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동학]천도교(동학)의 창조성, 천도교(동학)의 역사, 천도교(동학)의 불택선악, 천도교(동학)의 추종자집단, 천도교(동학)와 기독교, 천주교(동학)와 31만세항쟁, 천도교(동학) 관련 시사점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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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천도교][동학]천도교(동학)의 창조성, 천도교(동학)의 역사, 천도교(동학)의 불택선악, 천도교(동학)의 추종자집단, 천도교(동학)와 기독교, 천주교(동학)와 31만세항쟁, 천도교(동학) 관련 시사점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천도교(동학)의 창조성

Ⅲ. 천도교(동학)의 역사

Ⅳ. 천도교(동학)의 불택선악

Ⅴ. 천도교(동학)의 추종자집단

Ⅵ. 천도교(동학)와 기독교

Ⅶ. 천주교(동학)와 31만세항쟁

Ⅷ. 결론 및 시사점

참고문헌

본문내용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유불선 3교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조선시대의 토착 사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조선시대는 옛부터의 불교나 선교를 밑바탕 정서로 깔고서 유교의 정신이 중심적으로 이끄는 시대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동학천도교는 차라리 유교의 민족적 토착화 종교라고 함이 보다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당시의 시대구조로 보아서 조선시대의 상층부는 보다 유교성향이 뚜렷하고, 농민층이나 피지배층은 유교성향이 상대적으로 약해지면서 토착적 불교나 선교의 흐름이 강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31만세항쟁은 이와 같은 당시의 사회성향을 토대로 하여 전개된 것이라고 하겠다.
일제침략이란 처참한 국난을 맞아서 전후기 의병을 거쳐서 만주 땅의 독립군을 이끄는 데에 양반 지도세력이 살신성인하며 차례차례 죽어가고 난 뒤에, 국내에 남아 있던 피지배층 유교세력들이 동학천도교의 기치 아래 한 덩이로 뭉쳐서 총궐기한 31만세항쟁의 의미는, 그 시대의 사상적 흐름을 분석하면 그 저변을 흐르는 성향이 명쾌해지는 것이다. 사실상 평범한 사람들의 유림 층이 일으킨 것이 31만세항쟁이고, 거대한 민족혼 분출의 드라마를 연출한 힘은 예전의 의병봉기부터 꾸준히 유림 층이었음을 재차 증명하는 것이다. 31만세항쟁의 정치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로 31만세항쟁은 평범한 다수가 항일의 활화산에 불같이 동참하면서 일어난 항쟁이다. 그것은 우리 민족은 하나같이 뭉쳐서 일제침략에 항거를 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일제침략의 잔혹한 흐름에 정면으로 항거한 유림 양반 지도층이 차례대로 죽음을 맞고 만주땅으로 밀려나면서 국내가 일제에 강점당하며 국내는 죽은 듯이 조용한 땅이 된 듯 했다. 그러나 31만세항쟁에 의해서 전체 민중이 다 함께 궐기함에 의해 항일전쟁은 지도층만이 나선 것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둘째로 31만세항쟁은 광무황제의 급격한 시해에 의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나라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 그것이 표출된 것이 31만세항쟁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민족의 구심점으로서의 임금님에 대한 끝없는 사랑의 심정이란 특수감정의 존재를 망각한 연구가 그간 주종을 이뤄 왔는데, 그것이 없이는 결코 민족적 분노가 하나같이 폭발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국내에 잔류해 있던 다수의 국민들은 만주땅에 망명한 사람들에 비해서는 행동력이나 결심이 뒤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내면에는 침략자에 대한 분노와 갈등이 잠재되어 있었고, 그것이 일시에 분출된 계기가 바로 광무제 시해였던 것이다.
셋째로 31만세항쟁에 참여한 천도교를 중심으로 한 민초들의 성향이 논의되어야 하겠는데, 그것은 당시의 사회에 널리 퍼진 유교의 영향에 의해 애국의 봇물이 터졌다고 생각된다는 점이다. 물론 불교나 개신교도 어느 정도의 참여는 있었으나 천도교가 주축을 이뤘고, 31만세항쟁에 참여한 민초들은 나름대로 유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기초적 토대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특히 천도교가 내면에 분명히 유교의 토대를 가진 민중유교의 성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겠다. 애국성향이 높은 유학의 세례를 받은 민중들이었기에 나라님의 비극에 총궐기를 할 수가 있었지, 그 토대가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생각된다.
Ⅷ. 결론 및 시사점
신학적으로 인내천이라는 교리는 초기의 낯설고 이색적인 최제우의 신과 세계에 대한 정교한 체계성을 결여한 선포에 비해 훨씬 철학적이고 논리 정연함을 갖추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 제기 내에서 볼 때 이러한 동학 및 천도교 지식인들의 의식적 활동의 결과로서 신 개념이 변형됨으로써 그것의 사회적 의의는 약화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동학 및 천도교의 이와 같은 변형된 신관 및 세계관은 신유교 세계관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주어진 세계 및 인간 사회를 신의 의지에 따라서 재어보고 심판하기보다는 원칙적으로 세계 및 사회를 가장 선하고 아름답게 주어진 것으로 보아 당연시한다. 이 때문에 주어진 세계의 질서와 조화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종교적 지식인의 일반적 경향은 이 경우에 세계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보수성을 드러내게 된다. 신의 본래적인 상태를 논의하는 가운데 현실의 부정과 개혁을 주장하는 경우에도, 그 본래적인 상태는 객관화되기가 대단히 곤란하여 지극히 철학적이거나 신비적인 성격을 면하기 어렵게 된다. 때문에 실제로 이러한 개혁과 부정의 주장은 인간의 능동적인 외부 활동으로 나타나기보다는 내면세계에서 이루어진다.
동학 공동체의 초기 신 개념 및 인간관은 변형을 거듭하여 마침내 천도교 시대에 와서 인간은 신과 같다 또는 인간이 곧 신이라는 견해로 더욱 심화 발전되었다는 것을 보아왔다. 바로 이러한 사상을 통해서 동학 공동체 지식인들은 전래의 성리학적인 위계적이고 신분 차별적인 인간 이해에 대립하는 인간의 절대 평등을 주장했다. 동시에 이는 기독교와는 정반대로 일종의 완벽한 인간의 자기 신격화를 의미했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신 앞에서 죄인으로서 동등하다는 사상을 발전시킨 데 반해, 동학 공동체 아니 천도교는 독특하게 성리학의 논리를 수용하는 방법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신과 같다는 사실을 가르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더할 나위 없이 존엄하다는 주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를 캐물을 필요가 있다. 동양의 주된 지적 전통은 모든 인간의 질적인 평등과 존엄성을 주장하면서 역설적으로 위계적 신분 질서에 의한 인격적 지배 복종의 관계를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서 그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때문에 인간이 신과 동등 또는 인간이 곧 신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현실 사회 속에서 인간이 그만큼 더 존중된다거나, 그런 사회가 근대적 민주 사회에 더 가깝다고 볼 수는 전혀 없다.
참고문헌
신용하 : 동학과 갑오농민전쟁 연구, 일조각, 1993
신형식·이배용 편저 :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 이화여대출판부, 1997
신일철 : 동학사사상의 이해, 사회비평사
이원호 : 교육사 교육철학 개설, 문음사, 1998
이덕수 : 수운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에 나타난 교육사상 고찰, 2004
장영민 : 동학의 정치사회운동, 경인한국학 연구총서, 2004

키워드

천도교,   동학,   천주,   천도,   최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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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4.16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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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67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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