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미국의 대한정책과 그 변화
강압적 태도
기만적 태도
<참고문헌>
모스크바 3상회의의 전개와 이후의 정세
<참고문헌>
미소공동위원회의 전개 양상
1.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
2.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
3.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
4. 회의 결렬 후의 상황
<참고문헌>
미군정의 남한 하부구조ㆍ정치세력의 재편
- 우익세력의 재편과 민족주의세력의 약화
1.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
2. 한국민주당의 노선과 성격
3. 김구과 한국독립당
4. 김규식과 민족자주연맹
5. 여운형과 조선인민당
<참고문헌>
강압적 태도
기만적 태도
<참고문헌>
모스크바 3상회의의 전개와 이후의 정세
<참고문헌>
미소공동위원회의 전개 양상
1.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
2.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
3.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
4. 회의 결렬 후의 상황
<참고문헌>
미군정의 남한 하부구조ㆍ정치세력의 재편
- 우익세력의 재편과 민족주의세력의 약화
1.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
2. 한국민주당의 노선과 성격
3. 김구과 한국독립당
4. 김규식과 민족자주연맹
5. 여운형과 조선인민당
<참고문헌>
본문내용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민족주의세력 내부에서 많은 신망을 얻고 있었으며, 특히 여운형과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미군정이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해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파 민족주의세력을 끌어들임으로써 광범위한 지배연합을 창출하는 한편 좌익세력을 분열시키려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미군정은 김규식의 이러한 경력에 주목하게 되었다. 또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던 김규식에 대한 미군정의 관리들의 인식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김규식의 일제시기 활동에서 주목할 점은 좌우연합에 대한 사고이다. 해방 직후 김규식 정치노선의 또 하나의 특징은 대미협조노선을 취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김규식의 대미협조노선은 이승만과 한민당의 대미협조노선과는 구별해보아야 한다. 이승만과 한민당세력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자주독립을 외치면서 미군정에 협조하지만, 단독정부 수립의 주체가 됨으로써 그들이 주장하는 자주독립이라는 것이 미국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의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규식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통일민주국가의 수립이라는 민족적인 과제가 정파적인 이해에 우선했다. 그러나 그가 반드시 대미협조노선에만 매몰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대한정책이 점점 단독정부 수립 쪽으로 나아가자 김규식은 미군정과의 협조노선을 즉시 철회하였다.
김규식의 이러한 정치노선이 그대로 투영되었던 것이 바로 1947년 결성된 민족자주연맹이었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된 직후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여 중간파들이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민족자주연맹은 그동안 좌우익이 아닌 독자적인 제3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중간파세력의 결집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런 만큼 이념적인 면에서도 기존의 좌우익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좌우파 민족주의세력들은 해방 직후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그들 자체의 기반 부재와 이념의 부재로 인하여 민족적 과제의 해결을 선도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노선과 활동은 당시 가장 주요한 과제였던 민족통일전선 결성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5. 여운형과 조선인민당
1944년 가을 여운형에 의해 조직된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은 일제의 패망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된다. 그러나 이 조직의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되면서 조선공산당으로 주도권이 넘어가고 미군정에서 이 단체를 부인하자, 여운형은 염정권의 고려국민동맹, 인민동지회, 15회 등의 단체를 흡수하여 1945년 11월 12일 조선인민당(이하 인민당)을 결성하였다. 그 후 인민당은 모스크바 삼상협정이 발표되자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과 함께 좌익 3당의 하나로서 좌익의 연합체인 민전에 참여하여 ‘모스크바 삼상협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의 입장에서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여운형이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고 동생 여운홍이 미군정의 고작에 의해서 인민당을 탈당, 사회당을 만들면서 여운형과 인민당의 입지는 점점 위협을 받았다. 특히 여운형의 좌우합작위원회 참여는 조선공산당 지도부와의 결정적인 결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어, 인민당이 형식적으로 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남로당이 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남로당에 참여하지 않는다. 3당 합당 이후 그는 다시 사회노동당계열과 함께 근로인민당(이하 근민당)을 조직, 좌파 민족주의세력들과 함께 행동하면서 ‘시국대책협의회’를 구성하였다가 결국 1947년 7월 17일 암살당한다.
해방정국에서 그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가 좌익진영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도가 엄청났다는 점을 미군정은 인식하고 있었다. 먼저 여운형의 노선과 활동을 알아보면, 여운형은 해방이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방 이후의 민족적 과제의 해결이 미국과 소련의 타협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노선은 그가 모스크바 삼상협정에 대해서 적극적인 지지의 입장을 보이고 미소공위의 성공을 위하여 노력을 기울이면서 조공남로당과 연대활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주목할 점은 여운형의 이러한 활동이 자신의 의도와 반대로 미군정의 변혁운동세력 분열정책에 상당히 휘말려 들어갔다는 점이다. 미군정보고서는 여운형에 대한 기사의 내용을 통해, 여운형을 비롯한 좌파 민족주의 세력을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조선공산당을 고립시키고 변혁운동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좌우합작위원회가 미국의 소위 ‘행정위원회’구도의 일환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여운형과 민전에 참여한 중도우파세력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좌익을 철저하게 분열시키려는 공작의 일환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파민족주의세력과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인 점은 반민족적 비민주주의적이라고 판단되는 조직에는 결코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편, 여운형의 정치노선 중 당시 이남의 조선공산당과 구분되는 특징은 좌익진영에 속하면서도 민족통일전선의 범위를 매우 광범위하게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당시의 신민당이나 북조선노동당의 통일전선정책과 매우 유사하다.
