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선종사찰 석남사 (新羅 禪宗寺刹 石南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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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序論
2)新羅의 禪宗由來
①禪宗由來
②禪宗과 茶
③道義國師의 生涯
3)敎宗과 禪宗의 對立
①敎宗이란?
②禪宗이란?
③敎宗과 禪宗의 對立
4)新羅王京近處 禪宗寺刹 存在理由
5)禪宗寺刹 石南寺 모습
6)結論
(禪宗의 諸 問題)

본문내용

의 본존불을 모신 사당의 중심이 되는 전각(殿閣)으로 내부를 금색으로 칠하여 장식하고 금색의 불상이 안에 안치되어 있는 것이란 의미인데, 선방에서는 모든 이들이 부처라 하여 수행하는 공간인 선방을 금당이라 부른다.
⑦종각(鐘閣)
침계루의 서쪽에 위치하며 2층 건물로 예불이나 법회 등의 의식을 할 때 소리를 내는 사물(四物 :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비치하고 있다.
⑧강선당(講禪堂)
이 당은 다포계 형태의 팔작지붕이며 정면8칸, 측면 4칸이고 학인스님들이 공부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현판(懸板)은 설법과 선이 이루어지는 큰 방이다 라는 뜻이다.
⑨호중당(護衆堂)
대중을 외호하는 당이다. 호중당은 주지 소임자가 거처하는 곳이다. 사중의 제반업무를 관장하여 승가청규를 여법히 세워 나가는 책임은 바로 승풍을 수립 유지하는 중차대한 일이다. 영운 주지가 소임을 맡아 당우를 정비하는 불사를 시행하면서 조사전을 이전하고 호중당을 새로 신축하였다. 임오년 중추의 일로 가지산에 단풍이 물들던 때였다. 가람을 수호하면서 도량을 가꾸는 일 또한 큰 원력이 따른다. 중진노덕의 격려 속에 운신의 힘을 쏟아 사중을 보살펴 온 공로가 호중당이 신건되어 다시 하나 보태어졌다. 이르노니 대중을 외호함은 부처님 법을 보호함이니 이 인연공덕으로 불법이 만대에 길이길이 유전 되어 지이다. 임오년 9월 8일 巳時에 상량하다.불기 2546년 9월 7일 通度沙門 樂山 志安 謹作 書
⑩심검당(尋劍堂)
1963년 당시 주지스님이셨던 인홍(仁弘)스님이 신축하여 석남사 건물 중 제일 높은 위치에 있으며 건평 36평으로 10여명이 정진할 수 있는 선원입니다. 지금은 불필스님께서 결제 때가 되면 오셔서 정진하십니다. 현판(懸板) 심검당의 ‘심검(尋劒)‘이라는 말은‘지혜의 샘을 찾는다'라는 뜻으로‘검선일여(劒禪一如)'라는 말과 같이 참선을 칼에 비유한 데서 연유한다. 곧 참선도량을 뜻한다.
⑪서래각(西來閣)
사찰의 신도관리와 필요한 서무를 처리하는 종무소로 이용되며 북쪽의 벽에는 "목탁에 얽힌 전설"과 "초발심하는 중생의 마음"을 표현한 그림이 서쪽 벽에는 스님과 산,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물 등을 통하여 "깨달음 후에 세상을 관조하는 모습"이 색화로 그려져 있다.
⑫정수원(正受院)
1975년 신축하였으면 운수납자들의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중 30여명이 함께 좌선할 수 있는 건평 60평의 공간이다.
현판(懸板) 정수란 바르게 받아들임, 삼매를 의미한다.
⑬백인당(百忍堂)
2002년 청화당과 함께 개수하였다. 석남사 요사 중 일당우의 명칭으로 이름 그대로 인욕 하심의 교훈을 보여주는 집이다. 사세 확장으로 백인당을 34평으로 개수하게 되었다. 영운주지가 사중 중진과 의논 대중외호의 정신으로 청화당과 함께 시작한 불사이다. 이 공덕이 불은에 보답하고 삼보를 수호하여 불법이 후세 만대에 유통되는 인연이 될 것이다. 임오년 5월 6일 미시에 상량하다.
불기 2546년 5월 5일 通度 沙門 樂山 志安 謹作 書
청화당(淸和堂)
