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삼국사기
ⅰ. 김부식의 고문체의 수용
ⅱ.열전의 체제와 서술방식
ⅲ.을지문덕전의 서술방식과 문체적 특징
Ⅱ. 『古事記』를 통해 본 일본의 문자사용의 정착과 구비전승의 변화
ⅰ. 일본어의 한자표기 방법.
ⅱ. 불교가 일본 문자문화 정착의 끼친 영향
ⅲ. 『古事記』♧ 참고문헌
ⅰ. 김부식의 고문체의 수용
ⅱ.열전의 체제와 서술방식
ⅲ.을지문덕전의 서술방식과 문체적 특징
Ⅱ. 『古事記』를 통해 본 일본의 문자사용의 정착과 구비전승의 변화
ⅰ. 일본어의 한자표기 방법.
ⅱ. 불교가 일본 문자문화 정착의 끼친 영향
ⅲ. 『古事記』♧ 참고문헌
본문내용
左翊衛大將軍宇文述 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 出樂浪道 與九軍至鴨水 文德受王命 詣其營詐降 實欲觀其虛實 述與仲文 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 則執之 仲文等 將留之 尙書右丞劉士龍爲慰撫使 固止之遂聽 文德歸深悔之 遣人文德曰 “更欲有議 可復來” 文德不顧 遂濟鴨而歸
ⓒ述與仲文 旣失文德 內不自安 述以粮盡欲還 仲文謂“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兵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述等不得已而從之 度鴨水追之 文德見隋軍士有饑色 欲疲之 每戰輒北 述等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遂進東 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文德遺仲文詩曰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仲文答書諭之
ⓓ文德又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 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難以猝拔 遂因其詐而還 爲方陣而行 文德出軍 四面擊之 述等且戰且行 至薩水 軍半濟 文德進軍 擊其後軍 殺右屯衛將軍辛世雄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九軍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水 行四百五十里 初 度遼 九軍三十萬五千人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論曰 煬帝遼東之役 出師之盛 前古未之有也 高句麗一偏方小國 而能拒之 不唯自保而已 滅其軍幾盡者 文德一人之力也 傳曰 『不有君子 其能國乎』 信哉
ⓐ을지문덕은 그 世系가 자세하지 않다. 자질이 침착하고 날쌔며 지략이 있고 겸하여 글을 지을 줄도 알았다.
ⓑ수나라 개황중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정벌토록 하니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로 나와 9군과 함께 압록강에 이르렀다. 문덕이 왕명을 받고 그들의 진영으로 나아가 거짓 항복하였는데 실상은 그들의 허실을 관찰하고자 함이었다. 술과 중문은 먼저 밀지를 받기를, 만약 고구려왕 및 문덕이 오면 잡아두라는 것이었다. 중문등은 억류해두려 하였으나 상서우승 유사룡이 위무사가 되어 굳이 말리므로 드디어 문덕을 돌려보내고 깊이 후회하였다. 사람을 보내어 문덕을 속여 말하기를 “의논하려고 하니 다시 오라”하였으나 문덕은 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돌아왔다.
ⓒ술과 중문은 문덕을 잃고 내심 편치 않았다. 술은 군량이 다하자 돌아가려 하였는데 중문은 정예부대로써 문덕을 추격하면 공을 이룰 수 있다. 하였다. 술이 말리니 중문은 노하여 말하기를 “장군은 10만명의 병력을 가지고 적은 적을 부수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뵈려는가?”하니 어쩔 수 없이 좇아서 압록강을 건너 쫓아갔다. 문덕은 수의 군사가 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피곤하게 하려고 매번 싸울 때마다 바로 패하였다. 술등은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이겼다. 이같이 빨리 이김을 믿고 또 여러 의논에 몰려 드디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평양성과 30리 거리에 산을 의지하고 영을 만들었다. 문덕은 중문에게 시를 보내기를 “신책은 천문을 궁구하였고, 묘산도 지리를 궁구하였네. 싸움에 이기어 공이 이미 높으니, 민족을 알진데 그 침이 어떤가?”하니, 중문은 답서로써 효유하였다.
