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머리말
II. 신라말 교종의 변천
1. 화엄종의 전개
2. 법상종의 전개
III. 선종의 등장과 그 영향
1. 북종선의 전개와 남종선의 도입
2. 선종산문의 성립
3. 선종의 사회적 성격
IV. 교종과 선종의 교류
1. 화엄종과 선종의 교류
2. 법상종과 선종의 교류
V. 맺는말
II. 신라말 교종의 변천
1. 화엄종의 전개
2. 법상종의 전개
III. 선종의 등장과 그 영향
1. 북종선의 전개와 남종선의 도입
2. 선종산문의 성립
3. 선종의 사회적 성격
IV. 교종과 선종의 교류
1. 화엄종과 선종의 교류
2. 법상종과 선종의 교류
V. 맺는말
본문내용
의 교류를 추측할 수 있다.
戒에는 大乘戒統인 梵網戒와 唯識系統인 瑜伽戒가 있으므로 계에 대한 기록을 모두 瑜伽戒로 간주하여 法相宗과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이기는 하나 慈藏이 道宣과 깊은 인연을 맺고
) 安啓賢, 《韓國佛敎史硏究》, 同和出版公社, 1982, pp.90∼91.
小乘의 四分律을 주체로 하여 범망경을 참작하여 대승적으로 해석한 南山律宗
) 蔡印幻, 《新羅佛敎戒律思想硏究》, 國書刊行會, 1977, p.603.
의 梵網戒를 도입한 후 유식학 연구가 활발해짐에 따라 유식학의 유가계도 유행하였고 또한 眞表에 의해 점찰계가 개창되어 일반 대중에게까지도 계가 널리 유행됨으로써 신라사회에서는 계가 중요시 되게 되었다. 따라서 계는 교종 중 법상종과 가장 관련이 깊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興法寺眞空大師塔碑〉에 龍記元年 受具戒於武州靈神寺 旣而習相部 精究毘□□□
) 〈興法寺眞空大師塔碑〉, 《金石總攬》 上, p.146.
라 한 것에서 忠湛이 眞聖女王 3年(889) 상부를 法相宗에서 수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자료들을 통하여 法相宗도 역시 華嚴宗과 마찬가지로 禪宗과 상호간 교류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法相宗의 戒學이 그 바탕이 되어 상호간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런 현상은 나말여초 法相宗의 성격에도 변화를 주었을 것이다.
禪宗이 法相宗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런 과정에서 羅襪麗初의 法相宗은 어떻게 대응하고 변화하였는가에 대하여 法相宗 관계의 자료가 거의 없으므로 한계는 있겠으나 선사들의 비문들을 불교 교리에 대한 지식을 축적한 후 자세히 검토한다면 그들의 선사상과 아울러 규명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상으로 나말여초 法相宗과 禪宗과의 교류를 검토한 결과 상호간의 교류를 통해 보완적인 기능을 한 면들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선종은 頓悟의 방편으로써 법삽종으로 부터 戒律을 통한 수행을 차용하여 그것을 방편으로 삼아 대중을 선종으로 포섭하는데 이용하였다.
Ⅴ. 맺는말
신라 중대는 華嚴宗과 法相宗이 주류가 되어 佛敎學 연구 및 宗派로서의 발전이 계속된 시기이다.
