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송대 과거와 유교적 전통
2. 송 초 황제 통치 시기의 과거
3. 제도의 개혁
4. 과거 응시자격의 감정
5. 직업상의 금지규정
6. 거주지의 조건
7. 품행의 감정
8. 개봉의 역할
2. 송 초 황제 통치 시기의 과거
3. 제도의 개혁
4. 과거 응시자격의 감정
5. 직업상의 금지규정
6. 거주지의 조건
7. 품행의 감정
8. 개봉의 역할
본문내용
증조의 보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이처럼 당시에는 품행단정을 중요시 하였고 그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내놓기까지 하였다,
8. 개봉의 역할
과거에서 공평과 공정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던 북송 초기 황제들의 정책에는 하나의 명백한 예외가 있었다. 개봉(開封)의 사인(士人)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었다. 무계획적으로 발전해온 대도시 개봉은 곧 번영을 누리고 있는 화북경제와 급속도로 발전하는 국민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군사적으로 전국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처럼 과거와 관료정치도 장악했다. 개봉은 국자감과 같이 확실히 황제의 은혜를 수시로 받고 있었으며, 이것은 그들이 과거에서 행운의 기회를 차지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황제의 은혜 이외에도 경사가 과거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곳에 갖추어진 교육의 질량, 특히 많은 시험관이 자리 잡고 있는 사회 환경 속에서만 진행될 수 있었던 과거시험 준비와 같은 직접적으로는 실감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있었다. 또한 사마광은 개봉에 유학하지 않는 자는 시, 부, 논, 책을 잘 지을 수 없었다고 하면서 이러한 이유로 사방의 학자는 모두 향리를 버리고 두 부모를 떠나 개봉에서 늙어가며 다시 돌아가지 않는 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마광이 이를 계산해놓은 것을 보면 북방과 서남 및 원남지역에는 단지 1/30 혹은 그보다 적은 비율로 당시의 과거에서 진사합격을 획득하고 있는데 반해, 개봉과 국자감에서의 비율은 1/6에서부터 1/4까지로 되어 있다. 이처럼 개봉은 많은 학자들이 과거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곳으로 송대에서 그 역할이 중요하였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개봉에 들어가기 쉬웠던 것은 아니였다. 국자감과 개봉부시는 주로 관료의 친척이 참가하고 있었는데 1042년 이전에 국자감은 어떤 관료의 자손이라도 모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학교가 아니라 7품 이상 경조관의 자손을 배양하는 학교였다. 약 70년 후에는 국자감이 과거시험 때만 천 명에 달하는 많은 학자가 들어왔다가 그 후에는 자취를 감추는 장소로 되고 있다고 개혁가들이 말할 정도로 그 인기가 대단하였다. 심지어는 7품 이상 관료의 친척이라고 거짓 주장하면서 참가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이러한 상황을 바로 잡으려는 목적으로 정부는 1042년에 평민과 하급관료가정 출신자들을 위하여 사문학을 건립했는데 매년 실시되는 입학시험인 보시를 통하여 입학자격이 결정되었다. 사문학은 1044년에는 태학으로 대체되었고, 태학은 곧 경사에서 첫째가는 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국자’라고 하는 범주는 여전히 고급관료의 자손을 위해 보존되고 있었는데, 어떤 때는 국자학의 학생으로서, 또 어떤 때에는 태학에 입학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집단으로서 받아들여졌다.
개봉부시는 세 종류의 사인들이 이용하였다. 개봉의 순수한 토착가정 출신 사인, 정치상의 이유 때문에 개봉에 와서 그 곳에 정착하여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가정출신의 사인 그리고 과거 때문에 개봉으로 들어온 사인들이 세 번째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이렇게 국자감과 개봉에서의 과거 합격 비율이 높게 나타나면서 그들만의 역할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에 따른 영향으로 많은 인재들을 골고루 배출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태학을 창설했는데 태학의 창설은 미천한 출신의 사인이 경사의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 이후 상당히 팽창한 태학이 국내 일류의 학교로 되어 각지의 학생들이 진학목표로 삼게 되는 하나의 추세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11세기 말 태학이 더욱 중요하게 되면서 개봉부시의 중요성은 그만큼 하락하게 되었다.
