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성리학의 심성론
2) 사상체질에 나타난 심성론
태양인
[신체적 특성]
[심성]
소양인
[신체적 특성]
[심성]
태음인
[신체적 특성]
[심성]
소음인
[신체적 특성]
[심성]
2) 사상체질에 나타난 심성론
태양인
[신체적 특성]
[심성]
소양인
[신체적 특성]
[심성]
태음인
[신체적 특성]
[심성]
소음인
[신체적 특성]
[심성]
본문내용
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19세기 무렵부터는 이미 사회는 부분적으로 근대화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심리적인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외적 압력에 의해서 사회의 개인화는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이념이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은 절대군주제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에서였다고 본다. 유교국가가 기본적으로 유교적 관료집단 그리고 유교적 교양층인 사대부를 특권계급화시키고 민중과 사대부의 차별에 입각한 정치였다면 새로운 정치라는 것은 보편적인 정치공동체로 모든 국민들을 포함하게 되는 그러한 정치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공화정의 형태를 취하지 않더라도 왕정의 실시로서도 그러한 목표는 도달될 수 있다. 그것은 왕도정치라고 말할 수 있다. 왕도정치의 이념은 백성들이 왕으로부터 동일한 사랑을 받는다는 환상 위에 기초한 개념이다. 따라서 왕도주의적 군주제의 이념은 유교적 권위주의보다도 더 근본적인 것이며 만일 이러한 이념이 철저히 이루어진다고 하면 이는 마치 종교개혁과도 같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이와 같은 예이다. 김옥균의 쿠데타도 마찬가지의 심리적 기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근대화의 심리를 위한 중요한 단계가 될 수 있다. 왕과 백성들 사이에 막힌 장벽을 제거하고 왕을 중심으로 하여 백성이 일체가 되는 심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같은 심리는 아직 개인심리(individual psychology)의 충분한 성숙이 전제된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들 사이에서 개인들의 결집을 전제로 하는 계약(pact)의 심리가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단계를 정치적으로 가장 선명하게 표현해 주는 단계가 바로 공화제의 단계이다. 이 계약은 일반의지라는 의제적인 아버지 혹은 신을 필요로 하였고 이의 표현자가 바로 공화제의 수장이다. 근대사회에서 대통령이란 바로 이같은 의지의 집합적 표현체이다.
계몽사상이란 이러한 개인심리의 성숙성이 광범위하게 확보되는 것을 전제로 한 사고이다. 그러나 개인심리는 집단심리와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집단심리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개인심리가 위협에 부딪혔을 때 다시금 집단심리로 퇴행한다. 일시적 퇴행이지만 이는 다시금 개인이 아이덴티티를 확립하여 에고의 통합성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하게 한다. 19세기의 민족주의와 낭만주의가 바로 이러한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 근대화가 어떠한 심성적 변화를 강요하였는가?
유교적 권위주의 하에서 양반 및 사대부들의 심리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유사 가부장적 심리이며 이는 농민 및 상공인들의 심리와는 구별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 왕조에서 끊임없이 논의되던 군신론은 바로 이러한 관계 속에서의 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화는 여하튼 이전에 국왕과 양반 사대부의 공동체로 표현될 수 있는 정치체를 전 국민적 정치체로 변환시키게 되었다. 이에 필요한 정치적 이론이 뒷받침되어야 하였다. 이른바 국민이라는 개념으로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창출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개인의식이 성장하지 않은 가운데 이러한 새로운 정치체가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제까지 개인적 의식보다는 가족적 의식 혹은 집단적 의식에 익숙한 사고가 이제는 곧바로 국민적 공동체라는 의식으로 전환되어야 하였다.
그러나 이 국민적 의식이란 개인적 의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야 하지만 사실 한국에 있어서는 국민적 의식이란 민족적 의식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게 되었다. 한국에 있어서 국민이란 무엇보다도 민족이었다. 이는 혈연을 같이하는 기본적으로는 종족적 문화적 공동체였다. 따라서 한국의 민족공동체는 '법의 공동체'라기 보다는 '피의 공동체'를 의미하였다. 특히 일제시기에 강조된 민족공동체는 바로 피의 공동체였다. 법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는 국민적 통합과 아울러 국민적 독립이 불가피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법에 피동적으로 종속 당해야 하는 입장에서 법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시기에 성장한 이같은 민족의식의 발달은 법의 공동체의 기저로서의 개인의식의 성장이라기보다는 민족이라는 피의 공동체를 확인하는 집단의식의 성장이었다.
따라서 일제시기 민족주의를 통한 근대화라고 하는 것은 독립된 법의 공동체를 찾기 위한 근대화 운동일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에서는 전근대적 공동체 유대를 새로 형성하고 강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해볼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심리상태에서 1920년대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서구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의 의식이 개인주의적인 바탕과 결부되어야 하였다. 시민사회적 기반이 마르크스와 결부된다면 마르크스주의는 결국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이론을 포기하고 시민사회적 틀에 복종하여야 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이론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주의는 아직 전근대적인 틀 속에서 말하자면 아직도 심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전근대적 유교적 정치공동체라는 정치적 틀이 완전히 깨지지 않은 상태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때문에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심리적인 부담 없이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이론을 받아들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우선 그 동안 그들이 길들여져 온 유교적 가부장적 심리에서 이탈하여야 하였으며 그렇기에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이 이러한 인륜체계로부터의 이탈을 의식적으로 선언하였지만 그것은 이들로부터 강한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다른 한편 무의식적으로 다른 어떠한 종류의 권위-그 권위란 전통적인 인륜적 권위 즉 아버지의 권위를 대신할만한 그러한 권위-로 이들을 지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전통적인 권위가 붕괴된 대신 이들은 보다 더 심정적으로는 절대적인 권위를 추구하였다. 그것은 인륜의 붕괴에 따른 보완적인 심리기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들의 아버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것이 공산당이었다. 그렇기에 마르크스 이론에 있어서의 전위당으로서의 공산당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관계는 한편으로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상처받은 자식의 관계를 닮아있다.