義湘에 의해 開宗된 華嚴宗은 그의 十大弟子들에 의해 '華嚴十刹'을 중심으로 문도가 번성하였는데 '華嚴十刹'은 의상 당대에 모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淨石寺 이외에는 9세기 초까지 약 150年동안 종세가 발전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禪宗의 전래 후 華嚴宗은 위축되었으나 '화엄사찰'을 중심으로 南北岳으로 분열되어 後三國의 왕들과 모두 관련을 맺으면서 宗勢를 유지하였다. 北岳派인 海印寺의 福田 希朗은 王建과 깊은 관련을 맺고 왕건의 三國統一을 도왔으며 그 결과 해인사가 중수되고 국가의 중요한 문서가 봉안될 정도였다. 法相宗은 중대 말 학파불교의 성격을 지닌 太賢系 法相宗과 실천위주인 眞表系 法相宗이 성립되어 발전하였다. 太賢系 法相宗은 지지세력인 경주 중심의 왕실귀족이 약화되자 占察戒을 사용하여 대중에 넓은 기반을 가지고 발전하고 있었던 眞表系와 통합되었으며 眞表의 제자인 釋忠이 왕건에게 簡子를 전하는 사실에서 高麗 초까지 法相宗의 맥락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高麗 초 禪宗과 華嚴宗·法相宗이 나란히 성행하였다는 기록이 〈僊鳳寺大覺國師 陰記〉에 전해온다. 이와 같이 禪宗 전래 이후도 기존의 華嚴宗이나 法相宗이나 法相宗이 불교계의 중심적인 종파로 교단의 세력을 유지하면서 변화하고 있었다.
禪宗은 興德王代인 830년대에 洪陟에 의해 實相山門이 개창되는 것을 시작으로 활발히 전래되어 930年대 利嚴에 須彌山門이 개창될 때까지 100年동안 九山門이 성립하면서 급속히 발전하였다.
9산문의 개조는 모두 敎宗으로 입도하여 화엄학을 先修한 인물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선사상은 화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九祖師 중 유일하게 입당하지 않은 道憲은 유명한 華嚴學僧인 淨石寺 梵體大德에게 화엄을 배우고 그것을 기반으로 法朗에 의해 도입되어 명맥이 끊이지 않고 내려오던 北宗禪을 받아들여 禪宗으로 전향했으며, 나머지 八祖들도 입당하여 華嚴宗의 性起設과 깊은 관련이 있는 洪州宗을 받아들였다. 따 라서 나말의 禪宗은 화엄학의 입장에서 받아들인 선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화엄학의 입장에서 선을 받아들였음으로 禪宗은 敎宗과 상쟁하여 그 기반을 잠식하려 하지 않고 공존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선종사찰에서 법상종의 主佛인 毘盧舍那佛을 봉안하고 신앙한 것은 화엄종과의 교류에서 비롯된 신라 선종의 특성이라 하겠다.
華嚴宗은 禪宗에 자극되어 선과 관계가 깊은 澄觀系 화엄학이 연구되기 시작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선종에 대항하여 본래의 義湘·法藏系의 화엄학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선사들에 의해 大藏經이 수입된 사실은 華嚴宗과 禪宗의 교류를 나타내주고 있다.
法相宗 역시 禪宗과 교류하고 있었는데 주로 戒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계는 수행의 방법으로 法相宗에서 중시되었는데 眞表의 영향으로 신라 사회에서는 戒行이 두루 퍼져 있었다. 禪宗도 계를 중시여기는 신라 불교의 특성을 수용하여 대중의 마음을 禪宗으로 이끄는 방편으로 삼았다. 이처럼 나말고초의 敎宗과 禪宗은 상호보완적인 기능을 하면서 각기 발전하였다고 하겠다.
參 考 文 獻
《三國遺事》
《三國史記》
《宋高僧傳》
《祖堂集》
《朝鮮金石總覽》,上卷
《韓國佛敎全書》, 新羅時代扁2·3, 高麗時代扁4·6
高義晋, <新羅下代의 禪傳來>, 《韓國禪思想硏究》, 東國大佛敎文化硏究所, 1984.
金南允 .<新羅中代 法相宗의 成立과 信仰>, 《韓國史論》11, 1984.
崔柄憲, <新羅下代 禪宗九山派의 成立>, 《韓國史硏究》 7, 1972.
<羅末麗初 禪宗의 社會的性格>, 《史學硏究》 25, 1975.
金相憲, <新羅 華嚴思想史 硏究>, 民族社, 1991
李基白, <新羅 思想史 硏究>, 一潮閣, 1986.
