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축. 1946.2.8 단독정권 성격을 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선출
o 군정초기 미국은 단정구상에 대해 거부적이었고, 이승만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면서 정국에서 배제시키려는 구상도 가짐
- 반공 지향적, 대중인기도 많기에 초기에는 남한의 정치적 통합을 주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그와의 연대를 모색하였지만 미군정의 정국운용의 틀을 벗어나 훼손시키려함
o 미국은 여러 옵션으로서 단정구상을 계획
- 미국의 전략과 현지 상황, 즉 소련을 봉쇄한다는 다양한 대안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승만의 단정론이 미군정의 단정수립 계획에 기여한 점은 대단히 중요
o 이승만이 친일파에 대해 유화적 자세를 취한 이유
- 김구 지지 세력, 좌우합작세력, 특히 공산세력과의 정권투쟁을 위한 세력 확장
- 한민당의 인적구성이 다소 친일성향을 띠고 있지만, 유능한 인적자원과 풍부한 물적자원을 구비한 유일한 보수정당
- 미군정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음으로써 한민당 출신이 미군정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승만으로서는 한민당이 자신과 미군정 간의 연결고리 역할 수행할 것으로 판단
- 한민당은 과거 친일행위를 했던 치명적 약점을 희석 또는 은폐시킬 수 있는 대외적 명분이 필요할 무렵 이승만과의 관계에서 그 명분을 찾으려 했음
o 한민당과의 연합으로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강화되자 단정수립을 본격화 추진
- 1947.3.12 트루만 독트린으로 냉전시작을 의미함
- 중국내전의 양상이 국민당 약세로 돌아섬에 따라 미국정책집행자들은 통일정부 수립보다 단독 정부 아래서 확고한 반공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안전한 대안이라 생각
- 이승만은 반공, 반소, 반탁 노선을 주장함으로써 해방이후 고립되고 분산된 한국사회 내의 보수세력들에게 좌익에 대한 역공세의 명분을 제공하고 미군정의 반공 및 소련봉쇄정책에 결정적 기여
■ 미소공동위원회 결렬과 한국문제 UN 이관
o 위원회 결렬은 협의 대상이 문제였지만, 한반도가 상대국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미소 양국 모두가 기피한 채 각기 한반도가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려고 했기 때문임
o UN 이관
- 대소봉쇄정책인 트루만독트린 하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낮게 평가되면서 한국에서 군정을 통해 지원하는 비용에 대한 부담을 덜고자 함
-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인의 미군정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고조/좌우익의 대립으로 혼미를 거듭함에 따라 미국은 한반도에서 위신을 세우면서 벗어나려는 탈한 정책을 강구
o UN 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설치
- 위원단 감시 하에 인구비례에 따라 보통선거, 비밀투표에 의한 총선거 실시
- 선거후 조기에 제헌의회 구성하여 정부 수립
- 이 정부는 남북한 군정당국으로부터 정부기능을 이양 받고, 자체의 국방군 조직하며, 가능하면 90일 이내 점령군 철수
⇒소련의 협조 없이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는 우익의 승리를 의미하며 소련에 비우호적 정부수립을 의미하기 때문임
o 이승만의 단정수립이 결실을 보는 계기
- 미국으로서는 이른바 중도세력 중심의 임시정부 수립의 꿈을 완전히 버리고 이승만을 통해 미국의 이해관계를 추구할 수 있게 됨
■ 5.10선거와 정부 수립
o 이승만과 한민당 단정파 세력
- 이승만의 반공노선은 보수세력의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 자유민주주의 전통이 미약했던 사상전에서 유일한 무기가 됨
o 김구와 김규식 등의 남북협상 세력
o 좌익세력
- 선거반대 총력전 양상
- 무장게릴라를 통한 비합법적 무장투쟁 감행
o 결과