이같은 이념이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은 절대군주제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에서였다고 본다. 유교국가가 기본적으로 유교적 관료집단 그리고 유교적 교양층인 사대부를 특권계급화시키고 민중과 사대부의 차별에 입각한 정치였다면 새로운 정치라는 것은 보편적인 정치공동체로 모든 국민들을 포함하게 되는 그러한 정치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공화정의 형태를 취하지 않더라도 왕정의 실시로서도 그러한 목표는 도달될 수 있다. 그것은 왕도정치라고 말할 수 있다. 왕도정치의 이념은 백성들이 왕으로부터 동일한 사랑을 받는다는 환상 위에 기초한 개념이다. 따라서 왕도주의적 군주제의 이념은 유교적 권위주의보다도 더 근본적인 것이며 만일 이러한 이념이 철저히 이루어진다고 하면 이는 마치 종교개혁과도 같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이와 같은 예이다. 김옥균의 쿠데타도 마찬가지의 심리적 기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근대화의 심리를 위한 중요한 단계가 될 수 있다. 왕과 백성들 사이에 막힌 장벽을 제거하고 왕을 중심으로 하여 백성이 일체가 되는 심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같은 심리는 아직 개인심리(individual psychology)의 충분한 성숙이 전제된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들 사이에서 개인들의 결집을 전제로 하는 계약(pact)의 심리가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단계를 정치적으로 가장 선명하게 표현해 주는 단계가 바로 공화제의 단계이다. 이 계약은 일반의지라는 의제적인 아버지 혹은 신을 필요로 하였고 이의 표현자가 바로 공화제의 수장이다. 근대사회에서 대통령이란 바로 이같은 의지의 집합적 표현체이다.
계몽사상이란 이러한 개인심리의 성숙성이 광범위하게 확보되는 것을 전제로 한 사고이다. 그러나 개인심리는 집단심리와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집단심리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개인심리가 위협에 부딪혔을 때 다시금 집단심리로 퇴행한다. 일시적 퇴행이지만 이는 다시금 개인이 아이덴티티를 확립하여 에고의 통합성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하게 한다. 19세기의 민족주의와 낭만주의가 바로 이러한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 근대화가 어떠한 심성적 변화를 강요하였는가?
유교적 권위주의 하에서 양반 및 사대부들의 심리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유사 가부장적 심리이며 이는 농민 및 상공인들의 심리와는 구별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 왕조에서 끊임없이 논의되던 군신론은 바로 이러한 관계 속에서의 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화는 여하튼 이전에 국왕과 양반 사대부의 공동체로 표현될 수 있는 정치체를 전 국민적 정치체로 변환시키게 되었다. 이에 필요한 정치적 이론이 뒷받침되어야 하였다. 이른바 국민이라는 개념으로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창출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개인의식이 성장하지 않은 가운데 이러한 새로운 정치체가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제까지 개인적 의식보다는 가족적 의식 혹은 집단적 의식에 익숙한 사고가 이제는 곧바로 국민적 공동체라는 의식으로 전환되어야 하였다.
그러나 이 국민적 의식이란 개인적 의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야 하지만 사실 한국에 있어서는 국민적 의식이란 민족적 의식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게 되었다. 한국에 있어서 국민이란 무엇보다도 민족이었다. 이는 혈연을 같이하는 기본적으로는 종족적 문화적 공동체였다. 따라서 한국의 민족공동체는 '법의 공동체'라기 보다는 '피의 공동체'를 의미하였다. 특히 일제시기에 강조된 민족공동체는 바로 피의 공동체였다. 법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는 국민적 통합과 아울러 국민적 독립이 불가피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법에 피동적으로 종속 당해야 하는 입장에서 법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시기에 성장한 이같은 민족의식의 발달은 법의 공동체의 기저로서의 개인의식의 성장이라기보다는 민족이라는 피의 공동체를 확인하는 집단의식의 성장이었다.
따라서 일제시기 민족주의를 통한 근대화라고 하는 것은 독립된 법의 공동체를 찾기 위한 근대화 운동일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에서는 전근대적 공동체 유대를 새로 형성하고 강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해볼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심리상태에서 1920년대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서구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의 의식이 개인주의적인 바탕과 결부되어야 하였다. 시민사회적 기반이 마르크스와 결부된다면 마르크스주의는 결국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이론을 포기하고 시민사회적 틀에 복종하여야 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이론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주의는 아직 전근대적인 틀 속에서 말하자면 아직도 심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전근대적 유교적 정치공동체라는 정치적 틀이 완전히 깨지지 않은 상태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때문에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심리적인 부담 없이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이론을 받아들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우선 그 동안 그들이 길들여져 온 유교적 가부장적 심리에서 이탈하여야 하였으며 그렇기에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이 이러한 인륜체계로부터의 이탈을 의식적으로 선언하였지만 그것은 이들로부터 강한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다른 한편 무의식적으로 다른 어떠한 종류의 권위-그 권위란 전통적인 인륜적 권위 즉 아버지의 권위를 대신할만한 그러한 권위-로 이들을 지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전통적인 권위가 붕괴된 대신 이들은 보다 더 심정적으로는 절대적인 권위를 추구하였다. 그것은 인륜의 붕괴에 따른 보완적인 심리기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들의 아버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것이 공산당이었다. 그렇기에 마르크스 이론에 있어서의 전위당으로서의 공산당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관계는 한편으로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상처받은 자식의 관계를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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