<新羅 淨土信仰의 起源>, 《學術院論文集》19, 1980.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3, 探究堂, 1978.
安智源: "羅末麗初 敎學과 禪學의 交流" , 「社會敎育科 歷史專攻」, 서울大學校 大學院, 1987.
상두흥: "신라사회 변동과 불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연구", 연세대학교, 1988
李基東: "新羅社會와 佛敎" ,「佛敎의 諸科學」, 동국대출판부, 1987.
戒에는 大乘戒統인 梵網戒와 唯識系統인 瑜伽戒가 있으므로 계에 대한 기록을 모두 瑜伽戒로 간주하여 法相宗과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이기는 하나 慈藏이 道宣과 깊은 인연을 맺고
) 安啓賢, 《韓國佛敎史硏究》, 同和出版公社, 1982, pp.90∼91.
小乘의 四分律을 주체로 하여 범망경을 참작하여 대승적으로 해석한 南山律宗
) 蔡印幻, 《新羅佛敎戒律思想硏究》, 國書刊行會, 1977, p.603.
의 梵網戒를 도입한 후 유식학 연구가 활발해짐에 따라 유식학의 유가계도 유행하였고 또한 眞表에 의해 점찰계가 개창되어 일반 대중에게까지도 계가 널리 유행됨으로써 신라사회에서는 계가 중요시 되게 되었다. 따라서 계는 교종 중 법상종과 가장 관련이 깊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興法寺眞空大師塔碑〉에 龍記元年 受具戒於武州靈神寺 旣而習相部 精究毘□□□
) 〈興法寺眞空大師塔碑〉, 《金石總攬》 上, p.146.
라 한 것에서 忠湛이 眞聖女王 3年(889) 상부를 法相宗에서 수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자료들을 통하여 法相宗도 역시 華嚴宗과 마찬가지로 禪宗과 상호간 교류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法相宗의 戒學이 그 바탕이 되어 상호간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런 현상은 나말여초 法相宗의 성격에도 변화를 주었을 것이다.
禪宗이 法相宗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런 과정에서 羅襪麗初의 法相宗은 어떻게 대응하고 변화하였는가에 대하여 法相宗 관계의 자료가 거의 없으므로 한계는 있겠으나 선사들의 비문들을 불교 교리에 대한 지식을 축적한 후 자세히 검토한다면 그들의 선사상과 아울러 규명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상으로 나말여초 法相宗과 禪宗과의 교류를 검토한 결과 상호간의 교류를 통해 보완적인 기능을 한 면들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선종은 頓悟의 방편으로써 법삽종으로 부터 戒律을 통한 수행을 차용하여 그것을 방편으로 삼아 대중을 선종으로 포섭하는데 이용하였다.
Ⅴ. 맺는말
신라 중대는 華嚴宗과 法相宗이 주류가 되어 佛敎學 연구 및 宗派로서의 발전이 계속된 시기이다.
義湘에 의해 開宗된 華嚴宗은 그의 十大弟子들에 의해 '華嚴十刹'을 중심으로 문도가 번성하였는데 '華嚴十刹'은 의상 당대에 모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淨石寺 이외에는 9세기 초까지 약 150年동안 종세가 발전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禪宗의 전래 후 華嚴宗은 위축되었으나 '화엄사찰'을 중심으로 南北岳으로 분열되어 後三國의 왕들과 모두 관련을 맺으면서 宗勢를 유지하였다. 北岳派인 海印寺의 福田 希朗은 王建과 깊은 관련을 맺고 왕건의 三國統一을 도왔으며 그 결과 해인사가 중수되고 국가의 중요한 문서가 봉안될 정도였다. 法相宗은 중대 말 학파불교의 성격을 지닌 太賢系 法相宗과 실천위주인 眞表系 法相宗이 성립되어 발전하였다. 太賢系 法相宗은 지지세력인 경주 중심의 왕실귀족이 약화되자 占察戒을 사용하여 대중에 넓은 기반을 가지고 발전하고 있었던 眞表系와 통합되었으며 眞表의 제자인 釋忠이 왕건에게 簡子를 전하는 사실에서 高麗 초까지 法相宗의 맥락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高麗 초 禪宗과 華嚴宗·法相宗이 나란히 성행하였다는 기록이 〈僊鳳寺大覺國師 陰記〉에 전해온다. 이와 같이 禪宗 전래 이후도 기존의 華嚴宗이나 法相宗이나 法相宗이 불교계의 중심적인 종파로 교단의 세력을 유지하면서 변화하고 있었다.
