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앙과 교회사적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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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개혁신앙과 교회사적 반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보호해야 하며, 한국인의 건강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교회가 보호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이러한 자각을 갖고서 사회를 이끌어 갈 때, 한국교회는 오늘날의 한국 역사적 현실에서 도외시 당하지 않을 것이며, 삼일운동을 이끌어갔던 선배교인들의 정신이 우리에게서 부활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과제를 이루기 위해서 교회는 먼저 단결하고 내적으로 새로와져야 하겠으므로, 종교개혁자들의 평등원리와 훈련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IV
중세는 사제의 중재(Mediation of Priest)를 교권확립의 수단으로 악용했으며 로마교황의 명령에 불응하는 사람, 지역에 대한 수찬정지의 발동으로 신자들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이를 수 있는 길을 봉쇄하였다. 그러나 루터의 위대한 발견은 신자는 혼자서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투신할 수 있다고 보는데 있었다. 누구든지 겸손하게 참으로 회개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아들안에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사제의 중재없이 접근할 수 있다. 어떠한 외적수단(먹고, 마시는 것)등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즉 성육신하셔서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신 아들에 관한 소식을 통해서 하나님께 직접 이를 수 있을 뿐, 사제의 중재적 역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이 만인제사장 설의 첫번째 의미이다.
그렇다면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별은 어디에 있는가? 사제, 성직자, 교직자, 영적인 사람 등의 칭호는 교권자에 의한 지배적 칭호로 악용됐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봉사자, 섬기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즉 직분의 구별, 기능의 구별만 있을 뿐이다. 직분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 그 자체는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도 영적인 면과 특권에 있어서 성직자와 동등한 위치에 있으며, 평신도도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으며, 동료 신자들 사이에서 다른 사람의 영적 진작을 위해서 기도하며 권면할 수 있다. 이것이 만인제사장 설의 두번째 의미이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구별된 특정한 의무를 수행하도록 선택됐을 뿐이며 그러한 기능을 지닌다고 해서 본래적으로 평신도보다도 더 거룩하게 구별되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성직자는 말씀선포와 성례전의 집행을 맡았다고 하지만, 다같이 성직자로 모인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대변자(Mouthpiece)로 있을 뿐이다. 이상이 루터가 말한 만인 제사장설의 의미이다.
그렇지만 만인제사장 설을 경솔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교회의 질서와 훈련이 제대로 실시되지 못함에 따라서 칼빈은 교회의 훈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훈련의 실시자로서의 직제를 말하였다. 교회는 특별직에 속하는 사도, 성직자, 전도사를 갖는데, 이상 3가지 직은 영속적인 것은 아니나, 특별한 때에 필요에 따라서, 제정했다가 불필요 시에 없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교회의 필수직으로서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직분을 열거하였다. 이중에서도 목사와 교사는 없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목사는 공적인 말씀강화와 개별적이면서도 사적인 권고를 통한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을 집행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참된 선함을 가르치고, 거룩한 비밀을 간직하고, 온전한 훈련을 지키며 행한다. 교사는 교회의 설교가 성서적 바탕위에 바르게 서 있는가 해석하며, 장차 설교자가 될 사람의 양성의 과업을 맡는다. 장로는 목사와 더불어서 규율을 시행하고 개인적인 권고로 신자를 교회안에 머물게 하고, 무법자를 방지해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한다. 집사는 구제와 가난한 자와 병든자를 돌본다.
이렇게 직분을 구별했으면서도 칼빈은 <강요>의 최종판에서 목사는 장로와 교사의 직분까지 겸하여 맡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직임을 구별했다고 하지만, 직임 사이의 차등은 있는 것은 아니고, 신자들의 어미니이시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봉사직의 구별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직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실한 소명감이 있어야 하며, 각자 받은 은혜에 따라서 다른 지체에 봉사할 때에 올바른 수행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목사는 지배자로서의 권한을 갖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도구”로서 봉사, 섬기는 직책일 뿐이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장로교회의 교회관 교직제도가 한국교회에 소개되어서 별문제 없이 유지되다가 근래에 들어서 특히 1970년대 이후로 교회의 권위, 목사의 권위, 목사와 장로간의 갈등이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감리교 신학대학의 박대인(Edward E. Poitras)교수는 “기독교인 사이에 권위가 없다” (Among Christians there can be no authority)란 글에서 한국교회의 권위의 상실은 카리스마운동의 도입과 더불어서 심각하게 됐다고 지적했는데,
참으로 정곡을 찌른 표현이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로 목회자는 카리스마적인 권위의 인물로 부각되었고 자신을 통해서 세상적인 성공, 건강, 부귀와 행복을 약속받는다고 설교하는 둥, 사람에 대한 권위 부여, 상업성, 주술성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이러한 요소를 갖추어야만, 소위 말하는 목회의 성공이 보장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카리스마 운동은 교회성장학과 손을 잡고 한국의 토속적인 주술적 요소까지 끌어 들임으로써 종교개혁자들의 섬김과 봉사의 정신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화란의 선교신학자 버카일(J. Verkuyl)은 이러한 교회성장적 선교의 목적은 미국의 상업주의, 기업 팽창주의가 교회에 파고든 것이라고 실랄하게 지적하였다.
요즈음 시행되고 있는 비 종교개혁적 전통의 권위물로는, 목사의 직을 성직이라고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자기가 설교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처럼 과장하는 태도, 목사에 대한 호칭(종님, 사자님...), 거대한 호화교회단, 내부치장물 등등을 열거할 수 있다. 루터, 쯔윙글리는 교회내에서 오르간까지 금지하면서 오로지 말씀 선포를 통한 은혜의 전달을 강조했으며, 교회당의 화려한 건축, 눈부신 치장 등은 가장 혐오하던 중세의 유산으로 거부하였다. 개혁자들은 심지어 예배와 성례전의 무절제한 집행이 오히려 권위를 상실시킨다고 해서 회수를 제한시키기까지 했음을 알아야 한다. 중세 15세기 말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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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8.31
  • 저작시기2011.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98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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