- 7.17 헌법 공포, 24일 이승만 대통령 당선, 8.12 미국의 정부 승인, 8.15 정부수립
o 군정초기 미국은 단정구상에 대해 거부적이었고, 이승만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면서 정국에서 배제시키려는 구상도 가짐
- 반공 지향적, 대중인기도 많기에 초기에는 남한의 정치적 통합을 주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그와의 연대를 모색하였지만 미군정의 정국운용의 틀을 벗어나 훼손시키려함
o 미국은 여러 옵션으로서 단정구상을 계획
- 미국의 전략과 현지 상황, 즉 소련을 봉쇄한다는 다양한 대안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승만의 단정론이 미군정의 단정수립 계획에 기여한 점은 대단히 중요
o 이승만이 친일파에 대해 유화적 자세를 취한 이유
- 김구 지지 세력, 좌우합작세력, 특히 공산세력과의 정권투쟁을 위한 세력 확장
- 한민당의 인적구성이 다소 친일성향을 띠고 있지만, 유능한 인적자원과 풍부한 물적자원을 구비한 유일한 보수정당
- 미군정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음으로써 한민당 출신이 미군정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승만으로서는 한민당이 자신과 미군정 간의 연결고리 역할 수행할 것으로 판단
- 한민당은 과거 친일행위를 했던 치명적 약점을 희석 또는 은폐시킬 수 있는 대외적 명분이 필요할 무렵 이승만과의 관계에서 그 명분을 찾으려 했음
o 한민당과의 연합으로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강화되자 단정수립을 본격화 추진
- 1947.3.12 트루만 독트린으로 냉전시작을 의미함
- 중국내전의 양상이 국민당 약세로 돌아섬에 따라 미국정책집행자들은 통일정부 수립보다 단독 정부 아래서 확고한 반공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안전한 대안이라 생각
- 이승만은 반공, 반소, 반탁 노선을 주장함으로써 해방이후 고립되고 분산된 한국사회 내의 보수세력들에게 좌익에 대한 역공세의 명분을 제공하고 미군정의 반공 및 소련봉쇄정책에 결정적 기여
■ 미소공동위원회 결렬과 한국문제 UN 이관
o 위원회 결렬은 협의 대상이 문제였지만, 한반도가 상대국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미소 양국 모두가 기피한 채 각기 한반도가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려고 했기 때문임
o UN 이관
- 대소봉쇄정책인 트루만독트린 하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낮게 평가되면서 한국에서 군정을 통해 지원하는 비용에 대한 부담을 덜고자 함
-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인의 미군정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고조/좌우익의 대립으로 혼미를 거듭함에 따라 미국은 한반도에서 위신을 세우면서 벗어나려는 탈한 정책을 강구
o UN 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설치
- 위원단 감시 하에 인구비례에 따라 보통선거, 비밀투표에 의한 총선거 실시
- 선거후 조기에 제헌의회 구성하여 정부 수립
- 이 정부는 남북한 군정당국으로부터 정부기능을 이양 받고, 자체의 국방군 조직하며, 가능하면 90일 이내 점령군 철수
⇒소련의 협조 없이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는 우익의 승리를 의미하며 소련에 비우호적 정부수립을 의미하기 때문임
o 이승만의 단정수립이 결실을 보는 계기
- 미국으로서는 이른바 중도세력 중심의 임시정부 수립의 꿈을 완전히 버리고 이승만을 통해 미국의 이해관계를 추구할 수 있게 됨
■ 5.10선거와 정부 수립
o 이승만과 한민당 단정파 세력
- 이승만의 반공노선은 보수세력의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 자유민주주의 전통이 미약했던 사상전에서 유일한 무기가 됨
o 김구와 김규식 등의 남북협상 세력
o 좌익세력
- 선거반대 총력전 양상
- 무장게릴라를 통한 비합법적 무장투쟁 감행
o 결과
- 7.17 헌법 공포, 24일 이승만 대통령 당선, 8.12 미국의 정부 승인, 8.15 정부수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