禪宗은 興德王代인 830년대에 洪陟에 의해 實相山門이 개창되는 것을 시작으로 활발히 전래되어 930年대 利嚴에 須彌山門이 개창될 때까지 100年동안 九山門이 성립하면서 급속히 발전하였다.
9산문의 개조는 모두 敎宗으로 입도하여 화엄학을 先修한 인물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선사상은 화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九祖師 중 유일하게 입당하지 않은 道憲은 유명한 華嚴學僧인 淨石寺 梵體大德에게 화엄을 배우고 그것을 기반으로 法朗에 의해 도입되어 명맥이 끊이지 않고 내려오던 北宗禪을 받아들여 禪宗으로 전향했으며, 나머지 八祖들도 입당하여 華嚴宗의 性起設과 깊은 관련이 있는 洪州宗을 받아들였다. 따 라서 나말의 禪宗은 화엄학의 입장에서 받아들인 선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화엄학의 입장에서 선을 받아들였음으로 禪宗은 敎宗과 상쟁하여 그 기반을 잠식하려 하지 않고 공존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선종사찰에서 법상종의 主佛인 毘盧舍那佛을 봉안하고 신앙한 것은 화엄종과의 교류에서 비롯된 신라 선종의 특성이라 하겠다.
華嚴宗은 禪宗에 자극되어 선과 관계가 깊은 澄觀系 화엄학이 연구되기 시작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선종에 대항하여 본래의 義湘·法藏系의 화엄학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선사들에 의해 大藏經이 수입된 사실은 華嚴宗과 禪宗의 교류를 나타내주고 있다.
法相宗 역시 禪宗과 교류하고 있었는데 주로 戒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계는 수행의 방법으로 法相宗에서 중시되었는데 眞表의 영향으로 신라 사회에서는 戒行이 두루 퍼져 있었다. 禪宗도 계를 중시여기는 신라 불교의 특성을 수용하여 대중의 마음을 禪宗으로 이끄는 방편으로 삼았다. 이처럼 나말고초의 敎宗과 禪宗은 상호보완적인 기능을 하면서 각기 발전하였다고 하겠다.
參 考 文 獻
《三國遺事》
《三國史記》
《宋高僧傳》
《祖堂集》
《朝鮮金石總覽》,上卷
《韓國佛敎全書》, 新羅時代扁2·3, 高麗時代扁4·6
高義晋, <新羅下代의 禪傳來>, 《韓國禪思想硏究》, 東國大佛敎文化硏究所, 1984.
金南允 .<新羅中代 法相宗의 成立과 信仰>, 《韓國史論》11, 1984.
崔柄憲, <新羅下代 禪宗九山派의 成立>, 《韓國史硏究》 7, 1972.
<羅末麗初 禪宗의 社會的性格>, 《史學硏究》 25, 1975.
金相憲, <新羅 華嚴思想史 硏究>, 民族社, 1991
李基白, <新羅 思想史 硏究>, 一潮閣, 1986.
<新羅 淨土信仰의 起源>, 《學術院論文集》19, 1980.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3, 探究堂, 1978.
安智源: "羅末麗初 敎學과 禪學의 交流" , 「社會敎育科 歷史專攻」, 서울大學校 大學院, 1987.
상두흥: "신라사회 변동과 불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연구", 연세대학교, 1988
李基東: "新羅社會와 佛敎" ,「佛敎의 諸科學」, 동국대출판부,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