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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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현대사(초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민족개조론과 실력양성운동
Ⅲ. 민족주의 운동의 전개
1) 청년회운동
2) 학교설립운동
3) 물산장려운동

Ⅳ. 민족주의 운동의 분화
Ⅴ. 민족주의 운동 세력의 친일화
Ⅵ. 맺음말

본문내용

이 두 번째 이유다.
이 두 가지 원인으로, 지금까지 해온 정치적 운동은 모두 일본을 적대시하는 운동뿐이었다. 이런 종류의 정치운동은 해외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고, 만일 국내에서 한다면 비밀결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조선 내에서, 전 민족적인 정치운동을 하도록 새 활로를 타개할 필요가 있다. 조선 내에서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그 이유는 어디 있는가. ①우리가 당면한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②조선인을 정치적으로 훈련하고 단결시켜 민족의 정치적 중심세력을 만들어 장래 정치운동의 기초를 이루기 위해. 그러면 그 정치적 결사의 최고 또는 최후의 목적이 무엇인가. 다만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그 정치적 결사가 생장하기를 기다려 그 결사 자신으로 하여금 모든 문제를 스스로 결정케 할 것이라고. 』 동아일보사, 이광수<민족적경륜> ≪민족과 더불어 80년≫, 동아일보 80년사 편찬위원회, 2000.
일제 치하의 조선 땅에서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저항하려면 일제 통치의 틀 안에서 합법적인 정치운동이라는 방법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촉구하는 이 글은 지금까지 해온 독립운동에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비쳤다. 이는 필자 이광수의 개인 의견을 넘어 동아일보 편집진의 현실 인식 또는 정치 노선으로 보이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일제의 세제특혜정책은 분명히 조선인 유산층에게 소득에 조응하는 과세부담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독립보다는 식민지 지배를 인정한 바탕 위에서 부의 축적 ‘가능성’을 심어주었다. 이는 유산층을 중심으로 하였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점차 일제와 타협하는 빌미가 되었다. 특히 1931년의 만주사변 도발로 일본-조선-만주를 잇는 엔블럭의 확대에 따라 1934년경부터 조선의 상공업이 호황을 띠기 시작하였다. 정태현, 앞의책, 87쪽
조선 부르주아지들은 자본이 축적되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자 점차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보수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또한 앞서 언급한 자치운동이 대두되면서 자신들이 조선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조선에서 일본과의 유일한 소통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상징적인 기능에 집착하였다. 이는 일본이 유산층에게 조세의 대부분을 부담시키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주어지는 회유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주사변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산층에게 주어졌던 세제특혜정책은 공채비와 군사관계비 등의 국가지출이 늘어나면서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대 후반기 이후 전시수탈체제로 접어들면서 유산층에 대해 소득세를 부과하기 시작하면서 조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유산층은 전시수탈의 이념이었던 ‘대동아경영권’논리에 따라 일본과 하나가 되지 않으면 자신의 축적기반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민족주의 세력의 친일화 경향은 1920년대 초반부터 유행했던 인위도태적 사회진화론에 의거하여 열등민족이 우등민족으로 변화해간다는 논리를 정당화시켜주는 종결점 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Ⅵ. 맺음말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은, 구한말 개화기부터 전래되어온 사회진화론에 그 사상적 기반을 두었다. 사회진화론은 3·1운동이후 민족운동 주체 세력에게, 특히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에게 우승열패의 인식과 함께 자연도태론에 입각한 인위도태론을 유행시켰다. 이는 조선민족이 즉각적인 독립의 길로 향하기 이전에 독립의 기회가 찾아올 때를 대비하여 꾸준히 실력을 키워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실력양성론과 이를 바탕으로 한 민족개조론으로 발전했다. 이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이 조선 민족의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가는데 있어서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 결정적인 논리였다.
실력양성운동과 민족개조론은 실질적인 문화운동으로 이어졌다. 문화운동의 틀 안에서 전개된 대표적인 민족운동으로 청년회 운동과 학교설립운동-민립대학기성운동 그리고 물산장려운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서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이 분화한 분수령이 된 소위 민족주의 우파의 자치운동까지 모두 실력양성운동을 바탕으로 한 민족운동이었다. 이러한 문화운동은 대부분 일제의 방해공작과 조선사회에 잔재한 전근대성, 계층 간 상호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점, 일본자본에 비해 영세한 조선자본의 취약성 등으로 인하여 모두 실패하거나 진행 중에 표류하게 되었다. 연속된 좌절로 인하여 민족주의 세력은 일본의 기만적인 문화통치 정책 중에서 가장 역점을 기울였던 민족분열정책중 하나인 지방제도 개정이 공식적으로 발효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타협적인 민족주의 우파와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좌파로 분화되었다. 결국 민족주의 세력은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한 민족좌익전선의 결성과 신간회 결성에 이르기 까지 자치론, 반자치론으로 나뉘어 소모적인 관념논쟁을 지속하게 되었다.
부르주아 민족주의 우파는 교육과 산업의 진흥이라는 실력양성을 독립 운동의 전제로 간주하면서 중급 규모 이상의 민족자본 상층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발전을 지향 하였다. 실력양성을 모토로 하는 문화운동을 전개하며 1920년대 중반 이후 정치적으로는 일제권력에 타협하는 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30년대에 접어들면 일본의 각종 세제혜택과, 만주사변이후 엔블럭 경제의 형성을 이루어냈을 때에 조선의 상공업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이때에 지방제도 개편도 이루어지면서 유산층은 일본의 ‘대동아경영권’ 논리에 따라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친일 세력으로 변질되었다. 부르주아 민족주의 좌파는 절대독립과 즉각 독립 노선을 견지하면서, 민족자본 하층과 소부르주아 계급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적 발전을 지향하였다. 1920년대 초반 물산장려운동 참여와 중반 이후 자치운동의 반대, 사회주의계열 등 민중적 민족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강만길 외 11명, 앞의책, 154쪽
결국 이후 국내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은 그 물적 토대, 사회 계급적 토대가 취약한 가운데 우파는 동요와 타협, 그리고 친일로의 전락이라는 길을 걸었고 좌파는 비타협적인 모습을 견지하였지만 민족의식이라는 관념적 요소에만 의존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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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0.04
  • 저작시기20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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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70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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