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생애와 그의 실학사상에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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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연암의 생애
3. 연암의 사상
4. 연암의 문학 성향
5. 연암의 문학 작품
6. 연암의 청문화 인식
7. 맺음말

본문내용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본래의 약점인 믿음성의 결여 즉, 의심하는 마음을 지적함으로서 속물(俗物)화된 인간 내부의 속성을 풍자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가지 더 지적할 점은 약방주인이 비록 광문을 의심하였지만 뒤에 잘못을 깨닫고 광문에게 사과를 시킴으로써 풍자의 본래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개선의 목적까지 이르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광문은 소리도 아주 잘하여 장안의 이름난 기생들은 그의 소리에 맞추어서만 춤을 추었다. 그러나 지위가 높다는 양반들은 그의 겉모양 새만 보고 이름난 기생들의 춤을 보려고 하면서도 광문의 출현을 좋지 않게 여겨 그를 두들겨 몰아내려 하였다.
6. 연암의 청문화 인식
1. 청문화의 조류를 파악하는데 애썼다.
열하일기의 〈황도기략 黃圖記略〉은 연경에서 관광한 문물, 제도 등을 39항목으로 나누어 그 내력과 전해오는 말들을 곁들여서 기록한 것이다. 연암은 언제 어디서나 선비와 장사치를 가리지 않고 교류하며 필담을 통 해 선진문화의 조류를 파악하려 애썼다.
2. 상업을 권장하고 화폐의 사용을 강조
상공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화폐제도와 교통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폐제도가 제대로 확립되어야 상업이 원활해지고, 교통이 발달해야 재화의 이동이 자유로워져 자급자족의 경제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지원의 이러한 주장들은 근대 경제 이론과도 통하는 것이다.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돈이 많다고 경제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경제를 뒷받침하고 운영할 만한 기반들이 있어야 경제가 튼튼해지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3. 관개, 수리와 같은 농업기술
농업에서도 영농 방법의 혁신, 상업적 농업의 장려, 수리 시설의 확충 등을 통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 열하일기에서 \'나라의 쓰임 가운데 수레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이에는 융거(戎車) 수차(水車) 포차(砲車) 등 천 백가지가 있어 창졸간에 이루 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타는 수레와 싣는 수레는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 한 것이니 시급히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그는 그러면서 수레가 많아지면 길이 저절로 닦여져 나라의 교통이 원활해지고 한 곳에서만 나는 물산들이 지체되지 않고 골고루 유통되니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함양군의 안의 현감을 지내셨던 연암 박지원 선생의 관련 기록에 의하면, 당시 박지원 현감은 손재주가 뛰어난 장인들을 골라 수차(水車)인 용골차(龍骨車), 용미차(龍尾車)를 제작하였다고 한다. 용골차는 용의 길다란
등뼈가 연상되는 장치로 저지대의 강으로부터 높은 곳의 논밭으로 물 푸는 장치를 말한다. 즉 가뭄이 닥쳤을때 벼논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일종의 관개용 장치로 ‘수차(水車)’라고만 해야지, 방아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을 이용하여 바퀴를 돌리는 장치는 수차 또는 물레(물+수레바퀴)로만 불어야 하고, 물레와 방아가
합성하여 곡식의 방아를 찧는 장치가 되었을 때 비로소 물레방아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4. 벽돌 만드는법, 도로형태, 배와 수레, 다리의 구조와 같은 건설관련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열하일기의 〈일신수필 馹迅隨筆〉은 신광녕(新廣寧)에서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의 9일간의 기록으로 희대(戱臺)·저자거리·여관·교량 등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수레의 제도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한 것은 〈허생전〉의 중심 사상과도 상통한다.
나라 경제의 강성함을 위하여 용주(用舟), 용거(用車)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상공업 발전을 위해서도 배와 수레의 이용을 주장했다. 중국에 재산이 풍족한 것은 물자를 골고루 유통시켰기 때문이요. 사방이 수천 리 밖에 되지 않는 나라가 가난한 것은 수레가 다니지 못한 까닭이다’라고 적었다.
열하일기의 〈도강록 渡江錄〉은 압록강에서 랴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 15일간의 기록으로, 굴뚝과 구들 등 여염집의 구조와 배, 우물, 가마, 성(城)의 제도 등 배울 만한 것이 있으면 자세히 서술하면서 모든 물건을 이롭게 쓸 수 있어 백성의 생활이 윤택해져야만 덕을 바르게 할 수 있다는 이용후생의 주장을 폈다.
* 구들에 관해서는 중국식 캉의 우수함이 우리나라 온돌보다 뛰어나다고 하였으며 드디어는 “서둘러 항(?)의 제도에 의거하여 바꾸는 것이 옳다
* 중국의 집짓는 법을 서술한 후 조선의 기와집과 비교하며 기와집의 단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중국은 똑같은 크기의 벽돌을 가마에 구워 그 벽돌을 가지고 집을 짓는다. 벽돌집은 견고하고 튼튼하여, 기와집처럼 진흙이 마르면서 벽이 갈라진다거나, 바닥 사이에 금이 가, 불을 때면 연기가 방안으로 들어오거나 바람이 세는 경우가 거의 없어 중국의 벽돌집을 본 닫아 조선의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고 싶어 한다.
* 이곳의 벽돌가마를 보니 벽돌로 쌓고 석회로 봉해서 애초에 불로 말리고 굳히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 또 높이와 크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 모양은 큰 종鐘을 엎어 놓은 것 같은데, 가마 위는 연못처럼 움푹 파이게하여 물을 몇 섬이라도 부을 수 있다. 옆구리에 연기 구멍 네댓 개를 뚫어 불길이 잘 타오르게 만들고, 그 안에 벽돌을 놓았는데 서로 기대도록 해서 불길을 만들어 놓았다. 대체로 그 요점은 벽돌을 쌓는 데 있었다.
-「도강록」7월2일자
7. 맺음말
지금까지 연암의 사상.문학 및 청문화에대한 생각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연암이 이용후생의 중요성과 청의 앞선 문화를 받아들일 것을 말하고 문학에 있어서도 이러한 의식을 반영하였기에 당시에 있어서는 파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비단 문학뿐만이아니다. 지금에와서도 생각하기힘든 개방적인사고는 당시 북학의 “실용주의” 라는 관점에서 볼때에는 어찌보면 당연했으나, 실행하기또한 어려운 일이었을것이다. 문학적인 측면보다, 상업, 농업등 실질적으로 조선이 발달하기위해 양민들의 윤택한 삶을 한단계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던 박지원은 진정한 의미로 “양반”이 아니었을까한다. 현대의 우리들도 무분별하게 다른나라문화를 받아들이거나, 아무 이유없이 다른문화를 배척하는경우가 종종있는데, 위에 선례를 본받아 우리에게 도움이되는 것은 취하고, 불필요한 것은 배제하는 그런 안목을 가질수 있도록 노력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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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9.25
  • 저작시기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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