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쾌락주의.금욕주의비교
2.이기주의 설명
3.스피노자의 세계관
4.칸트의 공리주의 세계관
2.이기주의 설명
3.스피노자의 세계관
4.칸트의 공리주의 세계관
본문내용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깊은 철학에 빠져 있으면서도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객관적 인식으로 얻게 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죽는 날까지 스스로의 본질에 충실할 수 있었던 그의 모습에 나를 비추고 반성하고 나의 가능성을 발견, 발전시키는 것은 나를 위함과 동시에 나와 관계하는 모든 것에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안정된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어쩜 자신의 이기심을 버린 한 철학자의 노력에 내가 표할 수 있는 가장 큰 존경이 아닐까 생각한다.
1년 전부터 현실을 버리고 선택한 진실만을 향한 길에서 난 매일 눈을 뜨면 어제의 판단과 현실과의 괴리로 심한 혼란을 느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 하지만 분명한 나의 충동... 처음엔 나의 뛰어난 판단력에도 쉽게 결론을 얻지 못하는 3~4시간의 혼란을 겪으며 난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집안을 돌아다니곤 했었다. 내가 믿은 것은 이 혼란을 쉽게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는 나의 끝없는 욕구였다. 마치 해가 뜨는 것처럼 나의 넋 나간 정신이 돌아오면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시간이 갈수록 눈 뜬 현실에서 멍한 순간은 2시간, 1시간, 30분, 20분... 점점 줄어갔다. 그런 상황을 겪으며 모두가 반대하는 나의 선택(충동-의식을 넘는 나의 본질이 원하는 방향)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추락하는(일반관념) 현실과 반대로 거울 속 나의 눈빛은 점점 맑아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집안에 나를 가두고 운동을 하지 않고 담배는 하루 3~6갑을 피웠지만 난 하루도 아픈 날이 없었다. 물론 나의 폐는 심한 흡연으로 정상이 아닐 것이지만 스피노자의 말처럼 나의 철학이 깊어질수록 분명한 목적성을 갖는 정신은 기쁨으로 나의 몸에 더 큰 에너지를 제공하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선택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가치를 인정했지만 그것은 스피노자의 생각을 빌어 봐도 큰 모순을 갖는다.
선택을 통해서는 의식을 넘어 존재하는 존재의 본질(목적성)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에 다다를 수 있는 방법을 사르트르는 끝없는 판단과 선택의 반복을 통해 닿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미 스피노자는 한 방향으로의 분석은 마지막에 존재의 근원의 모호성을 얻게 되어 결코 존재의 본질을 발견할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었다.(한 점을 향해 갈 때 그 점은 다시 확장을 거듭하며 결코 점의 중심은 닿을 수 없다.) 결국 선택은 그것이 존재의 본질도 아니며 본질로 닿을 수 있는 최선도 아니다. 선택은 본질을 발견하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나 본질을 깨닫는 것과 분명히 별개의 문제이고 오히려 그 깨달음의 과정에서 깨달은 본질이 바르게 드러나도록 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본질은 이 모든 작용들이 거듭되며 정화(반성)될 때 더 근접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선택의 자유에서 얻는 기쁨 자체에 망각되어 선택의 목적성(본질)을 잃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고 선택의 문제와 사고의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비이성적이라 오해될 수 있는 본질적 욕구(단어의 한계를 넘는 신중한 이해가 필요)를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을 뛰어넘는 존재에 대한 인정과 이기심을 버린 타인과 자연 현상과의 관계를 인정하는 객관적 인식만이 자연스레 바른 판단(선택)을 드러나게 할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놓쳤고 또 그가 이것을 생각했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구체적 현상을 대부분 망각하고 있다.
