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에로티즘
Ⅱ 에로티즘에 대하여
Ⅲ 금기와 위반으로서의 세계 - 동물성으로부터 벗어난 인간
Ⅳ 지배와 권위를 지탱하는 금기
Ⅴ 바따이유 논의의 가치
Ⅱ 에로티즘에 대하여
Ⅲ 금기와 위반으로서의 세계 - 동물성으로부터 벗어난 인간
Ⅳ 지배와 권위를 지탱하는 금기
Ⅴ 바따이유 논의의 가치
본문내용
정의되어 왔던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바따이유의 생각이다.
이제까지 논의의 뒤편에서 음밀 하게 진행되었던 인간의 또 다른 측면을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인간의 총체성을 다루고자 하는 것, 그것이 에로티즘을 통해 인간을 파악하고자 한 바따이유의 생각이 아닌가 한다.
Ⅳ 지배와 권위를 지탱하는 금기
바따이유의 에로티즘에 있어서 노동은 그 자유로움을 해치는 부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한다는 점은 인간을 동물성과 구별시키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이렇게 인간을 동물성으로부터 구별시키는 노동의 개념을 바따이유는 마르크스와는 다른 관점에서 본다. 인간은 본래 먹고 마시고 생식하는 일을 할뿐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바따이유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동물성으로부터 구별시키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에 마르크스는 노동하는 인간의 기능을 포함시킨다. 즉 인간은 동물성과 달리 신체를 이용한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생산 활동을 영위하는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노동하는 것은 살아가는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따이유는 이 사실을 부정한다. 바따이유가 주목하고 있는 생산의 목표는 오히려 노동력의 생산적 소모와 소비를 통한 사용 가치의 소유 사이의 순환 과정을 초월한다. 그는 삶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노동력의 재생산과 사치 소비 사이의 깊은 갈등이 소비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소비는 상이한 두 영역으로 분류되어야 하는데, 그 하나가 삶을 보존하고 생산적 활동을 계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한 소비이며, 다른 하나는 비생산적인 소비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특징은 노동을 통해 산출된 모든 잉여가 생산적으로 소모되어야 한다고 본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사용 가치와 교환가치의 생산이 구분되는 것을 비판한 반면 바따이유는 생산된 잉여의 비생산적 소비에 대하여 이익의 생산적 투자가 독립하는 것을 비난한다. 자본주의자들은 부를 기능적으로 소비할 책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습관화된 노동의 필연성들이 자유라는 가면 아래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바따이유가 이전에 주목하고자 한 일종의 금기의 대상이며, 결국 이것이 인간을 지배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상 한 국가를 지배해 나가는 과정에서 지배자들은 국민들의 의식이나 생활 자체를 가두어둘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였고, 그것은 신성시되는 금기 사항들과 맞물려 그들을 통제하고 지배해 왔다. 또한 그러한 것들이 하나의 권위로서 자리잡고 권력에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지배의 모든 역사적 형태들 속에서 주권은 항상 권력과 결합되어 있다. 소비에트 정권을 통해 비로소 모든 주권의 혼합물로부터 정제된, 다시 말해 분리된 ‘객관적’으로 된 권력이 등장한다. 이 권력은 사회적 노동의 체계에 의해 정의된다. 이에 대해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바따이유는 주권의 힘과 노동의 힘이 서로 반목하는 이성의 역사 내에 현대가 묶여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성의 역사는 신성한 사회의 태고적 시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총체적으로 철저하게 사물화된 경제적 소비에트 권력의 세계에까지 이른다. 철저하게 물화된 이 세계에서는 주권의 마지막 봉건주의적 흔적들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그런데 동질적인 구성 요소와 이질적인 구성 요소의 완전한 분리는 사회적 평등을 개인의 주권과 화해시키는 사회구성체로의 관점을 열어준다. 하지만 전체 자연의 에너지에까지 확장된 바따이유의 시도는 결국 자기 관계적 이성 비판의 모순에 빠지게 된다.
