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의 골품제의 변화와 이에 따른 신라사회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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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서론
2.본론
1. 골품제
(1) 골품제의 기초집단
(2) 성골과 진골
(3) 골품제와 관등․관직제도
(4) 골품제의 성격
2. 상대 골품제의 구조와 변화
-강력한 고대왕국의 체제
3. 중대 골품제의 구조와 변화
-시대적 상황
-중대 골품제의 변화
4. 하대의 골품제의 구조와 변화(골품제도의 모순)
-시대적 배경
1) 진골귀족의 분열
2) 육두품 세력의 대두
3) 호족의 대두로 나타난 여러 가지 특징
a. 호족
b. 호족의 성장
c. 농민의 봉기
d. 후백제와 태봉(후삼국 시대의 대두와 고려의 건국)
e. 선종의 유행
f. 풍수지리설
4) 유교의 성장
-하대 골품제의 변화
3.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된 안상(眼象)을 두고 밑에는 큼직한 구름무늬가 있다. 비신은 사각의 모를 죽였고, 이수는 밑에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을 새기고 4면에 운룡(雲龍)을 조각하였다. 앞면에는 제액(題額)이 있으나 문자는 마멸되었다. 비문은 최치원(崔致遠)이 찬(撰)하고 최인연(崔仁)이 썼으며 자경(字徑)은 1.5cm이다. 신라의 비석 중 최대의 거작으로 혼려(渾麗)한 조각수법은 신라 석비의 대표작품이라 할 만하다.
문에 보이는 '득난'은 종래 6두품의 별호로 알려져 왔으나, 기실 그것은 진골층이 몇 세기에 걸쳐 분화한 결과 성립한 독자적인 신분이었다. 이 신분에는 육두품으로서의 제약을 벗어나 '얻기 어렵게' 대아찬 이상의 관등을 소지하기 시작한 부류도 상당수 포함되었다.
9세기 말, 신라 진골은 왕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고위관직은 관료군으로 변화한 제 2골, 즉 득난층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654두품의 구별은 있었지만 신분으로서의 성격이 퇴색되어 관등에 따른 분류에 가까웠다. 또 상당수의 6두품이 득난으로 승격되고 있었으니 아찬 중위제가 제 구실을 하였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최고 지배 신분층이 여타의 신분층과 스스로를 엄격히 구분해 온 골품제의 기본이념은, 이에 이르러 더 이상 찾기 어려웠다. 골품제는 완연히 와해의 국면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신라 신분적 사회는 퇴조의 길로 빠져들게 된다,
3.결론
지금까지 신라 골품제의 구조와 그 변화의 추이를 개괄해보았다. 신라 골품제의 전개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파악할 수 있다. 첫째는, 골품제가 '간'층의 정치사회적 특권을 보호하는 장치로 가능하던 단계였다. 이 단계의 골품제는 '간'층을 골층으로, 비간층을 두품층으로 편제하고 두품층을 1~5두품으로 나눈 형태였다. 두품의 등급은 신라 국가형성과정에서 6부로 편입된 수장층을 그들이 지녀온 지배기반의 크기에 따라 편제함에서 출발한 것이었는데, 두품층의 정치적 기능이 이 등급에 따라 규제되었다. 이 단계의 골품제 전개과정은 나마중위제의 추이에 따라 중위제가 시행되던 때로, 골품제는 '간'중심체제의 근간으로 충실히 기능하였다. 후기는 9중까지의 나마중위제가 대나마에 적용되던 때로, 진골과 6두품이 그 기반과 무관하게 정치적 관계 속에서 생성되면서 나마중위제가 제 기능을 상실해갔고 골품제의 기능에도 변화가 초래되었다.
