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서 론
ⅰ) 조선시대의 농경중심의 과학기술
- 자격루, 양구일구, 측우기, 양수표, 양전산계법
- 수차를 이용해서 동력을 만들어 냄
▶ 본 론
ⅰ) 수차의 기원
ⅱ) 동서양의 수차발달
- 서양에서의 수차의 발달 및 응용
- 동양에서의 수차의 발달 및 응용
- 동․서양의 수차의 발달 차이
ⅲ) 세종대왕의 수차 보급
- 세종의 위민에 입각한 수차 보급
- 세종의 수차 보급에 관한 노력
▶ 결 론
- 세종의 수차 장려에 대한 나의 견해
ⅰ) 조선시대의 농경중심의 과학기술
- 자격루, 양구일구, 측우기, 양수표, 양전산계법
- 수차를 이용해서 동력을 만들어 냄
▶ 본 론
ⅰ) 수차의 기원
ⅱ) 동서양의 수차발달
- 서양에서의 수차의 발달 및 응용
- 동양에서의 수차의 발달 및 응용
- 동․서양의 수차의 발달 차이
ⅲ) 세종대왕의 수차 보급
- 세종의 위민에 입각한 수차 보급
- 세종의 수차 보급에 관한 노력
▶ 결 론
- 세종의 수차 장려에 대한 나의 견해
본문내용
논하여 파하고, 오직 수차를 설치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파하지 말게 하였다. 』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세종은 백성을 위하는 마음에서 정치를 하였던 것이다. 다만 지금의 노력으로 먼 앞날을 위했다면 현재의 기술보다는 월등히 앞설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서양의 예를 봐도 그리 긴 기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작은 출발로 기술이 개발되다보면 그에 속도가 붙어서 박차 오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세종이 수차에 대한 보급을 그만 둔 것은 아니었다. 세종은 꾸준히 수차에 대해서 보급에 노력을 쏟았고, 세종 직위 거의 20년 동안 이러한 수차에 대한 세종의 노력은 꾸준히 지속되고 있었다. 박서생의 일본에 다녀와서 한 얘기를 듣고 세종은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수차를 제조 설치하게 하였고 각 도로 경차관을 파견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또한 당수차와 왜수차를 받아들여서 각각의 장점을 이용하려 하였고, 왜수차와 당수차의 장인을 각도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앞서 말한 김종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차의 장려를 꾸준히 하였다. 하지만 수차에서의 더 큰 발전은 얻지 못하였다.
[결론]
수차를 장려하고 보급하려는 세종대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보급에는 원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차 사용에 서툴렀다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의 기술이 조선시대에 크게 발달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아쉬운 느낌을 가지게 한다. 흐르는 물의 에너지를 이용하는 기술에서나, 또는 낮은 곳을 흐르는 물을 높은 곳으로 올려 가뭄을 물리치는 일에서나 우리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 같기 때문이다.
더욱이 수차의 원리를 이용해서 좀 더 나은 기술을 개발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수차의 원리는 지금에도 많이 쓰고 있는 수력발전의 원리이다. 현재의 커다란 덩어리의 에너지를 발전시키는 원리를 당시에도 쓰고 있었지만 그것에서 멈춰버린 당시가 조금은 아쉽다. 서양도 같은 원리로 제분소가 발달하였고 광산의 배수나 권양기의 동력, 용광로에 이용되었고 그 후로는 증기기관과 수력발전으로 나아갔다. 현재의 많이 사용되어지고 있는 자동차의 초기단계인 증기기관을 만들 수 있는 초석이 된 것이다. 만약 산업혁명이 동양에서 일어나고 조선시대부터 기술에 대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어졌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역사는 새로이 쓰여 질 것이다. 어쩌면 국난의 아픔도 없었을 것이고 작은 나라여서 받았던 설움도 없었을지 모른다. 너무 한가지 사실을 크게 해석하는 경향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작은 돌맹이가 잔잔한 호수에 파동을 일으키듯 역사적으로 아주 작은 일이라도 큰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역사를 뒤돌아보면서 후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거울삼아 현재에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일에 대한 처리에서 현재보다는 먼 미래를 고려해야하는 중요한 책임도 더불어 간직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앞선 세종대왕의 오랜 시간동안 꾸준히 노력하신 업적으로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 있다는 것에 무궁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 국사편찬위원회 세종왕록실록
- 네이버 검색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세종은 백성을 위하는 마음에서 정치를 하였던 것이다. 다만 지금의 노력으로 먼 앞날을 위했다면 현재의 기술보다는 월등히 앞설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서양의 예를 봐도 그리 긴 기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작은 출발로 기술이 개발되다보면 그에 속도가 붙어서 박차 오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세종이 수차에 대한 보급을 그만 둔 것은 아니었다. 세종은 꾸준히 수차에 대해서 보급에 노력을 쏟았고, 세종 직위 거의 20년 동안 이러한 수차에 대한 세종의 노력은 꾸준히 지속되고 있었다. 박서생의 일본에 다녀와서 한 얘기를 듣고 세종은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수차를 제조 설치하게 하였고 각 도로 경차관을 파견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또한 당수차와 왜수차를 받아들여서 각각의 장점을 이용하려 하였고, 왜수차와 당수차의 장인을 각도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앞서 말한 김종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차의 장려를 꾸준히 하였다. 하지만 수차에서의 더 큰 발전은 얻지 못하였다.
[결론]
수차를 장려하고 보급하려는 세종대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보급에는 원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차 사용에 서툴렀다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의 기술이 조선시대에 크게 발달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아쉬운 느낌을 가지게 한다. 흐르는 물의 에너지를 이용하는 기술에서나, 또는 낮은 곳을 흐르는 물을 높은 곳으로 올려 가뭄을 물리치는 일에서나 우리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 같기 때문이다.
더욱이 수차의 원리를 이용해서 좀 더 나은 기술을 개발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수차의 원리는 지금에도 많이 쓰고 있는 수력발전의 원리이다. 현재의 커다란 덩어리의 에너지를 발전시키는 원리를 당시에도 쓰고 있었지만 그것에서 멈춰버린 당시가 조금은 아쉽다. 서양도 같은 원리로 제분소가 발달하였고 광산의 배수나 권양기의 동력, 용광로에 이용되었고 그 후로는 증기기관과 수력발전으로 나아갔다. 현재의 많이 사용되어지고 있는 자동차의 초기단계인 증기기관을 만들 수 있는 초석이 된 것이다. 만약 산업혁명이 동양에서 일어나고 조선시대부터 기술에 대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어졌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역사는 새로이 쓰여 질 것이다. 어쩌면 국난의 아픔도 없었을 것이고 작은 나라여서 받았던 설움도 없었을지 모른다. 너무 한가지 사실을 크게 해석하는 경향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작은 돌맹이가 잔잔한 호수에 파동을 일으키듯 역사적으로 아주 작은 일이라도 큰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역사를 뒤돌아보면서 후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거울삼아 현재에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일에 대한 처리에서 현재보다는 먼 미래를 고려해야하는 중요한 책임도 더불어 간직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앞선 세종대왕의 오랜 시간동안 꾸준히 노력하신 업적으로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 있다는 것에 무궁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 국사편찬위원회 세종왕록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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