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주자학)의 형성, 성리학(주자학)의 이기이원론, 성리학(주자학)의 태극설, 성리학(주자학)의 실천윤리, 성리학(주자학)과 호락논쟁, 성리학(주자학)과 유교정치, 성리학(주자학)의 불교비판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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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성리학(주자학)의 형성, 성리학(주자학)의 이기이원론, 성리학(주자학)의 태극설, 성리학(주자학)의 실천윤리, 성리학(주자학)과 호락논쟁, 성리학(주자학)과 유교정치, 성리학(주자학)의 불교비판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성리학(주자학)의 형성

Ⅱ. 성리학(주자학)의 이기이원론

Ⅲ. 성리학(주자학)의 태극설

Ⅳ. 성리학(주자학)의 실천윤리
1. 고려후기
2. 조선 초기 유교적 의례 정비
3. 화장
4. 추천
5. 가묘설립
6. 친영
7. 소학
8. 성리학적 윤리서의 보급

Ⅴ. 성리학(주자학)과 호락논쟁

Ⅵ. 성리학(주자학)과 유교정치

Ⅶ. 성리학(주자학)의 불교비판

참고문헌

본문내용

하겠으며 중용의 핵심은 戒愼에 있으니 寂이 아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계신은 경이요 정정 또한 정이다. 경은 主一無適일 뿐이다. 주일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며 무적은 마음의 옮긴 바가 없는 것이다. 지켜서 옮기지 않았는데 寂이 아니라함은 옳지 않다.
이색 이후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鄭夢周의 경우에는 朱子家禮에 따라 家廟를 세우고 先祀를 받들도록 했다든지, 불교를 혹독하게 비판한 金貂에 대한 치죄가 논의될 때 상소에서 “爲斥抵佛氏 儒者之常事”라고 하여 유학자로서 불교를 비판함을 당연하게 여긴다든지 하여 성리학의 실천과 불교비판의 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몽주가 대사성으로 있을 때 행한 다음의 經筵啓辭는 앞에서 인용한 이색의 유불절충적 해석과는 다른 유학관을 보여준다.
유자의 도는 모두 일용평상의 일이니 음식과 남녀관계는 누구나 같은 것이며 지극한 理가 그 속에 있다. 堯舜의 道 또한 이를 벗어나지 않으니 動靜과 語이 그 바름을 얻으면 곧 요순의 도이니 본래 대단히 높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저들 불씨의 교리는 그렇지가 않아 친척관계를 떠나고 남녀관계를 단절하여 홀로 바위굴에 앉아 풀옷을 입고 열매를 먹으며 空을 관조하고 寂滅을 근본으로 삼으니 어찌 평상의 도일까.
이러한 정몽주의 보다 적극적인 유교윤리의 실천강조와 불교비판의 개진에서 여말의 성리학이 소학의 개인적인 실천을 위주로 하는 단순한 修己의 學이 아니라 불교를 대신하는 새로운 이념으로 정립되어 감을 볼 수 있으나 성리학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부분적인데 머물러 있었고, 불교비판도 불교적 세계관 그 자체를 이론적으로 논박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小學을 위주로 하여 持敬中心의 修養論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魯齋學의 전통에서 벗어나서 성리학적 규범을 사회 전반에 적용하고 불교적 세계관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전제개혁을 강하게 주장했던 신진사류가 등장하면서부터였고 그 중심인물이었던 鄭道傳에 와서 國家理念으로서의 性理學이 완비된다 하겠다. 이색의 문하에서 같이 성리학을 공부한 정몽주이숭인과 정도전이 한편은 성리학적 명분론을 고수하고 다른 한편은 역성혁명을 주도하면서 경세론에 치중하게 된 것은 이들의 사회적 입지가 달랐기 때문이겠으나 정도전의 저술시기를 살펴보면 그의 주요저술 대부분이 조건개국 이후인데, 이는 정도전의 성리학이 새로운 사회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 그 때문에 정도전의 성리학이 명분론이나 수기중심이었던 개인적 차원의 성리학 이해와 실천에서 벗어나 조선 성리학의 전체 틀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지 않았나 한다. 佛氏雜辨 등에서 볼 수 있듯이 程朱의 理學的 世界觀에 입각한 宇宙論에서부터 心性論倫理論經世論까지 망라된 정도전의 理學體系는 바로 조선왕조의 통치범주를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성리학을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정립하면서 정도전이 제일의 과제로 삼은 것은 불교비판이었다. 정도전의 불교비판이 개국 후에 강도를 더하게 된 것은 불교적 세계관이 새로 창건된 조선왕조가 극복해야 할 전시대의 잔재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李成桂의 崇佛態度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정도전은 불교배척을 철저히 행하기 위하여 단순히 불교 교단의 사회경제적 폐해, 불교윤리의 비인륜성을 지적하는데 그치지 않고 불교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성리학과 대비시켜 비판하고 있다.