원래 청화당은 요사로 서기 1912년에 우운사가 창건한 43평의 건물로 사중 중진스님들이 거처하는 판도방이 들어 있었으나 협소 불편하여 그 규모를 77평으로 확대해 짓게 되었다. 상량기(上樑記) 가지산 석남사는 근래 비구니 수행 도량으로 그 수행가풍의 사격이 더욱 높아져 많은 대중이 모여 정진하는 가람이다. 인홍 스님이 입적하기 전부터 제방 수선납자가 많이 모였고 불문에 의탁하려는 초심행자 또한 끊어지지 않았다. 사세가 번창함에 따라 가람수호의 사격도 더욱 많아지게 된다. 인홍노사(仁弘老師)가 생전부터 년차적으로 가람증축 불사를 계획 도량의 면모를 일신시켜 오다가 영운니사(靈雲尼師)가 주지 소임을 맡아 재임 중 청화당을 해체 복원하게 되었다. 육화동수로 정진하여 조사현풍을 일으킬 때 청화당은 더욱 빛날 것이다. 임오년 5월 6일 미시에 상량하는 이 당우에서 만세에 불법을 유전하는 큰 공덕이 성취 되리라. 불기 2546년 5월 6일 通度沙門 樂山 志安 謹作 書
선열당(禪悅堂)
요사(療舍)채의 하나로 인홍선사가 열반하실 때까지 생활하시던 공간이다.
6)結論
(禪宗의 諸 問題)
新羅末에 傳來된 禪思想의 重要性을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다.
禪宗對立의 歷史는 韓國佛敎史를 이해하는 중요한 과제이다. 그만큼 新羅末 불교계에 대한 이해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新羅社會의 불교계 상황이 敎宗中心 에서 禪宗의 對立된 관점으로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첫째 기존의 敎學에서 정면으로 도전하고 배척하는 以心傳心. 敎外別傳의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회적으로 開倉한 新羅禪僧들은 眞骨系統의 몰락자이거나 육두품이하의 출신자로 당시 왕실의 기반으로 하고 있는 敎宗 교단에 대해서 저항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기존의 敎學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배척하는 입장이었다. 김언향이 헌강왕10년(884)에 찬한 碑文에 보면 道義는821년에 귀국하여 禪理를 설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오직 經敎와 習慣에 의하여 법만 崇尙하여 虛誕이라 하여 믿지 않았다. 그래서 道義는 山林에 隱居하여 마치 달마의 법을 양무제가 이해하지 못함과 같았다. 또 최치원이 892년에 碑銘에 道義는 서당지장의 心印을 전해 받고 귀국하여 禪風을 펴려했지만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당시 敎宗의 불교계로부터 魔語라는 비난에 끝내 설악산에 몸을 숨겼다. 道義가 入國한 9세기 중엽에 禪法은 新羅人들 에게는 매우 새로운 思想이었고, 만약 道義가 당시 新羅人의 설득에 성공했다면 隱居하지도, 魔語라고 배척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新羅末 禪思想의 정체성을 이제는 기존의 敎學을 정면으로 배척하고 부정하는 不立文字, 敎外別傳인 의미에서 찾을 수 없고 禪僧들이 中央勸力에 대해서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였지만 전면적으로는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禪敎一致의 禪思想으로 兩者를 同等하게 評價하고 經典의 가치를 충분하게 음미한 다음에 그것을 떠날 수 있음을 의미하는 舍敎入禪으로 禪宗이 가지는 新羅末의 社會的인 충격을 잘 전달한다고 본다.
참고문헌
① 석남사 홈페이지
② 동국대학교 남종선 연구 토론논문 : 차차석
③ 동국대학교 화엄종 연구 토론논문 : 인경스님

키워드

신라,   선종,   석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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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10.04
  • 저작시기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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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05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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