ⓓ문덕이 또 사자를 보내어 거짓 항복하고 술에게 청하기를 “만약 군사를 돌이킨다면 왕을 모시고 행재소로 조회하겠다”하니, 술은 사졸들이 피곤하여 다시 싸울수 없음을 보고 평양성이 험하고 굳세어 갑자기 함락시키기 어려웠으므로 드디어 거짓말에 의거해 가면서 방진을 만들어 떠났다. 문덕이 군사를 내어 사면으로 초격하니 술등은 싸우면서 가고하여 살수에 이르러 군사가 절반쯤 건넜는데, 문덕의 군사가 나아가 그 후군을 공격하여 우둔위장군 신세웅을 죽였다. 이에 여러군사가 무너져 걷잡을수 없었다. 9군장병이 달아나 돌아가는데 하루낮 하룻밤에 압록강에 당도하니 450리의 행보였다. 처음에 요수를 건널 때는 9군이 30만 5000명이었는데 돌아가 요동성에 이르니 오직 2700명이었다.
ⓒ述與仲文 旣失文德 內不自安 述以粮盡欲還 仲文謂“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兵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述等不得已而從之 度鴨水追之 文德見隋軍士有饑色 欲疲之 每戰輒北 述等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遂進東 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文德遺仲文詩曰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仲文答書諭之
ⓓ文德又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 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難以猝拔 遂因其詐而還 爲方陣而行 文德出軍 四面擊之 述等且戰且行 至薩水 軍半濟 文德進軍 擊其後軍 殺右屯衛將軍辛世雄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九軍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水 行四百五十里 初 度遼 九軍三十萬五千人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論曰 煬帝遼東之役 出師之盛 前古未之有也 高句麗一偏方小國 而能拒之 不唯自保而已 滅其軍幾盡者 文德一人之力也 傳曰 『不有君子 其能國乎』 信哉
ⓐ을지문덕은 그 世系가 자세하지 않다. 자질이 침착하고 날쌔며 지략이 있고 겸하여 글을 지을 줄도 알았다.
ⓑ수나라 개황중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정벌토록 하니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로 나와 9군과 함께 압록강에 이르렀다. 문덕이 왕명을 받고 그들의 진영으로 나아가 거짓 항복하였는데 실상은 그들의 허실을 관찰하고자 함이었다. 술과 중문은 먼저 밀지를 받기를, 만약 고구려왕 및 문덕이 오면 잡아두라는 것이었다. 중문등은 억류해두려 하였으나 상서우승 유사룡이 위무사가 되어 굳이 말리므로 드디어 문덕을 돌려보내고 깊이 후회하였다. 사람을 보내어 문덕을 속여 말하기를 “의논하려고 하니 다시 오라”하였으나 문덕은 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돌아왔다.
ⓒ술과 중문은 문덕을 잃고 내심 편치 않았다. 술은 군량이 다하자 돌아가려 하였는데 중문은 정예부대로써 문덕을 추격하면 공을 이룰 수 있다. 하였다. 술이 말리니 중문은 노하여 말하기를 “장군은 10만명의 병력을 가지고 적은 적을 부수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뵈려는가?”하니 어쩔 수 없이 좇아서 압록강을 건너 쫓아갔다. 문덕은 수의 군사가 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피곤하게 하려고 매번 싸울 때마다 바로 패하였다. 술등은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이겼다. 이같이 빨리 이김을 믿고 또 여러 의논에 몰려 드디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평양성과 30리 거리에 산을 의지하고 영을 만들었다. 문덕은 중문에게 시를 보내기를 “신책은 천문을 궁구하였고, 묘산도 지리를 궁구하였네. 싸움에 이기어 공이 이미 높으니, 민족을 알진데 그 침이 어떤가?”하니, 중문은 답서로써 효유하였다.
ⓓ문덕이 또 사자를 보내어 거짓 항복하고 술에게 청하기를 “만약 군사를 돌이킨다면 왕을 모시고 행재소로 조회하겠다”하니, 술은 사졸들이 피곤하여 다시 싸울수 없음을 보고 평양성이 험하고 굳세어 갑자기 함락시키기 어려웠으므로 드디어 거짓말에 의거해 가면서 방진을 만들어 떠났다. 문덕이 군사를 내어 사면으로 초격하니 술등은 싸우면서 가고하여 살수에 이르러 군사가 절반쯤 건넜는데, 문덕의 군사가 나아가 그 후군을 공격하여 우둔위장군 신세웅을 죽였다. 이에 여러군사가 무너져 걷잡을수 없었다. 9군장병이 달아나 돌아가는데 하루낮 하룻밤에 압록강에 당도하니 450리의 행보였다. 처음에 요수를 건널 때는 9군이 30만 5000명이었는데 돌아가 요동성에 이르니 오직 2700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