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속일본기 이해
2. 본론
신라 외교의 성격
속일본기에 나타난 신라 사절 관련 기록
신라사절 관련 기사의 특징
신라 조공에 대한 해석 소개
3. 결론
신라 사절단의 성격 이해
속일본기 이해
2. 본론
신라 외교의 성격
속일본기에 나타난 신라 사절 관련 기록
신라사절 관련 기사의 특징
신라 조공에 대한 해석 소개
3. 결론
신라 사절단의 성격 이해
본문내용
국이었다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앞서 잠깐 언급한 사신단 파견횟수를 살펴보면 당시 일본이 당나라보다 월등히 많은 횟수의 사절단을 신라에 파견하였으며 신라의 사절단의 대접에도 예를 다하였음을 기록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고, 파견단의 관등을 보면 신라의 사절단보다 일본의 사절단이 월등히 고위과료였다는 것은 일본이 신라를 결코 속국으로 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절단의 방문 기간을 보면 새로운 천황이 등극했을 때 신라사절단의 방문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일본 황실이 신라의 사절을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는데 이용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나라의 해석은 720년대 양국 갈등시기의 원인을 파악하는데 있어서도 서로 대립되는 데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었다고 주장하는 측은 신라가 삼국통일이라는 비상상황과 당과의 대립이라는 외교적 불안 시기에는 일본과의 관계를 소홀히 할 수 없었으므로 조공국을 자처하였고 후에 통일정국이 안정화 되고 당과의 관계역시 회복 되자 일본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야기 하였다고 해석한다. 이에 반해 후자는 720년대부터 발생하는 양국의 외교분쟁을 단순히 신라측의 사정으로 몰아서는 안되며 일본측의 일방적인 인식, 혹은 강요에 의한 것이지 애초부터 신라가 일본의 조공국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720년대 이후 일본이 신라사신단을 조공단으로 대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 신라에서 그 관계를 거부하였다는 것이다.
대립되는 두 해석 모두 일리가 있다. 하지만 역사속에서 보면 식민국가 경우를 제외하고 어떠한 나라도 주변 어떤 국가에 일방적인 문화적 우세속에서 일방적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는 없다. 각 시기의 주변 정세와 국내 사정에 따라 주변국들과 협조 대립의 관계를 맺으며 발전하는 것이다. 신라와 일본의 관계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다른 어떤나라보다도 외교 처세가 뛰어났던 신라이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와의 대립에서 외교기술로 삼국을 통일하였던 외교를 충분히 활용할 줄 아는 나라였다. 그러한 신라가 일본을 자극하여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백제와 전쟁중이던 신라입장에서는 오랜기간 백제와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신라가 군사력 대부분을 삼국 통일을 위한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에 투입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일본의 작은 도발도 신라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가 일본의 속국이었냐 아니냐의 논란은 후대 역사가의 논쟁에 불과한 것이다. 신라는 자국의 실리를 따져 일본과의 외교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일본이 신라를 조공국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신라의 외교적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 문헌 : 李 炳 魯 「《속일본기》의 신라사절 기사에 관한 연구」
李 炳 魯 「속일본기에 나타난 한국 고대 사상」
李 根 雨 「續日本記의 歷史敍述의 特徵」
박 래 영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나타난 한일 교류사 비교」
박 노 자 -거꾸로 본 한국 고대사
대립되는 두 해석 모두 일리가 있다. 하지만 역사속에서 보면 식민국가 경우를 제외하고 어떠한 나라도 주변 어떤 국가에 일방적인 문화적 우세속에서 일방적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는 없다. 각 시기의 주변 정세와 국내 사정에 따라 주변국들과 협조 대립의 관계를 맺으며 발전하는 것이다. 신라와 일본의 관계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다른 어떤나라보다도 외교 처세가 뛰어났던 신라이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와의 대립에서 외교기술로 삼국을 통일하였던 외교를 충분히 활용할 줄 아는 나라였다. 그러한 신라가 일본을 자극하여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백제와 전쟁중이던 신라입장에서는 오랜기간 백제와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신라가 군사력 대부분을 삼국 통일을 위한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에 투입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일본의 작은 도발도 신라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가 일본의 속국이었냐 아니냐의 논란은 후대 역사가의 논쟁에 불과한 것이다. 신라는 자국의 실리를 따져 일본과의 외교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일본이 신라를 조공국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신라의 외교적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 문헌 : 李 炳 魯 「《속일본기》의 신라사절 기사에 관한 연구」
李 炳 魯 「속일본기에 나타난 한국 고대 사상」
李 根 雨 「續日本記의 歷史敍述의 特徵」
박 래 영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나타난 한일 교류사 비교」
박 노 자 -거꾸로 본 한국 고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