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시대적 특징
2. 성리학과 교육
3. 조선시대의 학교교육
4. 조선시대 교육의 실상
5. 실학자들의 교육개혁론
6. 조선시대 교육 읽기
2. 성리학과 교육
3. 조선시대의 학교교육
4. 조선시대 교육의 실상
5. 실학자들의 교육개혁론
6. 조선시대 교육 읽기
본문내용
은 앞서 언급했던 조선시대의 교육현실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이는 곧 유형원이 당시 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상당한 통찰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형원이 이와 같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한 대안은 바로 공거제였다. 공거제란 과거제처럼 시험을 통해서 관리를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교육을 통해 양성한 인재를 시험 없이 추천(천거)으로써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였다. 이것은 지금의 학교장 추천제와 유사한 제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공거제는 학교교육을 토대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학교 제도의 확충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주장한 학제는 다음과 같다.
(중앙) 방상 -> 사학 -> 중학
-> 태학
(지방) 향상 -> 읍학 -> 영학
유형원이 제시한 학제에서는 종전의 학제와는 달리 학교간의 위계성 및 계열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공거제가 일련의 학교교육만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각 단계마다 철저하게 학생들을 걸러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학제개혁안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초등학교라 할 수 있는 방상과 향상의 설치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들의 정원을 제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보편화되어 있었던 서당교육을 초등 관학으로 흡수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으며, 특히 정원을 개방한 것은 초등교육 기회의 확대를 염두에 둔 데 따른 것이라고 보여진다. 또한 학교교육의 성패는 교사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고 당시 천시되었던 교관에 대한 인식 제고와 사학에 전임 교관 배치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지방교관의 경우 가족을 거느리고 갈 수 있도록 배려함과 동시에 임기가 찬 후에는 근무성적을 평가하여 승진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유형원이 제시한 학교제도는 유교경전의 하나인<예기>의 내용과 유사하다. 이는 곧 그의 교육개혁안이 유교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이후부터는 "선비"와 "서인"을 구분해야 되기 때문에 서민은 더 이상 교육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역시 각 신분차별 관념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이익의 교육개혁론
이는 조선시대 과거 위주 교육으로 인해 나타나는 대표적 병폐들, 즉 암기 위주의 공부, 요행심을 자극하는 과거시험 방식, 요령 위주의 학습으로 인한 학력저하 등의 세태를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요행" 운운한 것은 곧 당시에 초집을 통한 과거준비 행태를 비판한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문제인식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첫째, 3년마다 치러지는 과거시험을 5년으로 연장시킬 것
둘째, 과거시험 절차의 개혁을 주장
즉, 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시험을 실시하되 ① 1단계에서는 사장시험을 통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1,000여 명을 선발하고, ② 2단계에서는 서울의 성균관과 사학에서 이들을 대상으로 해마다 경서와 사서 시험을 통해 수백 명을 선발하며, ③ 3단계에서는 이들 합격자를 대상으로 정치적 안목을 시험하는 책문을 통해 몇 명을 관리로 뽑고, 나머지는 '진사'로 호칭하되 그 재능에 따라 차례로 관직에 등용하자는 주장을 폈다.
이익이 이상적으로 여긴 인재선발양식은 천거제라 할 수 있는 향거리선제였다. 해당 지방의 관리가 직접 관찰할 수 있게 되고, 실제로 학식과 도덕성을 기준으로 추천하게 되므로 학생들이 열심히 학업과 수양을 쌓음으로써 종전과 같은 안일한 학업태도를 일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리 혁신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없었다. 과거제 개선안은 부분적인 보완책일 뿐이며, 그가 이상적으로 여겼던 향거리선제는 재탕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경서와 사서에 대한 학습을 통해 학생들의 도덕성이 제고될 것이라는 사고방식 역시 구태의 연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익 교육사상의 혁신성은 천인에게도 과거응시를 허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곧 천인에게도 학교교육의 기회를 개방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3) 박제가의 교육개혁론
박제가는 국가제도 중 개혁이 가장 시급한 것이 바로 과거제도라고 보고, 당시의 과거제도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ㄱ하고 있다. 그 중 중요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과거의 종류가 지나치게 많고, 너무 자주 실시되고 있다는 점을 비판. 이것은 그가 특히 별시가 중심이 되었던 비정기 시험의 폐해를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② 과거를 자주 실시함으로써 합격자가 국가에서 수용할 수 있는 인원보다 너무 많게 됨을 비판하였다.
박제가는 과거제도 개선책으로서 중국의 과거제도를 참고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곧 과거제도 자체에 대한 혁신안이라기보다는 단지 운영방법상의 개선안을 제시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주목할만한 것은 중국의 선발방식을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과거제도 개혁론은 당시의 교육현실을 개선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는 과거가 당시 교육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는 것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6. 조선시대 교육 읽기
조선시대 교육의 실상은 오늘날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입시 중심의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병폐들, 즉 제도교육의 불신, 사교육의 선호, 암기위주의 학습, 도덕교육의 소홀, 예상문제집의 범람 등의 현상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조선시대 교육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물론 조선시대 교육이 과거공부 일색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에를 들어 사림 집단처럼 순수하게 성리학을 연구하고 이를 토대로 심신 수양을 추구한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과거공부를 위주로 했던 부류와 성리학 연구 및 인격수양을 목적으로 했던 부류가 공존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당시에는 과연 어느 쪽이 대세였는가?