8. 개봉의 역할
과거에서 공평과 공정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던 북송 초기 황제들의 정책에는 하나의 명백한 예외가 있었다. 개봉(開封)의 사인(士人)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었다. 무계획적으로 발전해온 대도시 개봉은 곧 번영을 누리고 있는 화북경제와 급속도로 발전하는 국민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군사적으로 전국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처럼 과거와 관료정치도 장악했다. 개봉은 국자감과 같이 확실히 황제의 은혜를 수시로 받고 있었으며, 이것은 그들이 과거에서 행운의 기회를 차지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황제의 은혜 이외에도 경사가 과거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곳에 갖추어진 교육의 질량, 특히 많은 시험관이 자리 잡고 있는 사회 환경 속에서만 진행될 수 있었던 과거시험 준비와 같은 직접적으로는 실감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있었다. 또한 사마광은 개봉에 유학하지 않는 자는 시, 부, 논, 책을 잘 지을 수 없었다고 하면서 이러한 이유로 사방의 학자는 모두 향리를 버리고 두 부모를 떠나 개봉에서 늙어가며 다시 돌아가지 않는 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마광이 이를 계산해놓은 것을 보면 북방과 서남 및 원남지역에는 단지 1/30 혹은 그보다 적은 비율로 당시의 과거에서 진사합격을 획득하고 있는데 반해, 개봉과 국자감에서의 비율은 1/6에서부터 1/4까지로 되어 있다. 이처럼 개봉은 많은 학자들이 과거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곳으로 송대에서 그 역할이 중요하였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개봉에 들어가기 쉬웠던 것은 아니였다. 국자감과 개봉부시는 주로 관료의 친척이 참가하고 있었는데 1042년 이전에 국자감은 어떤 관료의 자손이라도 모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학교가 아니라 7품 이상 경조관의 자손을 배양하는 학교였다. 약 70년 후에는 국자감이 과거시험 때만 천 명에 달하는 많은 학자가 들어왔다가 그 후에는 자취를 감추는 장소로 되고 있다고 개혁가들이 말할 정도로 그 인기가 대단하였다. 심지어는 7품 이상 관료의 친척이라고 거짓 주장하면서 참가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이러한 상황을 바로 잡으려는 목적으로 정부는 1042년에 평민과 하급관료가정 출신자들을 위하여 사문학을 건립했는데 매년 실시되는 입학시험인 보시를 통하여 입학자격이 결정되었다. 사문학은 1044년에는 태학으로 대체되었고, 태학은 곧 경사에서 첫째가는 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국자’라고 하는 범주는 여전히 고급관료의 자손을 위해 보존되고 있었는데, 어떤 때는 국자학의 학생으로서, 또 어떤 때에는 태학에 입학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집단으로서 받아들여졌다.
개봉부시는 세 종류의 사인들이 이용하였다. 개봉의 순수한 토착가정 출신 사인, 정치상의 이유 때문에 개봉에 와서 그 곳에 정착하여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가정출신의 사인 그리고 과거 때문에 개봉으로 들어온 사인들이 세 번째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이렇게 국자감과 개봉에서의 과거 합격 비율이 높게 나타나면서 그들만의 역할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에 따른 영향으로 많은 인재들을 골고루 배출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태학을 창설했는데 태학의 창설은 미천한 출신의 사인이 경사의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 이후 상당히 팽창한 태학이 국내 일류의 학교로 되어 각지의 학생들이 진학목표로 삼게 되는 하나의 추세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11세기 말 태학이 더욱 중요하게 되면서 개봉부시의 중요성은 그만큼 하락하게 되었다.
추천자료
현실과 만난 철학
왕안석의 개혁(신법)에 대하여
광서 장족 자치구 지역조사
성리학의 아이디어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
조선의 성리학적 교육사관 & 나의 견해
한국의 사회복지정책의 역사적 과정
취옹정기(醉翁亭記)
[유학][유학사상][신유학사상]삼국시대의 유학(유학사상), 신라시대의 유학(유학사상), 주희...
조선시대 성리학과 교육사상에 대한 나의 생각
[유학의 개념][유학의 역사][신유학의 형성][신유학의 관점][신유학의 영향][신유학의 이학적...
조선시대의 교육 -시험문화의 고조
[사학과] 중국 청 말 근대교육제도의 도입 {청 말 지식인들의 근대교육체제의 모색, 근대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