우리(유가)의 虛는 虛하되 있는 것이요 저들(불교)의 虛는 虛하되 없는 것이며, 우리의 寂은 寂하되 感하는 것이요 저들의 寂은 寂으로 그만 끝나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心과 理가 하나라고 본 것이요 저들은 둘이라고 본 것이며 저들은 마음이 空하여 理도 없다고 보았고 우리는 마음이 비록 空하나 만물의 이치를 모두 갖추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우리 유가는 하나이고 석씨는 둘이며 우리 유가는 連續이고 석씨는 間斷인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정도전은 유교(성리학)와 불교의 근본적인 차이를 空에 입각한 虛無寂滅의 세계관과 理氣에 입각한 實의 세계관의 차이로 보고 다른 모든 차이는 이로부터 파생된다고 보았다. 그는 氣의 모임과 흩어짐으로 사물과 인간의 생성소멸을 설명하는 張載 이후 일반화된 성리학의 氣論으로 불교의 幻妄觀과 輪回說靈魂不滅設을 비판하고 “천지보다 앞에 있어서 기도 이것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心도 이것이 품부되어 心이 되는” 理의 실재를 받아들여 세계와 인간의 본질이 공이라는 불교적 세계관을 부정한다. 이렇게 理氣論에 입각하여 불교와 유교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에 서 있음을 분명히 한 후 그 전에는 비판되지 않고 유교의 仁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인정되었던 慈悲의 개념과 勸善을 위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因果論을 불교의 현실적 폐해의 원인으로 비판한다. 성리학에서 표방하는 도덕형이상학 자체가 그러하지만 정도전에 의하면 선한 행동은 그것이 선하기 때문에, 즉 이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복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현실에서의 차이도 과거의 업보 때문이 아니라 氣를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慈悲는 惻隱과 더불어 仁의 用”이기는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평등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정도전은 유교의 仁이 “마치 물의 흐름에 있어 웅덩이를 채우고 나서 둘째, 셋째 웅덩이에 이르는” 것과 같이 대상에 따라 차이를 두는 신분사회의 질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정도전의 불교비판에 의하여 조선초 부활의 기미가 있던 崇佛論이나 儒佛折衷論은 이론적으로 극복되고 이후 권근 등에 의한 성리학의 본격적인 이해와 체계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지 않나 한다. 麗末鮮初 性理學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기능은 불교비판을 통하여 고려귀족 사회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이었으며, 이와 동시에 성리학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정착시키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금장태(1990) / 영남성리학의 전통과 쟁점, 민족문화논총 11, 영남대
윤사순(1998) / 한국의 성리학과 실학, 삼인
이원명(1992) / 고려 성리학 수용의 사상적 배경, 고려대박사학위논문
유명종(1985) / 조선후기 성리학, 이문출판사
진래 저, 안재호 역 / 송명 성리학, 예문서원
황의동(2001) / 송준길의 성리학 연구, 새한철학회 23, 새한철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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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5.27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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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8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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