결국 조선시대 교육과 현대 한국교육은 닮은꼴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교육현실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있어서도 두 시대는 닮은 점이 있다. 즉,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교육개혁 사상이나 오늘날의 교육개혁론은 주로 시험제도의 개선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유형원이 이와 같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한 대안은 바로 공거제였다. 공거제란 과거제처럼 시험을 통해서 관리를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교육을 통해 양성한 인재를 시험 없이 추천(천거)으로써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였다. 이것은 지금의 학교장 추천제와 유사한 제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공거제는 학교교육을 토대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학교 제도의 확충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주장한 학제는 다음과 같다.
(중앙) 방상 -> 사학 -> 중학
-> 태학
(지방) 향상 -> 읍학 -> 영학
유형원이 제시한 학제에서는 종전의 학제와는 달리 학교간의 위계성 및 계열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공거제가 일련의 학교교육만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각 단계마다 철저하게 학생들을 걸러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학제개혁안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초등학교라 할 수 있는 방상과 향상의 설치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들의 정원을 제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보편화되어 있었던 서당교육을 초등 관학으로 흡수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으며, 특히 정원을 개방한 것은 초등교육 기회의 확대를 염두에 둔 데 따른 것이라고 보여진다. 또한 학교교육의 성패는 교사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고 당시 천시되었던 교관에 대한 인식 제고와 사학에 전임 교관 배치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지방교관의 경우 가족을 거느리고 갈 수 있도록 배려함과 동시에 임기가 찬 후에는 근무성적을 평가하여 승진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유형원이 제시한 학교제도는 유교경전의 하나인<예기>의 내용과 유사하다. 이는 곧 그의 교육개혁안이 유교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이후부터는 "선비"와 "서인"을 구분해야 되기 때문에 서민은 더 이상 교육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역시 각 신분차별 관념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이익의 교육개혁론
이는 조선시대 과거 위주 교육으로 인해 나타나는 대표적 병폐들, 즉 암기 위주의 공부, 요행심을 자극하는 과거시험 방식, 요령 위주의 학습으로 인한 학력저하 등의 세태를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요행" 운운한 것은 곧 당시에 초집을 통한 과거준비 행태를 비판한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문제인식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첫째, 3년마다 치러지는 과거시험을 5년으로 연장시킬 것
둘째, 과거시험 절차의 개혁을 주장
즉, 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시험을 실시하되 ① 1단계에서는 사장시험을 통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1,000여 명을 선발하고, ② 2단계에서는 서울의 성균관과 사학에서 이들을 대상으로 해마다 경서와 사서 시험을 통해 수백 명을 선발하며, ③ 3단계에서는 이들 합격자를 대상으로 정치적 안목을 시험하는 책문을 통해 몇 명을 관리로 뽑고, 나머지는 '진사'로 호칭하되 그 재능에 따라 차례로 관직에 등용하자는 주장을 폈다.
이익이 이상적으로 여긴 인재선발양식은 천거제라 할 수 있는 향거리선제였다. 해당 지방의 관리가 직접 관찰할 수 있게 되고, 실제로 학식과 도덕성을 기준으로 추천하게 되므로 학생들이 열심히 학업과 수양을 쌓음으로써 종전과 같은 안일한 학업태도를 일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리 혁신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없었다. 과거제 개선안은 부분적인 보완책일 뿐이며, 그가 이상적으로 여겼던 향거리선제는 재탕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경서와 사서에 대한 학습을 통해 학생들의 도덕성이 제고될 것이라는 사고방식 역시 구태의 연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익 교육사상의 혁신성은 천인에게도 과거응시를 허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곧 천인에게도 학교교육의 기회를 개방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3) 박제가의 교육개혁론
박제가는 국가제도 중 개혁이 가장 시급한 것이 바로 과거제도라고 보고, 당시의 과거제도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ㄱ하고 있다. 그 중 중요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과거의 종류가 지나치게 많고, 너무 자주 실시되고 있다는 점을 비판. 이것은 그가 특히 별시가 중심이 되었던 비정기 시험의 폐해를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② 과거를 자주 실시함으로써 합격자가 국가에서 수용할 수 있는 인원보다 너무 많게 됨을 비판하였다.
박제가는 과거제도 개선책으로서 중국의 과거제도를 참고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곧 과거제도 자체에 대한 혁신안이라기보다는 단지 운영방법상의 개선안을 제시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주목할만한 것은 중국의 선발방식을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과거제도 개혁론은 당시의 교육현실을 개선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는 과거가 당시 교육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는 것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6. 조선시대 교육 읽기
조선시대 교육의 실상은 오늘날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입시 중심의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병폐들, 즉 제도교육의 불신, 사교육의 선호, 암기위주의 학습, 도덕교육의 소홀, 예상문제집의 범람 등의 현상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조선시대 교육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물론 조선시대 교육이 과거공부 일색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에를 들어 사림 집단처럼 순수하게 성리학을 연구하고 이를 토대로 심신 수양을 추구한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과거공부를 위주로 했던 부류와 성리학 연구 및 인격수양을 목적으로 했던 부류가 공존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당시에는 과연 어느 쪽이 대세였는가?
결국 조선시대 교육과 현대 한국교육은 닮은꼴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교육현실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있어서도 두 시대는 닮은 점이 있다. 즉,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교육개혁 사상이나 오늘날의 교육개혁론은 주로 시험제도의 개선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