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수정본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최종수정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분하강현상은 보편적이어서 眞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금입택은 眞骨가계를 유지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하나의 금입택은 眞骨귀족을 구성한 여러 세력 집단 중 하나의 종가가 있었고 종가의 주인공이 바뀌면 새로운 주인공을 중심으로 다시 새로운 집단이 眞骨집단으로 편성된 것으로 짐작이 간다. 이때 일정 眞骨집단만이 그 신분을 유지하였고 방계화한 집단은 족강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李鐘旭, 1999, <新羅骨品制硏究>, 일조각, p221
무열왕은 범청의 7대조가 되는대, 범청이 眞骨에서 1등 족강한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그 중 金哲埈은 범청이 무열왕의 7대 동일집단의 말단에 속하였기에 족강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金哲埈의 견해에 대한 비판이 있다. 李基東은 범청이 현덕왕 14년(822) 김헌창의 난에 연좌되어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고 보는 견해를 타당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李基東의 견해는 왕의 자손이라면 누구나 세대수에 제한은 받지 않고 眞骨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고 오직 권력투쟁에 패배함으로써만 몰락할 뿐달리 이들을 도태시킬 원리나 방법이 없었다는 그 자신의 주장을 따른 것이다. 李鐘旭, 1999, <新羅骨品制硏究>, 일조각, p224
李鐘旭은 위의 두가지 이유 중 어느 하나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첫째로 聖骨집단의 성원들도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聖骨집단이 만들어지게 되고 그 범위를 벗어난 세력은 족강하여 眞骨이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金哲埈이 일정한 친족집단의 범위를 벗어나면 족강을 한다는 주장의 타당성을 볼 수 있다. 단지 그의 주장처럼 新羅시대의 사람들이 7대 동일친족집단을 유지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중대의 왕위계승을 보면, 왕위계승권자가 한명으로 굳어졌고 또 그와 같은 왕위계승권자를 배출하던 왕의 가족도 왕과 왕비 그리고 그들의 자식에 국한되어 있는 핵가족적인 것이었다. 이같이 왕의 가족폭이 축소된 것은 결국 왕위계승권자의 배출을 끊길 가능성을 다른 어느 때보다 크게 안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중대에서 왕들은 왕자를 얻기 위하여 왕비를 바꾸는 일들이 있었다. 李鐘旭, 1999, <新羅骨品制硏究>, 일조각, p228
3) 骨品신분
화랑도제 표면적인 기능 중에 좋은 사람을 조정에 천거하는 일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新羅시대는 賢佐忠臣과 良將勇卒이 이로부터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같은 화랑도에 참여하였던 인원의 구성이 어떠하였나 주목된다. 우선 『三國遺事』竹旨郞조의 기록을 보아 알 수 있듯 당시 화랑은 眞骨이었다.
그러나 그 밑의 郎徒는 모량부의 득오의 예와 같이 두품신분을 가진 자들도 있었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생각하면 낭도는 왕경의 미성년 자제들 중 지원자 또는 선발된 자로 구성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신분적인 면에서 眞骨과 두품신분의 자제들이 화랑도를 구성하여 집단활동을 한 것이 된다. 거기에 더하여 평민들도 낭도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들은 평시에는 각자의 집에 살며 화랑도의 활동에 참여하였어나 원거리 여행을 할 때에는 공동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화랑도제는 중고시대까지는 두품신분층을 관리로 선발하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들 화랑도집단에 속하여 맺어진 상하의 신분관계는 평생을 지속하였고 동시에 신분적인 갈등을 완화시켜 주는 구실도 하였다.
대체로 화랑도는 15살에서 18살까지의 낭도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新羅 骨品制의 여러 계층으로부터 나왔다. 이 같이 여러 신분에 속한 자들이 화랑집단을 이루고 공동활동을 하게 되어 그들 사이의 유대관계는 매우 깊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유대관계는 평생을 지속하였다. 이 같은 화랑도의 활동을 통해 각 신분층 출신 인물들은 신분제하에서 각자의 신분적 위치를 받고 신분에 맞는 생활방식을 배웠다고 헤아려진다. 그 결과 화랑도의 성원들은 일찍부터 신분질서를 몸에 익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맺어진 유대관계는 두품신분자들의 신분적인 갈등을 해소하는데 잠재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Ⅲ. 결 론
日本인 연구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연구부터 韓國人 연구자에 의한 연구까지 오랜 기간동안 骨品制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李基東과 李鐘旭의 연구를 중점으로 비교를 하였다. 李基東은 新羅의 骨品制가 국가형성기 지배세력의 편성과정에서 기원을 두고 있다고 했으며, 李鐘旭은 新羅 骨品制의 기원은 국가형성기부터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李鐘旭은 新羅의 국가형성 시기를 기원전 2세기 말경까지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李鐘旭은 聖骨은 왕을 중심으로 왕궁에 거주하던 형제공동가족의 형태를 지닌 집단이라 하였고, 李基東은 眞興王의 직계인 銅輪太子의 직계비속으로 구성된 소lineage 집단이 聖骨신분을 가졌고 나머지 왕실 친족집단의 구성원은 眞骨신분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龍春이 眞骨이 된 시기는 선덕여왕 즉위 이전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였다.
李鐘旭은 족강 장치에 대해서 말을 하였으며, 李基東은 오직 권력투쟁에 패배함으로써만 몰락할뿐 달리 이들을 도태시킬 원리나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骨品制는 화랑도와 많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화랑도는 두품신분층을 관리로 선발하는 중요한 방법이였으며, 화랑집단을 통해 각 신분층 출신 인물들을 신분제하에서 각자의 신분적 위치를 받고, 신분에 맞는 생활방식을 배우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맺어진 유대관계는 두품신분자들의 신분적인 갈등을 해소하는데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위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骨品制에 대한 연구는 李基東과 李鐘旭의 주장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기존의 李基東의 주장에 대해서 李鐘旭은 새로운 주장을 하였다. 이에 대해서 국가 형성과 기원에 대해서는 李鐘旭의 의견에 동의하며, 聖骨과 眞骨에 대한의견은 李基東의 의견에 동의한다. 眞骨에 관한의견에서는 李鐘旭의 족강제도가 설득력이 있었다.
연구 방법에는 많은 시각과 많은 방법이 있다. 대표적인 학자 李鐘旭과 李基東의 논문 및 서적을 기본으로 하여, 많은 시간동안 비교를 하였지만, 新羅의 骨品制가 新羅라는 국가의 생성과 멸망에 큰 영향을 미쳤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키워드

  • 가격1,0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12.10.04
  • 저작시기2006.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7065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