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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나온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주고 부활했으며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니 우리가 새롭게 살아야 한다.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롭다는 말 속에서 새로운 윤리가 나올 수 없고 도리어 방종주의가 나올 수 밖에 없다(반율법주의:율법의 행위를 철저히 부인하는 자들). 또 하나의 문제는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기껏해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빌립보서에만 나온다. 다른 서신들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들은 달았다. 그래서 의인론을 논함에 있어서 이런 것들은 다 해결해야 되요. 진짜 서로 다른 주제가 바울의 구원론에 신비적 카테고리와 법적 카테고리도 혼합되지 못하고 엉성하게 있느냐? 이것이 하나고 둘째 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윤리에 어떻게 연결되느냐? 세째 믿음으로 의인됨이 바울신학의 중심이냐? 아니면 곁가지이냐 별로 중요하지 않느냐? 이것을 해결하지 위해서 믿음으로 의롭하함'을 정확히 해석함으로서 가능하다. 그래서 시간이 다가서 말할 수 없고 해결의 방향만을 설명을 하면 내 책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니까 많은 책들을 참고 바랍니다'
해결방향 제시
1)믿음으로 의인됨 얻는다는 면에서
믿음이 무엇이냐? 이것은 나의 책 구원이란 무엇인가'에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이것이 복음의 사건이고 복음이다. 왜 이것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의인이 되느냐, 구원을 받느냐? 바로 열쇠가 여기에 있다. 그가 우리 대신이며 대표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의 대신인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또 우리의 대신인 그리스도 안에 내포시킨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의도미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참여하게 함 그리하여 구원을 받는다.그래서 믿음으로 의인된다는 말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다는 말이나 같은 말이다. 그래서 신비주의 카테고리와 법정적 카테고리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믿음의 사건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그리스도 안에 내포시킨다. 왜 믿음은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했음을 받아들임으로서 우리 대신 인정함을 우리를 내포시킨다. 이 믿음의 극화가 세례라 할 수 있고(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두개의 카테고리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이다. 또 하나 윤리의 문제, 두개 카테고리가 하나라면 더 이상 어느 것이 바울신학의 구원론에 있어서 어느것이 주된 카테고리냐 어느 것이 부차적인 의미 인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러면 그 문제는 다르게 제기된다. , 원어가 로마서 혹은 갈라디아서 빌3장에만 나오고 다른 서신에 전혀 나오지 않느냐의 문제가 제기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의 대답은 두가지이다.
가령 고전 1:30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또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등 고린도 전후에서도 나오고 살전 1:1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에수시니라'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를 의인으로 선언한다. 여기에는 바울의 구원론이 펼쳐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농축된 언어로 나온다. 왜 펼쳐지지 않았느냐? 바울이 이렇게 쓴 교회들이 그처럼 그 구원론이 되지 않아서 펼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나 빌립보 교회, 로마 교회에 쓸 그런 이유가 있다. 둘째 고린도전후서에서 바울은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됨의 원칙을 고린도의 지혜신학에 관하여 펼치고 있어요. 인간은 유사이래로 두가지 구원의 길을 항상 추구하고 있다. 인간의 자구책(자력구원)은 두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인간이 지혜를 쌓음으로서(문명을 발달시킴으로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구원을 얻으려고 했다. 이것이 특히 헬라 사람들에게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태도이다. 또 하나는 종교적 선행이나 수양을 쌓거나 덕행을 닦아서 스스로 의를 쌓아서 구원을 얻으려고 했다. 이 두가지가 인간 스스로가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이었다. 이것이 인간의 자력구원 자구책이었는데 은혜로만,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초월해서만 올 수 있음을 말한다. 왜 강조하느냐면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초월해서 와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내재적인 자원 동원해서 선을 쌓고 지혜를 쌓아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런 것들에 구원을 걸려고 할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의 잠나심과 헛된 것을 믿는 자기자신의 믿음을 더 사랑하는 자이다. 육신에 환상을 주는 것이 율법이다. 이것을 바울은 육신이라고 함. 육신으로 하여금 자기주장으로 하여 스스로 자구책을 구하여 지혜를 탐구하여 선행을 해서 구원을 얻을 수있을 것 같이 육신에 환상을 주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이고 율법이 지극한 해요 어떻게 율법을 지키면(선행을 쌓아서 내가)구원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꼼짝 못하고 나에게 축볼하지 않고 못베기게 만들겠다. 내가 십일조를 이렇게 많이 하고 새벽기도를 이렇게 많이 했는데 자기가 나를 구원안하고 배겨?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 위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율법행위라고(육신이라고) 했다. 율법과 육신-사탄-죽음 이것은 악의 순환이다. 그래서 완전히 나누어야 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서는 똑같은 원리를 적용해요.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것은 이렇게 적용해야 한다. 신비적인 카테고리나 원리적인 카테고리가 분리된 것이 하나이다. 그래서 믿음의 현상이라는 것으로 다 해결이 된다. 이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데서는 안나오느냐? 다른 서신에서도 나오는데 그것이 펼쳐지지 않는 이유는 ...