둘째는, 골품제가 진골 중심의 정치체제에서 기능하던 단계이다. 진골과 6두품이 독자적인 신분층으로 대두한 결과 아찬중위제가 시행되기에 이른 중고기 후엽부터 신라의 멸망에 이르기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진골들은 그들을 추종하는 두품층 인사들의 간군 관등소지를 후원하여 6두품의 대두를 이들을 자신의 인적 기반으로 활용하였다. 유력한 진골 휘하에는 정치적인 진출과 성장을 도모하는 두품층과 지방간층들이 모여들었고 진골은 이 인적 기반을 바탕으로 공실로서 내외직의 요직과 장군직을 독점하였다.
이 단계의 골품제는 진골의 이익을 옹호하는 제도적 장치였고, 두품층에게는 능력과 공훈을 따른 신분의 상승을 보장하는 희망의 보루였다. 두품의 등급은 각자가 오른 관등에 의해 획득되는 것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특히 통일전쟁기의 신라사회에서 발견되는 역동성은 골품제의 이러한 변화에 서 말미암은 것이다.
강력한 왕권을 전제로 한 진골 중심 정치체제가 강화되고 나아가면서 왕실의 정치적 비중이 커지자 현왕의 친족들이 근친혼을 행하는 경향이 두드러졌고 그 결과 진골에 분화현상이 일어났다. 8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진골이 제 1골과 제 2골로 나뉘고 왕실의 규모가 축소된 것이다. 제 1골만이 종래 진골이 누려온 특권을 모두 누렸고, 왕실과 혈연적인 친린관계가 멀어진 제 2골은 점차 관료군화하여 9세기 중엽에는 대등으로 불리다가 말엽에는 득난이라는 독자적인 신분층으로 성립하였다. 왕실 규모의 축소로 인하여 촉발된 진골세력간의 왕위 쟁탈전 과정에서 아찬중위제의 제약을 넘어 대아찬 이상의 관등을 소지하는 6두품층이 생겨났는데, 이들도 득난으로 편입되어 관료군층을 두텁게 하였다. 제 1골만이 진골을 칭하고 제 2골이 ‘득난’이라는 일반화된 관료층으로 성립하기에 미처 골품제는 와해의 국면에 직면하였다. 신라 골품제의 전개과정을 이상과 같이 파악하면 신라사회의 변동과 고려로의 왕조 전환을 좀더 계기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참고문헌
李鍾旭 『新羅骨品制 硏究』 一潮閣 1999.
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 硏究』 一潮閣 1990. p34~64, p186~189
李基東 『新羅骨品制 社會와 花郞道』 普文堂 1984. p20~52
全德在 『新羅六部體制 硏究』 一潮閣 1996. p111~p182
李基東 『新羅社會史 硏究』 一潮閣 1997. p62~70, p198~201
李明植 『新羅政治史 硏究』 螢雪出版社 1992. p75~96
李鍾旭 『新羅上代王位繼承 硏究』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0.
p266~279
신호철 『논문-豪族勢力의 成長과 後三國의 鼎立』
『신라말 고려초의 정치사회변동』 한국고대사연구회 1994.
p139~173
한국의 왕-역사,한국사 이야기. 주소
네이버-지식검색, 백과사전. 주소
※이기동 씨와 이병도 씨의 학설상의 차이점
이기동 : 이기동 씨는 성골과 진골의 차이가 원래는 성골은 없었고 진골 하나만 있었는 데 나중에 불교의 도입으로 인하여 법흥왕계의 진골이 다른 진골과 자신의 가 문을 좀 더 구별하여 부르기 위하여 성골로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성골이 생 겨 났다고 주장한다.
이병도 : 이병도 씨는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좀 더 근원적인 즉, 혈통의 관계에서 차이를 주장한다. 성골은 양가 부모 모두가 왕족 가문의 자녀들이라하고, 진골은 양가 부모 중 어느 한쪽이라도 비왕족의 자녀가 있으면 진골이라 불렀다고 주장한다.
☞위의 두 학설 모두 정설로 입증된 것은 아니며 학계에서는 아직도 성골과 진골에 대한 여 러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때문에 어느 한 학설에 치우치기보다는 여러 학설을 비교해 봄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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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19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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