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目 次 -
Ⅰ. 序 論
1. 조선왕조실록의 개요................................3
2. 이용한 자료........................................3
3. 실록의 활자........................................4
4. 실록의 편찬과정....................................5
5. 실록의 수정본......................................5
Ⅱ. 本 論
1. 조선왕조실록의 보관................................6
(1) 실록 보관소(사고)...............................6
(2) 조선 전기 4사고의 설치...........................6
(3) 임진왜란 후 5사고로 재정비.......................7
2. 사고관리...........................................8
(1) 춘추관...........................................8
(2) 전임사관(외사고).................................8
(3) 실록의 거풍......................................9
(4) 사고의 건물관리.................................10
(5) 사고의 수비 - 승려..............................10
(6) 사고의 관리 및 운영경비 부담....................11
3. 실록 수난사.......................................11
(1) 임진왜란........................................11
(2) 전주사고(관민합동작전)..........................12
4. 다른 나라의 실록..................................13
(1) 중국의 실록.....................................13
(2) 일본의 실록.....................................14
(3) 배트남 실록.....................................14
5. 한국의 다른 실록과 다른 자료들....................15
(1) 고려실록........................................15
(2) 승정원일기......................................15
(3) 비변사등록과 일성록.............................16
6. 사관의 의미.......................................16
7. 사관의 자격요건...................................17
8. 사관의 종류와 직무................................19
(1) 전임사관........................................19
(2) 겸임사관........................................20
9. 사초의 종류.......................................21
(1) 입시사초........................................21
(2) 가장사초........................................21
Ⅲ. 結 論
1. 당대의 의미.......................................22
2. 현대의 의미.......................................22
Ⅰ. 序 論
1. 조선왕조실록의 개요................................3
2. 이용한 자료........................................3
3. 실록의 활자........................................4
4. 실록의 편찬과정....................................5
5. 실록의 수정본......................................5
Ⅱ. 本 論
1. 조선왕조실록의 보관................................6
(1) 실록 보관소(사고)...............................6
(2) 조선 전기 4사고의 설치...........................6
(3) 임진왜란 후 5사고로 재정비.......................7
2. 사고관리...........................................8
(1) 춘추관...........................................8
(2) 전임사관(외사고).................................8
(3) 실록의 거풍......................................9
(4) 사고의 건물관리.................................10
(5) 사고의 수비 - 승려..............................10
(6) 사고의 관리 및 운영경비 부담....................11
3. 실록 수난사.......................................11
(1) 임진왜란........................................11
(2) 전주사고(관민합동작전)..........................12
4. 다른 나라의 실록..................................13
(1) 중국의 실록.....................................13
(2) 일본의 실록.....................................14
(3) 배트남 실록.....................................14
5. 한국의 다른 실록과 다른 자료들....................15
(1) 고려실록........................................15
(2) 승정원일기......................................15
(3) 비변사등록과 일성록.............................16
6. 사관의 의미.......................................16
7. 사관의 자격요건...................................17
8. 사관의 종류와 직무................................19
(1) 전임사관........................................19
(2) 겸임사관........................................20
9. 사초의 종류.......................................21
(1) 입시사초........................................21
(2) 가장사초........................................21
Ⅲ. 結 論
1. 당대의 의미.......................................22
2. 현대의 의미.......................................22
본문내용
사인2), 홍문관(직제학1, 전한1, 응교1, 부응교1), 사헌부(집의1, 장령2), 사간원(사간1)
기주관記注官
정5~종5품
13
의정부(검상1), 홍문관(교리2, 부교리2), 사헌부(지평2), 6조좌랑(6)
기사관記事官
정6~종9품
15
홍문관(수찬2, 부수찬2, 박사1, 저작1, 정자2), 시강원(사서1, 설서1), 사간원(정언1), 승정원(주서2), 종부시(주부1), 승문원(박사1)
계
52명
수찬관 이상은 조정의 쟁쟁한 당상관들이다. 편수관 이하는 실록을 편찬할 때 초안 원고에 해당하는 초초初草를 작성하는 실무 담당자들이다.
