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 티위사람들 - 티위사람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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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화인류학] 티위사람들 - 티위사람들 요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티위사람들 요약

<제 1장> 혼인 관행
<제 2장> 숲 속에서의 생활
<제 3장> 위세와 영향력의 체계
<제 4장> 공동생활
<제 5장> 친구와 적
<제 6장> 오늘날의 티위 사람들
<제 7장> 티위에서의 현지 조사


가상의 라이프 스토리

본문내용

갈 때에 주기적인 공동의례에 나갔다. 이 의례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행되었고, 또 이러한 전이의례 중에서 중요한 것은 콜레마 얌이 수확될 때인 1월과 2월에 거행되었다. 이 의례들에서 소년들은 무리 또는 등급으로 나위어졌고, 첫 단계의 모든 소년들은 의례적으로 다음 등급으로 올라갔다. 제일 높은 등급인 미킹굴라에 이르고 4년동안을 그 단계에 더 머물러야 비로서 성인 남자로서 인정을 받고 사회에 나와 활동 하게 되는 것이다.
<제 5장> 친구와 적
티위족은 끊임없이 외부의 공격을 받아왔다. 티위 사람들이 외부인을 불신한 것은 티모르에 있던 포르투칼인들이 노예를 잡기 위해 멜빌 섬을 습격했던 10여 년 간의 시기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해삼 잡이 말레이인(인도네시아인)들은 해삼을 잡기 위해 바다에 나갔다가 티위 사람들의 고장으로 밀려들어가기도 했는데 그들은 다른 외부인처럼 살아남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티위 사람들은 우선 침입자를 창으로 찌른 뒤에야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1824년에 영국인들이 멜빌섬 북서쪽에 던다스 기지를 세웠는데 티위사람들과의 부단한 싸움과 열대기후에 환멸을 느끼고 결국 돌아갔다. 이후에도 티위족은 끊임없이 외부의 침임을 받았지만 다 물리쳤다.
오늘날 티위 사람들은 호주 국민의 일부로서 현대 세계에 병합 되어 왔고 이미 그들은 여러 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통하여 호주인을 포함한 외부인을 이해하여 왔다. 그들은 먼저 호기심과 철을 갖고 싶은 소망에 의해 적대적이던 섬사람 근성을 차츰 줄여 나갔다. 그래서 그 섬사람들은 마침내 일찍이 있었던 던다스 기지처럼, 유럽인들이 그들 땅 한 가운데에 영구적으로 정착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 방법만이 자기네들이 철을 방해받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후 일본인들과 선교사들에게 교역품과 티위 여자들을 바꾸게 되었다.
<제 6장> 오늘날의 티위 사람들
1930년대 티위 사람들의 활동 중심지가 다소 이동 되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 하였다. 이 당시에는 많은 티위 여자들과 일본의 진주조개 잡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1940년 새로운 가톨릭 선교단이 이 혼혈아들을 돌보기 위해 가든 포인트에 설립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정부는 바더스트 섬과 멜빌 섬의 나병 환자들을 채널 섬의 나병 요양원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이 요양원에서 몇 해를 지내다 돌아온 티위 사람들은 이미 동료 부족민들보다 훨씬 더 유럽식에 빠져 있었고, 백인 호주 문화의 중개인이 되어 있었다. 1942년, 다윈이 폭격 당하고 그로 인한 직접적인 티위 사람들의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가톨릭 선교단에는 막대한 손실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티위 공동체의 붕괴를 촉진 시켰다. 가톨릭 당국에서는 재단의 큰 손실로 인해 더 이상 원주민들에게 식량 공급을 보장 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선교단에서 생활 하던 티위 사람들은 숲으로 보내졌다. 얼마간의 기간이 지나고 가톨릭 선교단에서 서양 식품이 다시 공급 되자 유럽식에 길들여져 있던 티위 사람들, 특히 노인들은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이제 백인들만이 공급 해줄 수 있는 생산물에 전적으로 의존 하게 된 것이다.
기셀 신부에 의해 도입 된 새로운 가톨릭 체계는 일부다처제 혼인,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사람들 간의 결혼, 모든 태아와 어린이의 약혼 등을 금지 시키거나 또는 최소한으로 저지 시켰다. 이 것으로 인해 아버지들은 새로운 형태의 이권을 장래 사윗감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했고, 신부 값과 신랑의 노동 봉사에 아주 유사한 요구가 혼인 계약의 기본 조건으로 발달 하였다. 결혼이 이루어진 후, 아버지는 자신이 사윗감에게 기대하고 있던 바를 알려주었다. 그 대가는 보통 호주 화폐였다. (1950년대)
또 다른 큰 변화의 예로 부계제에서 모계제로의 전환을 들어 볼 수 있겠다. 이 변화를 설명하기에 앞서 티위의 전통적 유형으로 엄격한 모계 씨족 조직에 대해 설명해보려 한다. 이 조직은 일차적으로 토템 숭배 (Totemism)와 관련 된 것이었다. 이러한 씨족 조직의 유형은 1930년대까지 티위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데 주요한 그리고 예측치 못한 변화가 시작 되었다. 티위의 전통 사회와 같이 부계제가 강조 되었던 사회가 유럽 사회(그것도 부계제가 강조 되었던 사회였다.)와 접촉하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는 통상 부계제가 더 강화 되었을 것이라고 기대 할 것이지만, 티위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부계제가 지배적이었던 전통적인 사회 단위는 영역 집단이었고, 그것은 불화의 상태에서 주요 기능을 하였다.
그런 불화의 상황이 사라지고 티위 공동체가 특히 바더스트 섬의 선교단 주위로 집중 되었을 때 전통적인 군단 조직의 유용성(=군단 간 불화의 감소 기능)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기저에 깔려있던 씨족 조직이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그 후 갑자기 다른 군단 성원들 간의 싸움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계씨족이 유일한 중요사회 단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밖의 변화로 이제 호주 국민의 일부가 된 티위 사람들의 예술 활동이 주목 받기 시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여려가지 매체를 통해 춤, 조각, 칠공예, 창 모양 등 자신들의 문화와 예술을 알렸고 이것은 호주인의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1980년대 이후 ‘원주민의 권리 찾기’ 같은 운동들이 곳곳에서 일어나면서 (예: 호주 원주 민, 멕시코 원주민 등) 복원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지구상에 남아있는 순수 혈통의 티위 사람은 고작 3~4명 남짓일 뿐이다. 그리고 티위 사람들이 살던 멜빌 섬에서는 현재 더 이상 수렵 채집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제 7장> 티위에서의 현지 조사
이 장에서는 저자가 티위 마을에서 1928년~1929년 사이에 했던 현지 조사에 관해 주로 대화의 형식을 빌려 기술 하고 있다. 그 내용은 앞서 언급한 다른 장들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며, 굳이 다른 점이라면 저자의 주관적인 의견이 많다는 점과 대화 표현의 수단이 되는 단어의 선택이 자유롭다는 점, 그리고 위의 내용들의 세분화가 이루어진다는 점 등이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12.02.04
  • 저작시기2011.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27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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