이는 자동차가 움직이는 것이 단순히 운전석의 조정(선택)만으로 가능하다는 한정된 인식을 갖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자동차는 운전 방법만 알아도 이용하는데 문제가 없고 운전은 편리하고 재미있다. 고장이 나며 수리를 맞기면 되고 못쓰게 되면 폐차시키면 된다. 하지만 의식의 자만으로 자신의 가능성(본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 하여 고장의 원인을 알지 못 해 고통 받거나 그 고통이 두려워 스스로를 단순하고 유치한 장난감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가장 위대한 엔진과 복잡한 부품으로 많은 가능성을 가진 인간의 가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어리석은 모습은 아닌지...
4.칸트의 공리주의 세계관
칸트의 동기주의와 공리주의의 결과주의는 시대가 변해도 아직도 철학적 논쟁이 대상이 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칸트와 공리주의의 철학적 논점을 간단히 설명하면 칸트는 행위의 선악의 판단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우러나는 동기에서만 판단이 된다고 주장하는 의무론자 이자 동기주의입니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하면서 효용성(Utility,즉 공리)의 결과값을 가장 중요시 여긴 쾌락주의자(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것에서 목적론자라고도 할수 있지요)이자 결과주의자 입니다.
이러한 요점을 칸트와 비교하자면, 행위의 선악의 판단은 최대량의 쾌락과 최소량의 고통을 낳는 행위의 결과에 따라 좌우 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 그럼 위의 논술 주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볼 때, 안중근 의사는 이토히로부미를 살인을 했습니다. 칸트는 어떤 행위는 정언 명법 제 1원칙에 해당하는 "나의 행위의 준칙이 보편화 가능하도록 행위하라"에 비춰볼 때 이토 히로부미는 나라를 살리려는 의도이고 좋은 의도에서 살인을 저질렀지만 옳은 일은 아닙니다. (좋음과 옳음과의 구분) 즉 칸트에게 그 행위는 의무나 선의지는 아니란 얘기지요
공리주의 입장에서는 행위의 동기가 어찌되었건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 한 사람을 죽임으로서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국민들이 즐거움을 갖게 되고 쾌락을 증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면 그 행위는 선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공리주의가 어찌보면 우리에게 공감을 많이 얻어내는 이론이기는 하지만, 전체에 의해 개인이 희생 될 수 있다는 아주 중요한 난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칸트 입장에서는 이토히로부미가 아무리 나쁜 일을 했어도 이성과 존엄성을 지닌 인격이기 때문에 죽여서는 안되는 거였죠.
기타 칸트의 공리주의에 대한 참고사이트
http://blog.naver.com/wi11ow?Redirect=Log&logNo=80044075014
1년 전부터 현실을 버리고 선택한 진실만을 향한 길에서 난 매일 눈을 뜨면 어제의 판단과 현실과의 괴리로 심한 혼란을 느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 하지만 분명한 나의 충동... 처음엔 나의 뛰어난 판단력에도 쉽게 결론을 얻지 못하는 3~4시간의 혼란을 겪으며 난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집안을 돌아다니곤 했었다. 내가 믿은 것은 이 혼란을 쉽게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는 나의 끝없는 욕구였다. 마치 해가 뜨는 것처럼 나의 넋 나간 정신이 돌아오면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시간이 갈수록 눈 뜬 현실에서 멍한 순간은 2시간, 1시간, 30분, 20분... 점점 줄어갔다. 그런 상황을 겪으며 모두가 반대하는 나의 선택(충동-의식을 넘는 나의 본질이 원하는 방향)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추락하는(일반관념) 현실과 반대로 거울 속 나의 눈빛은 점점 맑아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집안에 나를 가두고 운동을 하지 않고 담배는 하루 3~6갑을 피웠지만 난 하루도 아픈 날이 없었다. 물론 나의 폐는 심한 흡연으로 정상이 아닐 것이지만 스피노자의 말처럼 나의 철학이 깊어질수록 분명한 목적성을 갖는 정신은 기쁨으로 나의 몸에 더 큰 에너지를 제공하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선택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가치를 인정했지만 그것은 스피노자의 생각을 빌어 봐도 큰 모순을 갖는다.