결국 금기가 지니고 있는 규칙성 및 제한성은 다양한 욕망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을 규칙화시키고 제한하여 그 지배를 용이하게 만든다. 그러한 금기의 위반, 즉 절정의 에로티즘의 상태에 도달하게 될 때 인간은 신적인 동물성을 획득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자유로운 에로티즘의 상태는 사회의 합법성과 규칙성을 깨뜨리는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지배적 권위를 지탱하기 위한 버팀목이 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바따이유는 파시즘의 분석에 주목한다. 특히 카리스마적 지도자 인물들에 대한 민중들의 밀착과 결합에 큰 관심을 보였다. 신성한 인물로서의 지도자에 대한 숭배, 예술적인 의례 형식, 극명하게 드러나는 폭력과 최면 등등, 이질적인 것들이 합법적인 지배 관계 속에 녹아 들어가 하나의 정당성을 표현하게 된다. 파시즘적 지배를 통해 동질적 요소와 이질적 요소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융합한다. 즉 한편으로는 질서, 규율 등의 동질적 사회의 요청을 드러내는 특성과, 다른 한편 대중 도취와 지도자의 권위가 융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화된 주권으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순수하게 가능하도록 한다.
Ⅴ 바따이유 논의의 가치
우리는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이성의 법칙에 따라 판단하고자 한다. 그리고 감정이나 관습적으로 금기시 되어온 것들을 통한 세상 보기를 거부하였다.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관점 역시 우리의 사유틀을 파괴하는 것이며, 한 발짝 더 나아가 성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 바따이유는 당황스럽기조차 하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 혹은 행동을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울타리 치고 제한시키는 것은 가장 감정적인, 가장 비이성적인 부분이 아닌가 한다. 특히 도덕이라는 가면 아래서 에로티즘, 즉 성행위에 대한 금기는 우리 의식의 자율성을 얽매이는 가장 튼튼한 끈이었다.
우리는 현대를 논의하면서 해체주의를 이야기하고 탈 규칙적인 방식을 논의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식 저편에 잠재하고 있는 금기시된 행위들에 대한 두려움은 논의 이전에 먼저 깨져야 할 틀이 아닌가 한다. 더구나 금기가 국가 권력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그들에게 신적인 권위를 부여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물론 바따이유는 우리가 금기시 하고 있는 부분을 드러내고만 있을 뿐,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작용하는 범주만큼은 현재보다 더 확장시켰다는 측면에서 바따이유 논의에 가치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제까지 논의의 뒤편에서 음밀 하게 진행되었던 인간의 또 다른 측면을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인간의 총체성을 다루고자 하는 것, 그것이 에로티즘을 통해 인간을 파악하고자 한 바따이유의 생각이 아닌가 한다.
Ⅳ 지배와 권위를 지탱하는 금기
바따이유의 에로티즘에 있어서 노동은 그 자유로움을 해치는 부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한다는 점은 인간을 동물성과 구별시키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이렇게 인간을 동물성으로부터 구별시키는 노동의 개념을 바따이유는 마르크스와는 다른 관점에서 본다. 인간은 본래 먹고 마시고 생식하는 일을 할뿐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바따이유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동물성으로부터 구별시키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에 마르크스는 노동하는 인간의 기능을 포함시킨다. 즉 인간은 동물성과 달리 신체를 이용한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생산 활동을 영위하는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노동하는 것은 살아가는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따이유는 이 사실을 부정한다. 바따이유가 주목하고 있는 생산의 목표는 오히려 노동력의 생산적 소모와 소비를 통한 사용 가치의 소유 사이의 순환 과정을 초월한다. 그는 삶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노동력의 재생산과 사치 소비 사이의 깊은 갈등이 소비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소비는 상이한 두 영역으로 분류되어야 하는데, 그 하나가 삶을 보존하고 생산적 활동을 계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한 소비이며, 다른 하나는 비생산적인 소비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특징은 노동을 통해 산출된 모든 잉여가 생산적으로 소모되어야 한다고 본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사용 가치와 교환가치의 생산이 구분되는 것을 비판한 반면 바따이유는 생산된 잉여의 비생산적 소비에 대하여 이익의 생산적 투자가 독립하는 것을 비난한다. 