른 후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그렇게 권좌에 오르고 보니 누구라도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두려워하기를 원했고, 그것이 결국 왕권 강화의 전제 정치로 이어졌다. 특히 ‘이시애 난’을 겪고 가장 믿었던 한명회와 신숙주가 연루됐다는 것을 알고는 불신이 더욱 강해졌다. 불심에 기대어 죄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늘 불안은 사라질 수 없었다.
그 역시 역사가 두렵긴 마찬가지 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피의 대가를 치루고 싶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수없이 많은 업적을 쌓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지만, 매순간 역사는 기록되고 있었다. 백성들을 위해, 강한 조선을 위해 마치 역사적 사명을 띠고 권좌에 앉아 있는 것이라 정당화를 시킬수록 세조는 백성들의 마음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숙주나물’의 유래가 변절해 버린 신숙주를 비아냥거리며 온 것처럼, 백성들은 그를 지켜보며 가슴에 역사를 새기고 있었다.
- 사육신묘,신도비
-광릉, 세조의 묘
-명나라, 영락제
★ 참고문헌
- 『나는 조선의 왕이로소이다』 문효. 왕의 서재. 2009
-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박영규. 웅진 지식하우스 2008
- 『조선의 킹메이커 』 박기현. 역사의 아침. 2008
- 『 세조대왕과 친인척』 지두환. 역사문화. 2008
- 『조선 군주의 정치기술』, 김만중. 거송미디어. 2003
- 『 조선조 세조의 국정운영』 최정용. 신서원 2000
- 고등학교 국사. 교육인적자원부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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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12.18
  • 저작시기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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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4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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