선택을 통해서는 의식을 넘어 존재하는 존재의 본질(목적성)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에 다다를 수 있는 방법을 사르트르는 끝없는 판단과 선택의 반복을 통해 닿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미 스피노자는 한 방향으로의 분석은 마지막에 존재의 근원의 모호성을 얻게 되어 결코 존재의 본질을 발견할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었다.(한 점을 향해 갈 때 그 점은 다시 확장을 거듭하며 결코 점의 중심은 닿을 수 없다.) 결국 선택은 그것이 존재의 본질도 아니며 본질로 닿을 수 있는 최선도 아니다. 선택은 본질을 발견하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나 본질을 깨닫는 것과 분명히 별개의 문제이고 오히려 그 깨달음의 과정에서 깨달은 본질이 바르게 드러나도록 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본질은 이 모든 작용들이 거듭되며 정화(반성)될 때 더 근접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선택의 자유에서 얻는 기쁨 자체에 망각되어 선택의 목적성(본질)을 잃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고 선택의 문제와 사고의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비이성적이라 오해될 수 있는 본질적 욕구(단어의 한계를 넘는 신중한 이해가 필요)를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을 뛰어넘는 존재에 대한 인정과 이기심을 버린 타인과 자연 현상과의 관계를 인정하는 객관적 인식만이 자연스레 바른 판단(선택)을 드러나게 할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놓쳤고 또 그가 이것을 생각했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구체적 현상을 대부분 망각하고 있다.
이는 자동차가 움직이는 것이 단순히 운전석의 조정(선택)만으로 가능하다는 한정된 인식을 갖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자동차는 운전 방법만 알아도 이용하는데 문제가 없고 운전은 편리하고 재미있다. 고장이 나며 수리를 맞기면 되고 못쓰게 되면 폐차시키면 된다. 하지만 의식의 자만으로 자신의 가능성(본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 하여 고장의 원인을 알지 못 해 고통 받거나 그 고통이 두려워 스스로를 단순하고 유치한 장난감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가장 위대한 엔진과 복잡한 부품으로 많은 가능성을 가진 인간의 가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어리석은 모습은 아닌지...
4.칸트의 공리주의 세계관
칸트의 동기주의와 공리주의의 결과주의는 시대가 변해도 아직도 철학적 논쟁이 대상이 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칸트와 공리주의의 철학적 논점을 간단히 설명하면 칸트는 행위의 선악의 판단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우러나는 동기에서만 판단이 된다고 주장하는 의무론자 이자 동기주의입니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하면서 효용성(Utility,즉 공리)의 결과값을 가장 중요시 여긴 쾌락주의자(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것에서 목적론자라고도 할수 있지요)이자 결과주의자 입니다.
이러한 요점을 칸트와 비교하자면, 행위의 선악의 판단은 최대량의 쾌락과 최소량의 고통을 낳는 행위의 결과에 따라 좌우 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 그럼 위의 논술 주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볼 때, 안중근 의사는 이토히로부미를 살인을 했습니다. 칸트는 어떤 행위는 정언 명법 제 1원칙에 해당하는 "나의 행위의 준칙이 보편화 가능하도록 행위하라"에 비춰볼 때 이토 히로부미는 나라를 살리려는 의도이고 좋은 의도에서 살인을 저질렀지만 옳은 일은 아닙니다. (좋음과 옳음과의 구분) 즉 칸트에게 그 행위는 의무나 선의지는 아니란 얘기지요
공리주의 입장에서는 행위의 동기가 어찌되었건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 한 사람을 죽임으로서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국민들이 즐거움을 갖게 되고 쾌락을 증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면 그 행위는 선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공리주의가 어찌보면 우리에게 공감을 많이 얻어내는 이론이기는 하지만, 전체에 의해 개인이 희생 될 수 있다는 아주 중요한 난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칸트 입장에서는 이토히로부미가 아무리 나쁜 일을 했어도 이성과 존엄성을 지닌 인격이기 때문에 죽여서는 안되는 거였죠.
기타 칸트의 공리주의에 대한 참고사이트
http://blog.naver.com/wi11ow?Redirect=Log&logNo=80044075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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