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칸트 [Kant, Immanuel]
개요
초기생애
칸트 철학에 있어서의 도덕종교와 기독교와의 비교
(1) 도덕종교와 기독교
(2) 구원(救援)
(3) 교회
(4) 예배와 거짓 예배
3. 결 론
개요
초기생애
칸트 철학에 있어서의 도덕종교와 기독교와의 비교
(1) 도덕종교와 기독교
(2) 구원(救援)
(3) 교회
(4) 예배와 거짓 예배
3. 결 론
본문내용
나 세례를 통하여 어떤 초자연적인 은총을 중개받으리라 기대하는 것 역시 거짓예배의 일종이다. 그것은 기도가 "도덕적 선을 우리 자신 안에 확고하게 근거짓고, 그의 선한 심성을 거듭해서 마음 속에 일깨우는 일"로서 도덕적 선을 촉진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입 회원을 신앙 공동체 안에 받아 들이고, 의무적으로 그들을 교육함으로써 후세에게 도덕적 선을 전파하기" 위한 어떤 것이다.
성찬식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4-55>라고 말했지만, 칸트에 의하면 성찬식이란 "교회의 성원들을 윤리적 단체에로 결합시키고 상호간의 권리와 도덕적 선의 결과를 평등하게 분배한다는 원리에 따라서 이 단체를 지속시키는 반복적인 공공적 의식에 의해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단순한 교회적 행위와 초자연적 은총을 결합시키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도덕적 향상으로 인해 올 수 있는 풍성한 축복의 결과를 박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예배는 실로 도덕적 양심과 도덕적 생활태도로써만 존재하는 것이다. 칸트가 주장하는 바는 '도덕률을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받아 들이라. 그때 너는 진정한 종교를 갖는 것이 되고, 네 삶은 진정한 예배가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3. 결 론
칸트의 종교해석은 강직하고 엄격하고, 위대하며 또한 준엄한 시대에 알맞은 것이다. 거기에는 모호한 감정과 무위(無爲)로 끝나 버리는 정관적(靜觀的)인 예배가 존재할 여지가 없다. 우리 자신의 삶을 통한 부단한 도덕적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
그의 사상에는 귀를 기울일만한 대목이 있긴 하다. 가령 종교란 필연적으로 우리의 이성에서 생겨나야 한다는 주장도 그렇지만, 그가 강조해마지 않는 도덕률과 의무라는 개념 역시 매우 장중하게 우리의 귓전을 때린다. 일단 우리는 우리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그러한 외침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어떤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도덕률을 하나님의 음성으로서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독교에 숨어있는 심원한 도덕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창조적인 일에 부름받은 위인들이 모두 도덕적인, 말하자면 기독교의 창조적인 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다. 이천 여년 동안 인류의 의식 속에 침투하여 형성된 사상은 창조의 깊은 심연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임을 그들은 모두 감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칸트는 기독교 이외 여타의 종교를 恩寵종교, 단순한 祭祀종교라 부른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교들이 주장하는 바는 '인간이 보다 좋은 도덕적 품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순한 제사행위에 의하여 보다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생래적인 재능을 정당하게, 그리고 충분히 사용하기를 요구한다. 그것은 좋은 품행을 요구하는 종교이며, 따라서 이전부터 있었던 종교들 가운데 가장, 아니 거의 유일하게 도덕적이다.
칸트에 의하면 기독교의 예배는 도덕적 양심이며, 도덕적 생활태도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뜻에서 기독교는 독일국민의 종교여야 하며, 또한 언제까지나 그래야만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도덕적 양심 및 생활태도에 의해 완전히 초감성적인 도덕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원할 수 있다'고 하는 칸트의 복음을 듣는다.
칸트는 실천의 측면을 통하여 새로이 종교를 확립시켰다. 실천이성은 자유와 영혼불멸과 신이라고 하는 세가지 관념을 신앙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그리하여 칸트에서는 종교가 도덕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종교는 도덕에서 생겨난다. 도덕은 우리에게 도덕률을 부여하는데, 종교는 이 도덕률이 신에 의해 우리의 이성 가운데 놓인 것으로 해석한다. 이 종교의 해석에 의하여 우리의 내부에 있는 도덕률은 강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전지전능한 하나님마저 순수이성에 의해 도출하고자 시도하였으며 그것이 여의치 않자 이번에는 다시 실천이성을 통하여 도출하고자 하였다. 칸트에 있어서 신이란 '도출'된 것이고, '요청'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성의 논리법칙에 의하여 이끌려져 나온 어떤 것이다.
이것이 과연 절대자로서의 신의 개념에 합치하는 것인가도 의문이지만 기독교적 의미의 신과는 다른 어떤 것이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칸트는 그가 육과 살을 가진 하나의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예배와 기도, 성찬식 등에서의 이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칸트는 신의 계명에 의하여 구성되어야 하는(기독교적 의미에서는) 도덕을 오히려 절대화하여 이 도덕을 위해 신을 이용하고 종교를 활용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며, 이것이 바로 '종교에 관한 한, 더 이상 글을 발표하거나 강연할 수 없도록' 경고를 받은 한 이유였을 것이다.