기사관은 위 표에서 보이는 겸춘추 15명 외에 예문관 소속 한림들도 소속되어 있어서, 총원은 23명이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52명에 달하는 겸춘추는 당시 중요 관청에서 요직으로 일하던 대부분의 관료들을 망라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2품직의 동지사 이상은 당대 최고의 당상관들이었고, 실록청을 구성하고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감독관 역할을 했다.
수찬관은 글자 그대로 실제 실록을 수찬하는 업무를 총괄하는 일을 맡았고, 그 역시 업무의 중요성으로 인해 당상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그 아래 편수관 이하가 실록을 편찬하는 실무를 담당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사관은 한림 8명과 겸사관 52명 등 모두 60명 정도가 활약하고 있었다.
9. 사초의 종류
(1) 입시사초
입시사초란 예문관의 전임관 중 기사관이 정사가 이루어지는 장소에 입시하여 기록한 것을 말한다. 작성된 사초는 춘추관에 납입되어 승정원일기와 겸임사관들이 보고한 각 관청의 시행사와 함께 시정기로 작성되었다. 즉, 입시사초는 상번검열(右史)이 군주의 언동을 기록하여 초서로 쓴 원본을 하번검열(左史)에게 넘기면, 하번이 정서하여 상번에게 바친 뒤 춘추관에 보관했다가 각 관청의 시행하와 함께 시정기로 정리되는 것이었다.
가장사초의 경우 집에 돌아와 여유있는 마음으로 작성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읽을 만했다. 그러나 입시사초의 경우는 받아 적는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초서보다 심하게 흘려 쓰게 되었다. 이를 보통 어지럽게 썼다고 하여 ‘난초(亂草)’ 혹은 날아가는 글씨 같다고 하여 ‘비초(飛草)’라고 했다. 어느 정도 심하게 흘려 썼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사가 이루어지는 자리에 직접 참석하여 작성”
(2) 가장사초
가장사초란 보고들은 시행사는 불론, 인물의 현부득실도 기록했다. 여기에는 인물에 대한 작성자의 논평까지 수록되어 있다. 또한 기밀사 등도 기록되어 있으며, 개인적으로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 실록청에 납입했기 때문에 입시사초와는 다소 성격이 달랐다. 즉, 가장사초는 퇴궐한 뒤 집에 돌아와 강박한 기억을 더듬어 다시 작성한 것이다. 따라서 기사의 내용은 시정기와 비교하여 다른 기사가 있을 수 있었으며, 실록의 기사와 다른 점이 발견되기도 하는 것이다.
가장사초의 내용이 누설되거나 공개되는 경우 예외 없이 조정에는 피바람이 일었다. 과거나 현재를 막론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의식이 강했던 만큼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가장사초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발력을 잠재한 시한폭탄과 같았다고 할 수 있다.
“퇴궐한 뒤 집에 돌아와 기억을 더듬어 다시 작성했다가, 실록 편찬 시 실록청에 제출”
Ⅲ. 結 論
1. 당대의 의미
첫 번째는 태조 이성계에서부터 25대 철종에 이르기까지 472년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세게 최대 단일 왕조의 기록이다.
두 번째로, 다른 나라에 현존하는 모든 실록은 필사본인데 비해, 조선왕조실록은 4부를 만들면서도 활자를 제작, 인쇄하였다.
세 번째로, 고려의 실록은 조선 초까지 남아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편찬의 기본 자료가 되었으나, 정사편찬이후 모두 소각하는 관례에 따라 소실되었다.
