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대해 그 반대의 개념으로 비물리적이라는 특성을 취할 때에는 물리적인 것의 반대되는 특성을 얘기합니다. 하지만 물리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한 비물리적이라는 특성이 도출 된다면 필연적으로 ‘비물리성’ 또한 물리적입니다. ‘이것은 이러하니까 저것은 이러하지 않다’라는 결론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존재를 확인 할 수 없는 우리가 흔히 ‘비물리적이다’라고 구별 짓는 초월적 대상에 대해 인간의 이성과 감각경험만으로 생각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부분에 대해 우리가 초월적인 대상이라고 인식하는 것조차 인식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 라고 반문 할 수 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에서는 인식의 한계 너머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지 냉철한 잣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기초로 우리의 상상력이란 끊임없이 초월적인 존재를 향한 욕망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는 내부로 때로는 외부로 향하기도 하며, 채워질 수 없으며 소멸과 창조를 반복하는 그러한 욕망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보려고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기억조차 우리의 의지, 생각, 사고에 의해 조작 될 수 있음을 느끼며, 우리는 늘 상상해 왔던 것을 물리세계에 실현시켜왔음을 역사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조각상을 사랑하는 조각가가 자신의 특정한 하나의 조각상이라는 대상에 대해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조각가는 그 조각상의 모습을 끊임없이 변화시켰으며, 결국 그 조각상의 모습은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것은 신화속의 이야기 이지만 이것에 비유해 보자면 인간이라는 각각의 개체는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조각하고자 하는 조각가입니다. 하지만 하나의 개체는 너무 작기에 세상을 조각할 수는 없으나, 각각의 개체의 그러한 염원이 모였을 때의 그 존재가 세상을 조각한다. 즉, 세상은 인간의 힘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저는 이러한 제 생각에 대해서 그러한 염원이 어떤 형태를 가진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 것이고, 과연 그것이 있다고 증명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 무엇 하나 대답 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정신은 영혼을 포함하는 개념이며, 그것은 비물리적인 것이다.’라고 말 할 때 비물리적인것은 물리적인 것의 반대개념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어떠한 존재인데, 우리가 그것을 규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규정할 수 없더라도 믿음을 가질 수는 있다는 것과, 그러한 믿음이 맹목적인 믿음과는 다르다는 점을 말하며, 이러한 비물리적이라는 것은 신체와는 다른 영혼이 가지는 특성인데, 이때의 영혼은 신체와 다른 실제로서 존재하는 것 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염원,(이 부분은 영혼을 설명할 것이 아니라 정신이라고 말했다면 더 쉬웠을지 모르겠으나 ‘정신이다.’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인간이라는 물리적실제로부터 존재하는 초월적 실재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고 할 뿐입니다. 이것에 대한 판단은 개인의 판단으로 돌림으로서, 근거를 제시해야할 의무로부터 자유로워 지고자합니다.
< 후기 >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이성의 열매를 획득함으로서 죄를 지었다는 부분은 예수가 되었든 성경을 쓴 사람이 되었든 그 사람은 대단한 사상가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이성을 획득한 인간, 그러한 인간의 역사가 지금까지 쓰여 왔습니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 인간의 역사는 아주 극히 일부분 써졌을 뿐이지만, 꽤나 격동적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본능적으로 인식한 두려움을 바탕으로 알고자 하였고, 알고자 하는 욕망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내, 외부에 걸쳐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인간 스스로를 생각해 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소멸하고 생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획득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속성 때문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유전적 특성은 변하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종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여만 할 것입니다. 인간의 신체를 보자면 뇌구조가 변화하며, 죽은 세포는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세포가 생겨납니다. 정신을 보자면 우리는 끊임없이 내부와 외부로부터 정보를 수용함으로서 의식구조의 변화를 느끼게 됩니다. ‘내가 더 이상 어린아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어린아이였음을 잊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종’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종의 특성 때문에 외부기억에 의존하게 되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도시란 하나의 거대한 외부기억장치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 속 수많은 위인들은 어쩌면 자기 자신이 주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없었기에 영원히 타인 속에 각인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가치를 위한 삶을 선택한 사람들일 수 있으며, 세상에 수많은 건축물로서 존재하는 유적들과 마찬가지로 높은 건물을 지상에 건축하는 것은 그러한 기억장치에 의존하여 우리 인간이라는 종이 이 땅에 존재했음을 알리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전자문서라는 효율적인 수단을 두고도 아직도 종이에 의존하는 것은 전자문서(전자적 정보)라는 것은 쉽게 생성되고 소멸함으로, 인간의 특성과 닮은꼴이기에 상대적으로 아날로그방식인 종이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사실 무의미 할지라도 우리는 그러한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하고 생각해 봅니다.
