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헌에 나오는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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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 문헌에 나오는 신라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 신라는 어떤 나라인가 >

Ⅱ. 본론
< 문헌이 말하는 신라사 >
 
 1) 한국사에서 신라의 위상
 2) 중국 문헌의 성격
 3) 중국 문헌에 나타난 신라상
 4) 양서, 수서, 구당서에 나오는 신라
 5) 삼국 사기가 기록한 신라상

Ⅲ. 결론
Ⅳ. 참고 문헌

본문내용

들 은 사찰로 도망하여 중이 됨에 병농이 점차 줄어들고 나라는 쇠약해졌으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으리오.
백성들의 몰락이 국가멸망의 원인임을 김부식은 이와 같이 강조하고 학민자(虐民者)는 스스로 패망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경순왕의 귀부(歸附)를 국가와 민족을 위한 당연한 결정이었다고 강조함으로써 역사발전의 인자(因子)를 사회내부에서 찾으려는 성숙된 역사의식을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인물 69명 가운에 신라인은 56명이다. 그중에서도 3명이 7세기에 활동한 인물이며 21명이 나라를 위해 순국(殉國)한 인물이다. 이것은 김부식 자신이 신라를 고대국가의 전형적 표징으로 생각했으며, 나라를 위한 거룩한 희생을 최고의 덕목으로 강조한 증거이다. 신라인들은 국가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강렬한 국가의식(國家意識)이 있어 나라를 발전시켰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김부식은 신민이 가져야 하는 의무적 행동철학으로써 충의사상(忠義思想)을 제시한 것이다.
新羅通史 신형식. 2004.주류성. p75
(가) 부인을 얻는데 동성(同性)을 취하지 않는 것은 부부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중략)… 그런데 신라는 동성을 취할 뿐 아니라 조카나 고모와 이모의 자매 까지 취하기도 한다. 외국의 법속은 다른 법이니 중국의 예법으로 이를 책하는 것은 바 람직하지 못하다 (『삼국사기』 권3, 내물이사금)
(나) 신라왕으로 거서간이라 칭한 이가 하나요, 차차웅이라 한 이가 하나요, 이사금이라 한 이가 열 여섯, 마립간이라 한 이가 넷이다. 나말의명유 최치원은 『제왕연대력』을 지을 때 다 무슨 왕이라 칭하고 거서간 등의 칭호는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혹시 그 말이 야비하여 족히 칭할 것이 못되는 까닭일까. 지금 신라의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 그 방언을 그대로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상동 권4)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사실을 중국적 기준에 따르지 않고 우리의 독자성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김부식은 보았다.
동성혼인이 중국 예법에는 어긋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우리나라에까지 반드시 적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며, 필요하면 융통성(변화)도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인종의 중복된 혼인을 간접적으로 옹호하고, 왕의 현실적 위상을 인정하려는 의도라 생각된다. 그리고 신라의 왕명을 ‘고유한 우리말’로 사용함으로써 우리나라를 중국과 차별 지으려 했다. 여기에 김부식이 갖고 있는 강렬한 자아의식이 있으며 일방적으로 그를 사대주의자로 매도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김부식은 왕후동반(王后同伴)의 순행이나 동성결혼이 비례라 하더라도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옹호했다. 이것은 당시 외척과 왕실간의 무절제한 혼인을 변호하려는 인상도 없지 않지만 우리 현실을 내세우려는 자아입장을 우선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7세기 통일전쟁에서 순국한 인물을 충신의 표본으로 삼아 역사를 통해 애국심을 강조하고 전통사학의 틀을 제시하여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다는 의미를 부각시켰다.
Ⅲ . 결 론
현존하는 우리의 고대사 문헌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밖에 없는 상황에서 중국 정사에 포함된 우리의 기록은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여기에 의존하지 않을 수도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동이전>>을 예로 들면, 여기에는 중국의 역대 왕조가 우리 민족을 종속국으로 취급하였다는 사실도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종속국 관념은 고대에서부터 현재까지 변하지 않고 있어서 현재의 중구인의 학식 수준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과거 한국은 중국의 종속국이었다.’ 라는 기본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속관계는 일종의 허례로서 중국에게 조공하고 속국에게 내리는 상사(賞賜)는 정치적인 면으로 인식하는 것보다는 조공과 상사의 형태를 띤 교역관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라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단일왕조로 가장 긴 천년의 역사를 유지한 나라였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신라가 제 려를 정벌한 것도 당군의 도움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신라는 그 스스로 통일은 물론 중대사회의 번영을 가져올 바탕을 마련한 나라였다.
신라는 약소국으로 출발하였으나 그 지정학적 위치로 말미암아 국민적 유대와 융합이 가능하였다. 또한 백제와 왜의 빈번한 침입으로 국가적 안위와 국민적 단합을 필요로 하였으며 역대 왕의 덕목과 품성이 관대하여 국민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시해야 할 것은 정신적인 자각과 국가체제가 정비되어 국민을 하나의 통치권으로 묶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즉 정치, 군사제도의 정비를 통해 백성을 ‘하나의 공민으로서’ 동원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으며, 동시에 농민층은 이에 참여할 수 있게끔 국민화가 이루어졌다. 더구나 역대 왕의 인정과 백성들의 자각이 멸사봉공이란 국가의식으로 승화되어6세기 이후에는 화랑을 앞세워 3국 중 최대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이어 6세기 이후 3국간의 갈등과 대 중국외교를 통해 신라는 통일의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신라는 비록 약소국으로 출발하였으나 당에 ‘의존하지 않고 그 힘을 이용하여’ 제 려를 정복한 후에 마침내 당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했다. 최초의 민족통일이었으며, 유교와 불교를 결합하여 하나의 민족종교로 개발함으로써 발달된 통일신라의 문화를 남기게 되었다. 나아가 정치 사회 등 전반적인 제도상 전통사회의 원형을 이루어 고려 조선 왕조로 이어지게 되었다. 결국 신라는 최초의 민족(전근대)통일 왕조만이 아니라, 민족문화의 근간과 한국 전통사회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한국사에 있어서 전근대 민족형성의 기틀이 되어 민족국가 출범의 첫 계기를 마련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런 사실을 기초로 삼아 우리의 현재가 고고학적 연구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왕조의 건국주체는 우리 민족이었으며, 우리 역사를 바로 알아 가는데 고증적 절차를 밟아 하나하나 밝히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Ⅳ . 참고 문헌
新羅通史 신형식. 2004.주류성.
한글동이전. 김재선 엄애경 이경 역편. 1999. 서문문화사
韓國 의 古代史. 신형식. 2002. 삼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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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9.28
  • 저작시기2006.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69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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