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차 문화 (新羅의 茶 文化)
본 자료는 2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해당 자료는 2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2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序
[2]新羅의 茶 文化
1)傳來
①許 王后 說
②自 生 說(三國史記 권2⦁김 교각 스님)
③김 대렴 설
2)新羅의 茶 精神
3)新羅의 茶人
4)新羅의 茶具
[3]結論(新羅의 茶 精神)

본문내용

개곡에 玉川寺(옥천사)를 창건하고 定康王(정강왕)은 옥천사를 雙溪寺(쌍계사)로 고쳤다. 또한 崔致遠奉敎撰(최치원봉교찬)으로 된 그의 비문에는 진감국사의 소박한 차 생활과 신라인들의 음다법을 알 수 있다
4)新羅의 茶具
新羅에서는 국산차와 당나라의 떡차(餠茶)를 마셨으므로 전다도구(煎茶道具)도 당나라 육우의 다경(茶經)에 나오는 24종의 다기가 준용되었으나 茶具의 소재와 형태는 달랐었다. 三國遺事에 월명사 두솔가(月明師兜率歌)조에 의하면 신라에 茶道具세트(品茶一襲)가 있었고, 가루차와 끓인 물을 융합시킬 때 당나라에서는 무쇠가마를복() 新羅에서는 최치원의 진감국사 비문에 적힌 대로 돌솥(石釜)이 사용되었다. 야외에 茶具를 휴대할 때 당에서는 대광주리를 新羅에서는 벚나무 통에 담아 둘러메고 다녔다. 또한 당나라에서는 차주발(茶)을 썼으나 新羅에서는 차사발(茶區+瓦)이 사용되었다. 대학자인 이곡(李穀)이 쓴 동유기(東遊記)에 따르면 대표적인 화랑인 사선(四仙)이 쓰던 차 부뚜막이 강릉 경포대에 있었고 그밖에도 차샘, 돌 부뚜막, 돌절구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제현의 묘련사의 석지조기에 따르면 순암법사가 동해안에서 본 四仙의 茶具 遺物은 묘련사에 남은 두 바윗덩어리와 같다고 하였는데, 하나는 샘물을 담는 것이며, 또 하나는 두 군데가 오목하게 패어 있는데, 원형의 물을 담았고, 타원형에서는 차 그릇을 씻은 듯하다.
新羅의 찻잔으로 문헌에 남아지는 것으로써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新羅의 다구도 고급차를 담는 찻잔이었던 것 같다. 제사용은 굽이나 받침이 있는 잔을 썼을 것이며 왕이나 귀족이 사용하는 고급다구도 역시 따로 있었을 것이다. 일반 백성들은 거친 차를 약이나 탕으로 끓여서 뜨겁게 마실 때 쓰던 토기 찻잔도 흔히 있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또한 물을 마시는 원시적인 그릇으로는 흔히 바가지인데 나무로 된 것을 흔히 사용했을 것이다. 674년에 만들어진 慶州 雁鴨池에서 회색토기 차 사발이 출토되었는데 그릇의 바깥에는 묵으로 그린 풀꽃과 구름이 있으며 작은 글씨로 ‘茶’가 쓰여 있다. 이에 차를 이 토기로 마셨음을 알 수 있다. 종교 행사를 위한 다구는 굽이 있었다.
[3]結論
(花郞 精神)
신라초기에 있어서 불교의 공인 중국과의 문화교류 확대, 6세기이후 9세기에 이르기 까지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왕족귀족승려화랑등 하류사회에 까지 飮茶風이 성행되고, 불교사원에서 부처님께 올리는 獻茶행사와 팔관회 행사에서 獻茶행사가 행하여 졌다. 신라의 차는 道義鍊磨의 방편과 靈肉一致의 思想을 바탕으로 하는 미덕으로 요약된다. 아름다움(美)은 화랑의 散花精神으로 덕스러움(德)은 彌勒下生의 思想으로 풀이 된다. 新羅가 三國 中에서 統一을 이루어낸 주역이 화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新羅의 茶道精神은 곧 花郞精神과 相通된다. 花郞精神은 和合忠節崇敬淸潔로 요약되는데, 그르므로 花郞의 茶道精神은 和忠敬淸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① 蔚山 廣域市史 (2002년 제6권)
② 蔚山의 文化財 (1997년 울산광역시)
③ 茶文化史 상,하 (2007년 유건집)

키워드

신라,   ,   문화,   ,   차 문화
  • 가격2,0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11.10.05
  • 저작시기2011.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0594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