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왜에서의 백제유민
2. 일본천황과 백제와의 관계
3. 백제의 마지막 공주, 부여태비
4. 참고문헌
2. 일본천황과 백제와의 관계
3. 백제의 마지막 공주, 부여태비
4. 참고문헌
본문내용
된 것이다. 순타가 화(和-야마토)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은 화(和-야마토)씨가 된 것이다. 야마토는 순타 후손의 봉토, 다시말하면 그들의 땅이었던 것이다. 백제는 왕의 사촌만 되면 왕으로부터 다른 성씨로 봉해져, 부여씨가 이끄는 백제 왕실의 왕위 계승권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 법도는 일본 천황가의 법도와 동일한 법도로 보인다.
3. 백제의 마지막 공주, 부여태비
우리가 아는 백제는 660년, 멸망의 길로 들어서 사라졌다. 유민들은 당나라로 끌려가 당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연히 발견된 묘지석에 적혀있던 831자의 기록과 함께 되살아난 부여태비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의자왕의 증손녀로 백제의 마지막 공주였던 그녀가 당나라를 세운 황제의 옆에 함께 묻혀 있었던 것이다.
당시 당나라는 백제의 멸망 후 건안고성에 백제 유민들을 모여 살 곳을 만들어주고, 백제가 존재했을 당시의 형식대로 백제국의 태자를 인정하고 이곳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에 백제유민들은 나라를 재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당나라 안에서 새롭게 성장해 나갔다. 당나라에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백제 유민들이 모여 백제의 명맥을 유지하며 건안고성에 살아가던 즈음 그녀는 이옹과 결혼을 결심한다. 그녀의 나이 스물 둘이었다. 여인이 아닌 왕족의 선택이었다. 국가를 이어나가야한다는 왕족의 의무를 실현하고, 유민들을 하나로 묶어 잘 살게 하기 위한 길이었다. 결혼 후에도 그녀는 현모양처로써 생을 다할 때까지 어질며 덕행 있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후 중국 전쟁사의 한 획을 그은 양비천 전투의 주인공 흑치상지를 비롯해 사타충의, 난원경, 순장군 등 백제 유민들은 당나라 군대의 요직을 차지하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러한 백제유민들의 활약이 커질수록, 지위가 올라갈수록 백제 유민을 상징하는 부여태비의 지위도 함께 격상됐을 것이다. 살아있는 왕가의 후손, 부여태비는 백제 유민들의 자존심이었다.
▲부여태비의 묘지석
그녀의 묘지석은 부여씨가 괵지역의 왕비라고 설명하고 있다. 괵지역의 왕은 당고조의 증손 이옹이었다. 그녀는 이옹과 결혼함으로써 당황실의 일원이 되었는데 부여태비는 후에 그녀의 아들이 왕에 올라 왕비에서 태비로 격상된 것이다. 그렇다면 부여태비라는 지위는 이옹과의 결혼으로 높아진 것일까? 보다 구체적으로 부여태비의 삶을 파악하고자 이옹의 자취를 따라가보면 부여태비는 이옹의 둘째부인이며, 당의 대대적인 정권교체로 좌천되었던 이옹이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왕좌에 복귀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여태비의 남편 사괵왕이 다스렸던 함곡관
▲건안고성 터
4. 참 고 문 헌
이근우, 일본열도의 백제 유민에 대하여, 대학논문, 2000
김주성, 연기 불상군 명문을 통해 본 연기지방 백제유민의 동향, 2000
김영관, 멸망 직후 백제 유민의 동향, 2001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 백제 유민들의 활동,2007
고소진, 백제멸망 전후 백제와 왜의 관계,2007
kbs, 역사스페셜, <백제의 마지막 공주, 부여태비>
3. 백제의 마지막 공주, 부여태비
우리가 아는 백제는 660년, 멸망의 길로 들어서 사라졌다. 유민들은 당나라로 끌려가 당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연히 발견된 묘지석에 적혀있던 831자의 기록과 함께 되살아난 부여태비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의자왕의 증손녀로 백제의 마지막 공주였던 그녀가 당나라를 세운 황제의 옆에 함께 묻혀 있었던 것이다.
당시 당나라는 백제의 멸망 후 건안고성에 백제 유민들을 모여 살 곳을 만들어주고, 백제가 존재했을 당시의 형식대로 백제국의 태자를 인정하고 이곳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에 백제유민들은 나라를 재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당나라 안에서 새롭게 성장해 나갔다. 당나라에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백제 유민들이 모여 백제의 명맥을 유지하며 건안고성에 살아가던 즈음 그녀는 이옹과 결혼을 결심한다. 그녀의 나이 스물 둘이었다. 여인이 아닌 왕족의 선택이었다. 국가를 이어나가야한다는 왕족의 의무를 실현하고, 유민들을 하나로 묶어 잘 살게 하기 위한 길이었다. 결혼 후에도 그녀는 현모양처로써 생을 다할 때까지 어질며 덕행 있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후 중국 전쟁사의 한 획을 그은 양비천 전투의 주인공 흑치상지를 비롯해 사타충의, 난원경, 순장군 등 백제 유민들은 당나라 군대의 요직을 차지하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러한 백제유민들의 활약이 커질수록, 지위가 올라갈수록 백제 유민을 상징하는 부여태비의 지위도 함께 격상됐을 것이다. 살아있는 왕가의 후손, 부여태비는 백제 유민들의 자존심이었다.
▲부여태비의 묘지석
그녀의 묘지석은 부여씨가 괵지역의 왕비라고 설명하고 있다. 괵지역의 왕은 당고조의 증손 이옹이었다. 그녀는 이옹과 결혼함으로써 당황실의 일원이 되었는데 부여태비는 후에 그녀의 아들이 왕에 올라 왕비에서 태비로 격상된 것이다. 그렇다면 부여태비라는 지위는 이옹과의 결혼으로 높아진 것일까? 보다 구체적으로 부여태비의 삶을 파악하고자 이옹의 자취를 따라가보면 부여태비는 이옹의 둘째부인이며, 당의 대대적인 정권교체로 좌천되었던 이옹이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왕좌에 복귀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여태비의 남편 사괵왕이 다스렸던 함곡관
▲건안고성 터
4. 참 고 문 헌
이근우, 일본열도의 백제 유민에 대하여, 대학논문, 2000
김주성, 연기 불상군 명문을 통해 본 연기지방 백제유민의 동향, 2000
김영관, 멸망 직후 백제 유민의 동향, 2001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 백제 유민들의 활동,2007
고소진, 백제멸망 전후 백제와 왜의 관계,2007
kbs, 역사스페셜, <백제의 마지막 공주, 부여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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