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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도자기][고려자기][도자기 정의][도자기 원료][도자기 제작][고려자기 의의][고려자기 발달][고려자기 역사]도자기의 정의, 도자기의 원료, 도자기의 제작, 고려자기의 의의, 고려자기의 발달, 고려자기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도자기의 정의

Ⅲ. 도자기의 원료
1. 점토질 원료
1) 원료의 종류와 특성
2) 점토의 종류
3) 점토 광물
2. 규석질 원료
1) 규석의 성질
2) 규석의 이용
3. 장석질 원료
1) 장석의 종류와 성질
2) 장석의 종류
4. 도석
5. 석회석
6. 납석
7. 마그네시아
8. 그 밖의 산화물 원료
1) 붕사
2) 알루미나
3) 골회
4) 착색제
5) 보조 원료

Ⅳ. 도자기의 제작
1. 반죽
2. 성형
1) 핀칭(Pinching)
2) 모델링(Modeling)
3) 코일링(Coiling)
4) 점토판 성형기법
5) 물레 성형 기법
3. 작품의 건조
4. 초벌 구이(1차 소성)
5. 유약 시유
6. 재벌 구이(2차 소성)
7. 냉각 과정

Ⅴ. 고려자기의 의의

Ⅵ. 고려자기의 발달

Ⅶ. 고려자기의 역사
1. 10세기
2. 11세기
3. 12세기
4. 13세기
5. 14세기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 질감을 나타내는 연질계(軟質系) 고려백자 태토위에 푸른 기가 도는 백자유약을 입혀서 구운 것이다. 철사(鐵砂)로 그린 철회 위에는 유약이 탈락되는 것을 볼 수 있다.
3. 12세기
전기는 순청자시대였고, 후기부터 청자 삼감 시대에 들어간다. 1123년에 송나라의 국신사(國信使)를 수행해 온 서 긍이 쓴《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당시의 청자를 묘사한 글이 나온다. <도준(陶樽), 도기의 푸른 빛깔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는데, 근년의 만듦새는 솜씨가 좋고 빛깔도 더욱 좋아졌다. 술 그릇의 형상은 오리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는 것이 연꽃에 엎드린 오리의 형태를 하고 있다. 도로(陶爐), 즉 사자 모양을 한 향로 역시 비색인데, 위에 쭈그리고 있는 짐승이 있고, 아래에는 앙련화(仰蓮花 : 위로 향한 연꽃)가 있어서 그것을 바치고 있다. 여러 기물들 가운데 이 물건이 가장 정절하고, 그 나머지는 월주(越州)의 고비색(古秘色)이나 여주(汝州)의 청자와 유사하다.>
인종의 능에서 발견된 청자류는 상감이 없는 순청자류였다. 전기에 만들어진 것은 양각이나 음각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소문 순청자였고, 《고려 도경》에 언급된 것과 같은 어떤 물상(物象)의 형(型)을 취한 것들이다. 그리고 퇴화문회청자청자진사채퇴화문(靑瓷辰砂彩堆花文)철채백퇴문(鐵彩白堆文)청자철채(靑自鐵彩) 등이었다. 어떤 물건의 형상을 취한 도범(陶范)으로 만든 것으로는 동철기(銅鐵器)의 모양을 그대로 딴것, 인간과 새동물의 모양을 본 뜬것, 표주박참외석류죽순 등 화초의 형태를 취한것 등이 다양하고 또 투각(透刻)의 기법으로 장식한 것도 있다. 철채 백태문은 그릇전체에 철채를 입히고 백토로 퇴화문 점을 찍은 위에 얇게 청자유를 시유(施釉)한 것으로 흑유(黑釉)나 천목(天木)과 같은 질감을 나타낸다.
4. 13세기
12세기 중엽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절정을 이루었던 청자상감은 1231년 몽고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미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상감기법의 개발과 발전에 따라 청자질은 변화를 가져왔다. 상감문양이 잘 보이게 하는 효과를 위해 유약의 투명도가 높아지고 유약의 색깔은 회청계(灰靑系)로 담소화(淡素化) 되었으며 유약이 고르고 얇아져서 순청자보다 식은태가 많이 생긴 것이 그것이다. 묵직하고 가라앉은 안정감이 많이 줄어든 느낌이다. 중국의 자기도 원의 지배로 침체기로 들어갔듯이 고려청자도 국운의 쇠태에 따라 그 기교적인 정교하고 치밀한 성격을 점차로 잃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강화천도(江華遷都)가 끝난 13세기 후반에 짙어졌다. 상감문양도 덜 익숙한 듯 설고 대범하며 거칠어 졌고 그릇의 곡선도 매끄럽고 우아한 맛을 점차 찾아보기 어렵게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단정하고 우아하기보다는 실용성과 안정성이 점차 강조되어 가는 변화를 일으켰다.