그러나 고린도에서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어요. 그것은 지혜와 문제 똑같은 원리를 적용해요. 그러면 문제가 하나 더 남았는데 윤리는 어떻게 되느냐? 이것은 좀전에 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의'를 관계론적으로 풀면 쉽게 해결되요. 의인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감,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에 들어감이다.
해결방향 제시
1)믿음으로 의인됨 얻는다는 면에서
믿음이 무엇이냐? 이것은 나의 책 구원이란 무엇인가'에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이것이 복음의 사건이고 복음이다. 왜 이것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의인이 되느냐, 구원을 받느냐? 바로 열쇠가 여기에 있다. 그가 우리 대신이며 대표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의 대신인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또 우리의 대신인 그리스도 안에 내포시킨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의도미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참여하게 함 그리하여 구원을 받는다.그래서 믿음으로 의인된다는 말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다는 말이나 같은 말이다. 그래서 신비주의 카테고리와 법정적 카테고리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믿음의 사건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그리스도 안에 내포시킨다. 왜 믿음은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했음을 받아들임으로서 우리 대신 인정함을 우리를 내포시킨다. 이 믿음의 극화가 세례라 할 수 있고(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두개의 카테고리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이다. 또 하나 윤리의 문제, 두개 카테고리가 하나라면 더 이상 어느 것이 바울신학의 구원론에 있어서 어느것이 주된 카테고리냐 어느 것이 부차적인 의미 인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러면 그 문제는 다르게 제기된다. , 원어가 로마서 혹은 갈라디아서 빌3장에만 나오고 다른 서신에 전혀 나오지 않느냐의 문제가 제기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의 대답은 두가지이다.
가령 고전 1:30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또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등 고린도 전후에서도 나오고 살전 1:1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에수시니라'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를 의인으로 선언한다. 여기에는 바울의 구원론이 펼쳐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농축된 언어로 나온다. 왜 펼쳐지지 않았느냐? 바울이 이렇게 쓴 교회들이 그처럼 그 구원론이 되지 않아서 펼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나 빌립보 교회, 로마 교회에 쓸 그런 이유가 있다. 둘째 고린도전후서에서 바울은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됨의 원칙을 고린도의 지혜신학에 관하여 펼치고 있어요. 인간은 유사이래로 두가지 구원의 길을 항상 추구하고 있다. 인간의 자구책(자력구원)은 두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인간이 지혜를 쌓음으로서(문명을 발달시킴으로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구원을 얻으려고 했다. 이것이 특히 헬라 사람들에게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태도이다. 또 하나는 종교적 선행이나 수양을 쌓거나 덕행을 닦아서 스스로 의를 쌓아서 구원을 얻으려고 했다. 이 두가지가 인간 스스로가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이었다. 이것이 인간의 자력구원 자구책이었는데 은혜로만,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초월해서만 올 수 있음을 말한다. 왜 강조하느냐면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초월해서 와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내재적인 자원 동원해서 선을 쌓고 지혜를 쌓아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런 것들에 구원을 걸려고 할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의 잠나심과 헛된 것을 믿는 자기자신의 믿음을 더 사랑하는 자이다. 육신에 환상을 주는 것이 율법이다. 이것을 바울은 육신이라고 함. 육신으로 하여금 자기주장으로 하여 스스로 자구책을 구하여 지혜를 탐구하여 선행을 해서 구원을 얻을 수있을 것 같이 육신에 환상을 주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이고 율법이 지극한 해요 어떻게 율법을 지키면(선행을 쌓아서 내가)구원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꼼짝 못하고 나에게 축볼하지 않고 못베기게 만들겠다. 내가 십일조를 이렇게 많이 하고 새벽기도를 이렇게 많이 했는데 자기가 나를 구원안하고 배겨?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 위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율법행위라고(육신이라고) 했다. 율법과 육신-사탄-죽음 이것은 악의 순환이다. 그래서 완전히 나누어야 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서는 똑같은 원리를 적용해요.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것은 이렇게 적용해야 한다. 신비적인 카테고리나 원리적인 카테고리가 분리된 것이 하나이다. 그래서 믿음의 현상이라는 것으로 다 해결이 된다. 이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데서는 안나오느냐? 다른 서신에서도 나오는데 그것이 펼쳐지지 않는 이유는 ...
그러나 고린도에서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어요. 그것은 지혜와 문제 똑같은 원리를 적용해요. 그러면 문제가 하나 더 남았는데 윤리는 어떻게 되느냐? 이것은 좀전에 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의'를 관계론적으로 풀면 쉽게 해결되요. 의인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감,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에 들어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