네 번째로, 조선왕조실록은 사관실명제로서 정직한 기록이 이루어졌으며, 실록의 개수시에도 함께 보관함으로써 객관적 비교 평가가 가능하다. 그 예로는 선조수정실록, 경종수정실록,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를 함께 보관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황권이 강한 중국에서는 사관이나 실록의 편찬자들이 황제의 도덕성과 대의명분에 위배되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과 달리, 국왕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조선은 그 정치 체제 덕분에 어느 정도 내용의 충실성, 공정성,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2. 현대의 의미
우리는 자칫 조선왕조실록이 왕의 거취와 같은 세세한 것까지 적어 놓은 고리타분한 역사서라고 비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돌려서, 현대의 우리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부끄럽기 짝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해방 후 5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서 찾아볼 만한 자료가 마땅히 없을뿐더러, 수많은 언론매체와 국정자료 등의 정보가 홍수와 같이 밀려드는데도 역사서 작성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과연 제1공화국의 대통령부터 지금의 현 노무현 대통령까지의 기록을 살펴보려면, 무엇을 찾아보아야 할까? 만약에 자료가 있다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
우리는 이번 조선왕조실록을 조사하면서, 예전같이 사관이 통치자의 주위에 앉아서 또는 서서 일체의 말까지 다 받아 적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훗날 우리의 미래 세대에게 던져줄 소중한 역사의 한 가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조선왕조가 지금의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서 이기 이전에, 앞으로 우리가 정리해야 할 역사기록에 대한 과제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참고 문헌 ※
☆ 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문화유산 열 두 가지, 최준식, 시공사, 2002
☆‘언론’이 조선왕조 500년을 일구었다, 가람기획
☆ 조선왕조실록 어떤 책인가, 동방미디어
☆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가람기획
☆ 한국사 시민강좌 제23집, 이기백, 일조각
☆ 다시찾는 우리역사, 한영우, 경제원, 2002
☆ http://www.dbmedia.co.kr/
☆ http://www.tamgudang.co.kr/
☆ http://net-in.co.kr/dazzleme/
기주관記注官
정5~종5품
13
의정부(검상1), 홍문관(교리2, 부교리2), 사헌부(지평2), 6조좌랑(6)
기사관記事官
정6~종9품
15
홍문관(수찬2, 부수찬2, 박사1, 저작1, 정자2), 시강원(사서1, 설서1), 사간원(정언1), 승정원(주서2), 종부시(주부1), 승문원(박사1)
계
52명
수찬관 이상은 조정의 쟁쟁한 당상관들이다. 편수관 이하는 실록을 편찬할 때 초안 원고에 해당하는 초초初草를 작성하는 실무 담당자들이다.
기사관은 위 표에서 보이는 겸춘추 15명 외에 예문관 소속 한림들도 소속되어 있어서, 총원은 23명이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52명에 달하는 겸춘추는 당시 중요 관청에서 요직으로 일하던 대부분의 관료들을 망라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2품직의 동지사 이상은 당대 최고의 당상관들이었고, 실록청을 구성하고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감독관 역할을 했다.
수찬관은 글자 그대로 실제 실록을 수찬하는 업무를 총괄하는 일을 맡았고, 그 역시 업무의 중요성으로 인해 당상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그 아래 편수관 이하가 실록을 편찬하는 실무를 담당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사관은 한림 8명과 겸사관 52명 등 모두 60명 정도가 활약하고 있었다.
9. 사초의 종류
(1) 입시사초
입시사초란 예문관의 전임관 중 기사관이 정사가 이루어지는 장소에 입시하여 기록한 것을 말한다. 작성된 사초는 춘추관에 납입되어 승정원일기와 겸임사관들이 보고한 각 관청의 시행사와 함께 시정기로 작성되었다. 즉, 입시사초는 상번검열(右史)이 군주의 언동을 기록하여 초서로 쓴 원본을 하번검열(左史)에게 넘기면, 하번이 정서하여 상번에게 바친 뒤 춘추관에 보관했다가 각 관청의 시행하와 함께 시정기로 정리되는 것이었다.
가장사초의 경우 집에 돌아와 여유있는 마음으로 작성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읽을 만했다. 그러나 입시사초의 경우는 받아 적는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초서보다 심하게 흘려 쓰게 되었다. 이를 보통 어지럽게 썼다고 하여 ‘난초(亂草)’ 혹은 날아가는 글씨 같다고 하여 ‘비초(飛草)’라고 했다. 어느 정도 심하게 흘려 썼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사가 이루어지는 자리에 직접 참석하여 작성”
(2) 가장사초
가장사초란 보고들은 시행사는 불론, 인물의 현부득실도 기록했다. 여기에는 인물에 대한 작성자의 논평까지 수록되어 있다. 또한 기밀사 등도 기록되어 있으며, 개인적으로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 실록청에 납입했기 때문에 입시사초와는 다소 성격이 달랐다. 즉, 가장사초는 퇴궐한 뒤 집에 돌아와 강박한 기억을 더듬어 다시 작성한 것이다. 따라서 기사의 내용은 시정기와 비교하여 다른 기사가 있을 수 있었으며, 실록의 기사와 다른 점이 발견되기도 하는 것이다.