13세기 후반에는 청자진사채(靑瓷辰砂彩)기물이 많이 만들어지고 화금청자(畵金靑瓷)가 나타났다. 49년에 죽은 최우의 묘에서 출토된 청자진사채연판문표형주자(靑瓷辰砂彩蓮瓣文飄形注瓷)는 13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진사채가 뛰어난 것이다. 진사채는 상감을 하지 않고 문양을 음각이나 양각한 것도 부분적으로 채색하거나 흑백상감한 것도 부분을 강조하기 위하여 채색해서 청자유를 입혀 구워서 그 아름다운 색감을 나타낸다. 이때부터 14세기 전반에 이르는 동안에 많이 유행하였기 때문에 그 작품들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것은 이미 이전에도 만들어졌으나 이시기에 제작이 활발하였던 것이다. 화금청자(畵金靑瓷)는 오늘날까지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고 깨어진 조각이나 화금이 거의 마멸된 것이 조금 있을 뿐인데 이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에도 기록되어 있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조인규(조인規)가 원나라 세조(世祖)에게 화금청자를 바치면서 문답하는 기록이 나온다. 세조가 {금은그릇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쓰는가)라고 하자 (다만 장식을 한 것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그럼 그 금은 다시 뒤에 쓸 수 있느냐)라고 묻자 (자기는 깨지기 쉬운 것이라 금도 따라서 없어지니 어찌 다시 쓰겠습니까)라고 대답하니 세조는 (지금부터는 자기에 금으로 그리지도 말고 받치지도 말라)고 하였다. 이시기는 1280년에서 90년 사이이다. 그리고 97년 충렬왕이 황서(黃瑞)를 시켜 원나라 성종(成宗)에게 역시 하금청자를 바친 기록이 나온다. 이 화금청자는 청자상감의 문양에 따라 유약위에 그리고 싶은 문양의 선이나 점을 그려 음각 하듯 홈을 파고 이 오목한 홈에 이금(泥金)을 그려 넣어 장식한 것이다. 처음에는 단단하지만 긴 세월을 두고 쓰다보면 차차 닳아서 없어져 버린다. 또 이 시대의 자기로는 청자상감 외에 흑유계자기(黑釉系瓷器)들과 철사유자기류(철사釉瓷器類)등이 만들어졌다. 철사유류은 청자태토위에 철유(鐵釉)를 씌워서 구운 것이어서 금속질감을 나타난다. 청자태토에 백토상감을 하고 상감부분이외의 태토에는 철유를 모두 꼼꼼히 칠해서 구운 철채백상감자기류(鐵彩白象嵌瓷器類)등이 만들어졌다.
5. 14세기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말 고려가 멸망하기까지 퇴화해 가는 고려청자(高麗靑瓷)의 질을 환하게 느낄 수 있다. 청자태토(靑瓷胎土)는 거치고 두꺼워지며 상감기법도 진지하지 못하고 섬세한 맛이 없어 어느모로 보나 전성기의 청자상감(靑瓷象嵌)을 연상하게 하는 점이 보이지 않는다. 고려청자의 3가지 특이한 장점은 바로 정제된 그릇 곡선(曲線)의 빈틈없이 매끄러운 균형, 정교하고 세련된 상감기법, 그리고 그윽하고 우아한 비색(翡色)의 유약에 있다. 이 청자의 아름다움을 꽃피웠던 고려가 날로 쇠망의 길을 걸었을 때에 청자의 아름다움도 그 쇠운(衰運)을 함께 해 갔다. 이렇게 정교하지 못한 청자상감그릇들은 머지않아 태어날 새왕국분청사기의 배태(胚胎)의 전주곡이 되었다,
참고문헌
▷ 교육부, 도자기, 한양대학교 세라믹소재연구소
▷ 김영진(1996), 조선도자기사 연구, 한국문화사
▷ 송종택 외 3명(1996), 세라믹공정, 교육부
▷ 유홍준·윤용이(2001), 알기 쉬운 한국 도자사, 학고재
▷ 양호환 외(2001), 역사교육의 이해, 삼지원
▷ 정양모(1997), 한국의 도자기,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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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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