인간은 참으로 슬픈 존재 일 것입니다. 타인과 외부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밖에 없음에도 그러한 타인의 시선에 두려움을 느끼는, 완벽한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지만 결과적으로 선택에서의 자유만을 획득한 체 끊임없는 책임이 부과되는 삶을 살게 되는, 하지만 그러한 운명에 앞서 우리는 욕망하기에 이 모든 굴레 앞에서 자유를 획득하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생각을 기초로 우리의 상상력이란 끊임없이 초월적인 존재를 향한 욕망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는 내부로 때로는 외부로 향하기도 하며, 채워질 수 없으며 소멸과 창조를 반복하는 그러한 욕망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보려고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기억조차 우리의 의지, 생각, 사고에 의해 조작 될 수 있음을 느끼며, 우리는 늘 상상해 왔던 것을 물리세계에 실현시켜왔음을 역사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조각상을 사랑하는 조각가가 자신의 특정한 하나의 조각상이라는 대상에 대해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조각가는 그 조각상의 모습을 끊임없이 변화시켰으며, 결국 그 조각상의 모습은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것은 신화속의 이야기 이지만 이것에 비유해 보자면 인간이라는 각각의 개체는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조각하고자 하는 조각가입니다. 하지만 하나의 개체는 너무 작기에 세상을 조각할 수는 없으나, 각각의 개체의 그러한 염원이 모였을 때의 그 존재가 세상을 조각한다. 즉, 세상은 인간의 힘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저는 이러한 제 생각에 대해서 그러한 염원이 어떤 형태를 가진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 것이고, 과연 그것이 있다고 증명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 무엇 하나 대답 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정신은 영혼을 포함하는 개념이며, 그것은 비물리적인 것이다.’라고 말 할 때 비물리적인것은 물리적인 것의 반대개념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어떠한 존재인데, 우리가 그것을 규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규정할 수 없더라도 믿음을 가질 수는 있다는 것과, 그러한 믿음이 맹목적인 믿음과는 다르다는 점을 말하며, 이러한 비물리적이라는 것은 신체와는 다른 영혼이 가지는 특성인데, 이때의 영혼은 신체와 다른 실제로서 존재하는 것 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염원,(이 부분은 영혼을 설명할 것이 아니라 정신이라고 말했다면 더 쉬웠을지 모르겠으나 ‘정신이다.’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인간이라는 물리적실제로부터 존재하는 초월적 실재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고 할 뿐입니다. 이것에 대한 판단은 개인의 판단으로 돌림으로서, 근거를 제시해야할 의무로부터 자유로워 지고자합니다.
< 후기 >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이성의 열매를 획득함으로서 죄를 지었다는 부분은 예수가 되었든 성경을 쓴 사람이 되었든 그 사람은 대단한 사상가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이성을 획득한 인간, 그러한 인간의 역사가 지금까지 쓰여 왔습니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 인간의 역사는 아주 극히 일부분 써졌을 뿐이지만, 꽤나 격동적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본능적으로 인식한 두려움을 바탕으로 알고자 하였고, 알고자 하는 욕망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내, 외부에 걸쳐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인간 스스로를 생각해 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소멸하고 생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획득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속성 때문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유전적 특성은 변하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종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여만 할 것입니다. 인간의 신체를 보자면 뇌구조가 변화하며, 죽은 세포는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세포가 생겨납니다. 정신을 보자면 우리는 끊임없이 내부와 외부로부터 정보를 수용함으로서 의식구조의 변화를 느끼게 됩니다. ‘내가 더 이상 어린아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어린아이였음을 잊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종’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종의 특성 때문에 외부기억에 의존하게 되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도시란 하나의 거대한 외부기억장치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 속 수많은 위인들은 어쩌면 자기 자신이 주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없었기에 영원히 타인 속에 각인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가치를 위한 삶을 선택한 사람들일 수 있으며, 세상에 수많은 건축물로서 존재하는 유적들과 마찬가지로 높은 건물을 지상에 건축하는 것은 그러한 기억장치에 의존하여 우리 인간이라는 종이 이 땅에 존재했음을 알리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전자문서라는 효율적인 수단을 두고도 아직도 종이에 의존하는 것은 전자문서(전자적 정보)라는 것은 쉽게 생성되고 소멸함으로, 인간의 특성과 닮은꼴이기에 상대적으로 아날로그방식인 종이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사실 무의미 할지라도 우리는 그러한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하고 생각해 봅니다.
인간은 참으로 슬픈 존재 일 것입니다. 타인과 외부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밖에 없음에도 그러한 타인의 시선에 두려움을 느끼는, 완벽한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지만 결과적으로 선택에서의 자유만을 획득한 체 끊임없는 책임이 부과되는 삶을 살게 되는, 하지만 그러한 운명에 앞서 우리는 욕망하기에 이 모든 굴레 앞에서 자유를 획득하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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