가장사초의 내용이 누설되거나 공개되는 경우 예외 없이 조정에는 피바람이 일었다. 과거나 현재를 막론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의식이 강했던 만큼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가장사초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발력을 잠재한 시한폭탄과 같았다고 할 수 있다.
“퇴궐한 뒤 집에 돌아와 기억을 더듬어 다시 작성했다가, 실록 편찬 시 실록청에 제출”
Ⅲ. 結 論
1. 당대의 의미
첫 번째는 태조 이성계에서부터 25대 철종에 이르기까지 472년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세게 최대 단일 왕조의 기록이다.
두 번째로, 다른 나라에 현존하는 모든 실록은 필사본인데 비해, 조선왕조실록은 4부를 만들면서도 활자를 제작, 인쇄하였다.
세 번째로, 고려의 실록은 조선 초까지 남아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편찬의 기본 자료가 되었으나, 정사편찬이후 모두 소각하는 관례에 따라 소실되었다.
네 번째로, 조선왕조실록은 사관실명제로서 정직한 기록이 이루어졌으며, 실록의 개수시에도 함께 보관함으로써 객관적 비교 평가가 가능하다. 그 예로는 선조수정실록, 경종수정실록,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를 함께 보관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황권이 강한 중국에서는 사관이나 실록의 편찬자들이 황제의 도덕성과 대의명분에 위배되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과 달리, 국왕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조선은 그 정치 체제 덕분에 어느 정도 내용의 충실성, 공정성,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2. 현대의 의미
우리는 자칫 조선왕조실록이 왕의 거취와 같은 세세한 것까지 적어 놓은 고리타분한 역사서라고 비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돌려서, 현대의 우리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부끄럽기 짝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해방 후 5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서 찾아볼 만한 자료가 마땅히 없을뿐더러, 수많은 언론매체와 국정자료 등의 정보가 홍수와 같이 밀려드는데도 역사서 작성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과연 제1공화국의 대통령부터 지금의 현 노무현 대통령까지의 기록을 살펴보려면, 무엇을 찾아보아야 할까? 만약에 자료가 있다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
우리는 이번 조선왕조실록을 조사하면서, 예전같이 사관이 통치자의 주위에 앉아서 또는 서서 일체의 말까지 다 받아 적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훗날 우리의 미래 세대에게 던져줄 소중한 역사의 한 가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조선왕조가 지금의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서 이기 이전에, 앞으로 우리가 정리해야 할 역사기록에 대한 과제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참고 문헌 ※
☆ 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문화유산 열 두 가지, 최준식, 시공사, 2002
☆‘언론’이 조선왕조 500년을 일구었다, 가람기획
☆ 조선왕조실록 어떤 책인가, 동방미디어
☆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가람기획
☆ 한국사 시민강좌 제23집, 이기백, 일조각
☆ 다시찾는 우리역사, 한영우, 경제원, 2002
☆ http://www.dbmedia.co.kr/
☆ http://www.tamgudang.co.kr/
☆ http://net-in.co.kr/dazzleme/
추천자료
조선시대의 구제제도와 그 기구 - 진휼제도와 의료제도
조선시대의 남녀차별
조선시대 이혼에 대한 규제와 그 실상
조선시대 사화에 관해서
조선시대 성균관의 역할과 의의 분석 - 교육차원에서의 분석
조선시대 도자기의 역사
전통가구-조선시대 가구의 특징에 대한 조사
조선후기 지방사회 공직관리의 부패상에 대한 일고
조선 후기 대명의리론의 전개~ 북학론의 전개
조선시대의 교육
조선시대 식문화의 변천사 - 주변민족 국가와의 식문화를 비교해보고, 당시 주요 작물이었던 ...
조선시대 상설구빈기관들의 특징과 역할에 대해 서술 - 상평창, 의창, 사창, 자휼전칙, 계, ...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토목공사
조선시대 주택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