칸트가 받아들인 종교란 그가 살던 시대, 즉 인간의 건전한 이성에 대해 거의 맹목적인 신뢰를 보냈던 계몽주의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땅히 독립성을 보장해주어야 할 종교 분야에서까지 이성의 잣대로서 측정하려는 우를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과제란 오직 도덕을 촉진시키는 데에만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일정 부분 종교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모든 종교 가운데 기독교만이 도덕적 완성을 이룩한 유일한 종교라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의 의의도 인정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도덕의 아노미 현상은 아주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있다. 기성세대에 대한 도덕적 교화가 불가능하다면 미래의 꿈나무들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고답적인 도덕교육에 의해서는 그 성과가 미진한 것이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와 학부모, 교사들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초등학생들의 도덕의식이 강화되지 못한 현실에서 보다 강력한 제재가 필요한 바, 초등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에서 도덕성에 바탕한 종교 교육을 강화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유효하고도 시급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성찬식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4-55>라고 말했지만, 칸트에 의하면 성찬식이란 "교회의 성원들을 윤리적 단체에로 결합시키고 상호간의 권리와 도덕적 선의 결과를 평등하게 분배한다는 원리에 따라서 이 단체를 지속시키는 반복적인 공공적 의식에 의해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단순한 교회적 행위와 초자연적 은총을 결합시키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도덕적 향상으로 인해 올 수 있는 풍성한 축복의 결과를 박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예배는 실로 도덕적 양심과 도덕적 생활태도로써만 존재하는 것이다. 칸트가 주장하는 바는 '도덕률을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받아 들이라. 그때 너는 진정한 종교를 갖는 것이 되고, 네 삶은 진정한 예배가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3. 결 론
칸트의 종교해석은 강직하고 엄격하고, 위대하며 또한 준엄한 시대에 알맞은 것이다. 거기에는 모호한 감정과 무위(無爲)로 끝나 버리는 정관적(靜觀的)인 예배가 존재할 여지가 없다. 우리 자신의 삶을 통한 부단한 도덕적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
그의 사상에는 귀를 기울일만한 대목이 있긴 하다. 가령 종교란 필연적으로 우리의 이성에서 생겨나야 한다는 주장도 그렇지만, 그가 강조해마지 않는 도덕률과 의무라는 개념 역시 매우 장중하게 우리의 귓전을 때린다. 일단 우리는 우리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그러한 외침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어떤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도덕률을 하나님의 음성으로서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독교에 숨어있는 심원한 도덕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창조적인 일에 부름받은 위인들이 모두 도덕적인, 말하자면 기독교의 창조적인 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다. 이천 여년 동안 인류의 의식 속에 침투하여 형성된 사상은 창조의 깊은 심연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임을 그들은 모두 감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칸트는 기독교 이외 여타의 종교를 恩寵종교, 단순한 祭祀종교라 부른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교들이 주장하는 바는 '인간이 보다 좋은 도덕적 품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순한 제사행위에 의하여 보다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생래적인 재능을 정당하게, 그리고 충분히 사용하기를 요구한다. 그것은 좋은 품행을 요구하는 종교이며, 따라서 이전부터 있었던 종교들 가운데 가장, 아니 거의 유일하게 도덕적이다.
칸트에 의하면 기독교의 예배는 도덕적 양심이며, 도덕적 생활태도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뜻에서 기독교는 독일국민의 종교여야 하며, 또한 언제까지나 그래야만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도덕적 양심 및 생활태도에 의해 완전히 초감성적인 도덕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원할 수 있다'고 하는 칸트의 복음을 듣는다.
칸트는 실천의 측면을 통하여 새로이 종교를 확립시켰다. 실천이성은 자유와 영혼불멸과 신이라고 하는 세가지 관념을 신앙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그리하여 칸트에서는 종교가 도덕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종교는 도덕에서 생겨난다. 도덕은 우리에게 도덕률을 부여하는데, 종교는 이 도덕률이 신에 의해 우리의 이성 가운데 놓인 것으로 해석한다. 이 종교의 해석에 의하여 우리의 내부에 있는 도덕률은 강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전지전능한 하나님마저 순수이성에 의해 도출하고자 시도하였으며 그것이 여의치 않자 이번에는 다시 실천이성을 통하여 도출하고자 하였다. 칸트에 있어서 신이란 '도출'된 것이고, '요청'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성의 논리법칙에 의하여 이끌려져 나온 어떤 것이다.
이것이 과연 절대자로서의 신의 개념에 합치하는 것인가도 의문이지만 기독교적 의미의 신과는 다른 어떤 것이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칸트는 그가 육과 살을 가진 하나의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예배와 기도, 성찬식 등에서의 이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칸트는 신의 계명에 의하여 구성되어야 하는(기독교적 의미에서는) 도덕을 오히려 절대화하여 이 도덕을 위해 신을 이용하고 종교를 활용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며, 이것이 바로 '종교에 관한 한, 더 이상 글을 발표하거나 강연할 수 없도록' 경고를 받은 한 이유였을 것이다.
칸트가 받아들인 종교란 그가 살던 시대, 즉 인간의 건전한 이성에 대해 거의 맹목적인 신뢰를 보냈던 계몽주의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땅히 독립성을 보장해주어야 할 종교 분야에서까지 이성의 잣대로서 측정하려는 우를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과제란 오직 도덕을 촉진시키는 데에만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일정 부분 종교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모든 종교 가운데 기독교만이 도덕적 완성을 이룩한 유일한 종교라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의 의의도 인정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도덕의 아노미 현상은 아주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있다. 기성세대에 대한 도덕적 교화가 불가능하다면 미래의 꿈나무들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고답적인 도덕교육에 의해서는 그 성과가 미진한 것이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와 학부모, 교사들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초등학생들의 도덕의식이 강화되지 못한 현실에서 보다 강력한 제재가 필요한 바, 초등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에서 도덕성에 바탕한 종교 교육을 강화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유효하고도 시급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