또한 여운형은 해방정국의 좌익으로 분류되는 정치지도자들 중에서 정체세력간의 연합을 가장 강력히 주장한 사람이다. “우리의 큰길은 민주주의이겠고 우리의 최고 이념은 우리 민족의 완전한 해방에 있다”라고 생각한 여운형에게 민족의 통일을 앞세우는 사람들과의 연합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북쪽에 가 김일성을 만나 서울에 올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이 자리에서 극좌모험주의적인 폭동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그의 노선을 살펴볼 때 주의할 점은 그의 주장을 인민당의 주장과 곧바로 일치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들 간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고, 그러한 차이가 좌우합작운동과 3당 합당과정에서 표출되어 결국 인민당은 공중분해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 『한국현대사1』, 풀빛, 199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한국현대사의 재인식1 : 해방정국과 미소군정』, 오름, 1998
강만길,『고쳐쓴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1994
김규식의 일제시기 활동에서 주목할 점은 좌우연합에 대한 사고이다. 해방 직후 김규식 정치노선의 또 하나의 특징은 대미협조노선을 취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김규식의 대미협조노선은 이승만과 한민당의 대미협조노선과는 구별해보아야 한다. 이승만과 한민당세력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자주독립을 외치면서 미군정에 협조하지만, 단독정부 수립의 주체가 됨으로써 그들이 주장하는 자주독립이라는 것이 미국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의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규식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통일민주국가의 수립이라는 민족적인 과제가 정파적인 이해에 우선했다. 그러나 그가 반드시 대미협조노선에만 매몰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대한정책이 점점 단독정부 수립 쪽으로 나아가자 김규식은 미군정과의 협조노선을 즉시 철회하였다.
김규식의 이러한 정치노선이 그대로 투영되었던 것이 바로 1947년 결성된 민족자주연맹이었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된 직후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여 중간파들이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민족자주연맹은 그동안 좌우익이 아닌 독자적인 제3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중간파세력의 결집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런 만큼 이념적인 면에서도 기존의 좌우익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좌우파 민족주의세력들은 해방 직후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그들 자체의 기반 부재와 이념의 부재로 인하여 민족적 과제의 해결을 선도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노선과 활동은 당시 가장 주요한 과제였던 민족통일전선 결성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5. 여운형과 조선인민당
1944년 가을 여운형에 의해 조직된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은 일제의 패망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된다. 그러나 이 조직의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되면서 조선공산당으로 주도권이 넘어가고 미군정에서 이 단체를 부인하자, 여운형은 염정권의 고려국민동맹, 인민동지회, 15회 등의 단체를 흡수하여 1945년 11월 12일 조선인민당(이하 인민당)을 결성하였다. 그 후 인민당은 모스크바 삼상협정이 발표되자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과 함께 좌익 3당의 하나로서 좌익의 연합체인 민전에 참여하여 ‘모스크바 삼상협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의 입장에서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여운형이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고 동생 여운홍이 미군정의 고작에 의해서 인민당을 탈당, 사회당을 만들면서 여운형과 인민당의 입지는 점점 위협을 받았다. 특히 여운형의 좌우합작위원회 참여는 조선공산당 지도부와의 결정적인 결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어, 인민당이 형식적으로 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남로당이 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남로당에 참여하지 않는다. 3당 합당 이후 그는 다시 사회노동당계열과 함께 근로인민당(이하 근민당)을 조직, 좌파 민족주의세력들과 함께 행동하면서 ‘시국대책협의회’를 구성하였다가 결국 1947년 7월 17일 암살당한다.
해방정국에서 그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가 좌익진영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도가 엄청났다는 점을 미군정은 인식하고 있었다. 먼저 여운형의 노선과 활동을 알아보면, 여운형은 해방이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방 이후의 민족적 과제의 해결이 미국과 소련의 타협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노선은 그가 모스크바 삼상협정에 대해서 적극적인 지지의 입장을 보이고 미소공위의 성공을 위하여 노력을 기울이면서 조공남로당과 연대활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주목할 점은 여운형의 이러한 활동이 자신의 의도와 반대로 미군정의 변혁운동세력 분열정책에 상당히 휘말려 들어갔다는 점이다. 미군정보고서는 여운형에 대한 기사의 내용을 통해, 여운형을 비롯한 좌파 민족주의 세력을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조선공산당을 고립시키고 변혁운동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좌우합작위원회가 미국의 소위 ‘행정위원회’구도의 일환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여운형과 민전에 참여한 중도우파세력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좌익을 철저하게 분열시키려는 공작의 일환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파민족주의세력과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인 점은 반민족적 비민주주의적이라고 판단되는 조직에는 결코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편, 여운형의 정치노선 중 당시 이남의 조선공산당과 구분되는 특징은 좌익진영에 속하면서도 민족통일전선의 범위를 매우 광범위하게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당시의 신민당이나 북조선노동당의 통일전선정책과 매우 유사하다.
또한 여운형은 해방정국의 좌익으로 분류되는 정치지도자들 중에서 정체세력간의 연합을 가장 강력히 주장한 사람이다. “우리의 큰길은 민주주의이겠고 우리의 최고 이념은 우리 민족의 완전한 해방에 있다”라고 생각한 여운형에게 민족의 통일을 앞세우는 사람들과의 연합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북쪽에 가 김일성을 만나 서울에 올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이 자리에서 극좌모험주의적인 폭동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그의 노선을 살펴볼 때 주의할 점은 그의 주장을 인민당의 주장과 곧바로 일치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들 간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고, 그러한 차이가 좌우합작운동과 3당 합당과정에서 표출되어 결국 인민당은 공중분해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 『한국현대사1』, 풀빛, 199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한국현대사의 재인식1 : 해방정국과 미소군정』, 오름, 1998
강만길,『고쳐쓴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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