자본주의자들은 부를 기능적으로 소비할 책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습관화된 노동의 필연성들이 자유라는 가면 아래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바따이유가 이전에 주목하고자 한 일종의 금기의 대상이며, 결국 이것이 인간을 지배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상 한 국가를 지배해 나가는 과정에서 지배자들은 국민들의 의식이나 생활 자체를 가두어둘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였고, 그것은 신성시되는 금기 사항들과 맞물려 그들을 통제하고 지배해 왔다. 또한 그러한 것들이 하나의 권위로서 자리잡고 권력에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지배의 모든 역사적 형태들 속에서 주권은 항상 권력과 결합되어 있다. 소비에트 정권을 통해 비로소 모든 주권의 혼합물로부터 정제된, 다시 말해 분리된 ‘객관적’으로 된 권력이 등장한다. 이 권력은 사회적 노동의 체계에 의해 정의된다. 이에 대해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바따이유는 주권의 힘과 노동의 힘이 서로 반목하는 이성의 역사 내에 현대가 묶여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성의 역사는 신성한 사회의 태고적 시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총체적으로 철저하게 사물화된 경제적 소비에트 권력의 세계에까지 이른다. 철저하게 물화된 이 세계에서는 주권의 마지막 봉건주의적 흔적들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그런데 동질적인 구성 요소와 이질적인 구성 요소의 완전한 분리는 사회적 평등을 개인의 주권과 화해시키는 사회구성체로의 관점을 열어준다. 하지만 전체 자연의 에너지에까지 확장된 바따이유의 시도는 결국 자기 관계적 이성 비판의 모순에 빠지게 된다.
결국 금기가 지니고 있는 규칙성 및 제한성은 다양한 욕망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을 규칙화시키고 제한하여 그 지배를 용이하게 만든다. 그러한 금기의 위반, 즉 절정의 에로티즘의 상태에 도달하게 될 때 인간은 신적인 동물성을 획득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자유로운 에로티즘의 상태는 사회의 합법성과 규칙성을 깨뜨리는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지배적 권위를 지탱하기 위한 버팀목이 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바따이유는 파시즘의 분석에 주목한다. 특히 카리스마적 지도자 인물들에 대한 민중들의 밀착과 결합에 큰 관심을 보였다. 신성한 인물로서의 지도자에 대한 숭배, 예술적인 의례 형식, 극명하게 드러나는 폭력과 최면 등등, 이질적인 것들이 합법적인 지배 관계 속에 녹아 들어가 하나의 정당성을 표현하게 된다. 파시즘적 지배를 통해 동질적 요소와 이질적 요소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융합한다. 즉 한편으로는 질서, 규율 등의 동질적 사회의 요청을 드러내는 특성과, 다른 한편 대중 도취와 지도자의 권위가 융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화된 주권으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순수하게 가능하도록 한다.
Ⅴ 바따이유 논의의 가치
우리는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이성의 법칙에 따라 판단하고자 한다. 그리고 감정이나 관습적으로 금기시 되어온 것들을 통한 세상 보기를 거부하였다.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관점 역시 우리의 사유틀을 파괴하는 것이며, 한 발짝 더 나아가 성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 바따이유는 당황스럽기조차 하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 혹은 행동을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울타리 치고 제한시키는 것은 가장 감정적인, 가장 비이성적인 부분이 아닌가 한다. 특히 도덕이라는 가면 아래서 에로티즘, 즉 성행위에 대한 금기는 우리 의식의 자율성을 얽매이는 가장 튼튼한 끈이었다.
우리는 현대를 논의하면서 해체주의를 이야기하고 탈 규칙적인 방식을 논의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식 저편에 잠재하고 있는 금기시된 행위들에 대한 두려움은 논의 이전에 먼저 깨져야 할 틀이 아닌가 한다. 더구나 금기가 국가 권력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그들에게 신적인 권위를 부여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물론 바따이유는 우리가 금기시 하고 있는 부분을 드러내고만 있을 뿐,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작용하는 범주만큼은 현재보다 더 확장시켰다는 측면에서 바따이유 논의에 가치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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