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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등이 있다.
보다 자세하게 말하면 마르틴 부버(1878~1965)는 유대인으로 1878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세 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어린 시절을 렘베르크에 있는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의 조부 솔로몬 부버는 유대인 사이에서 이름 높은 학자로서 그 지방의 '하스칼라(계몽운동)'를 이끌던 지도자였다. 렘베르크는 옛 폴란드령으로 그 당시 유럽에 살고 있던 유대인의 학문적 중심지였다. 따라서 부버는 학문 연구에 다시 없이 적합한 환경에서 자라났으며, 히브리어와 유대교, 그리고 유대 민족의 구비전설(口碑傳說)에도 정통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의 부버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인상을 준 것은 하시디즘의 신봉자들과 함께 보낸 생활의 체험이었다. 그는 빈과 베를린의 여러 대학에서 철학과 미술사를 전공했고, 이 무렵에 대두하기 시작한 시오니즘 운동에 가담, 그 기관지의 편집을 맡았다. 1916년 시오님즘의 전파를 목적으로 한 '선민(選民)'지를 창간하여 그 주필로 활약한 한편, 독일 신비주의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19세기의 사상가들, 특히 키에르, 케고르,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등의 강력한 영향하에 변화를 보이면서 저 유명한 '나와 너'의 사상이 명확한 윤곽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1923년부터 10년간 프랑크 푸르트 대학에서 비교종교학 강의를 해오다가 1933년 나치스에 의해 국외로 추방되어 각국을 전전하다가 1938년 만 60세에 팔레스티나에 정착,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에서 사회철학을 교수로 활동하였으며 1965년 85세를 일기를 세상을 마쳤다.
보다 자세하게 말하면 마르틴 부버(1878~1965)는 유대인으로 1878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세 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어린 시절을 렘베르크에 있는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의 조부 솔로몬 부버는 유대인 사이에서 이름 높은 학자로서 그 지방의 '하스칼라(계몽운동)'를 이끌던 지도자였다. 렘베르크는 옛 폴란드령으로 그 당시 유럽에 살고 있던 유대인의 학문적 중심지였다. 따라서 부버는 학문 연구에 다시 없이 적합한 환경에서 자라났으며, 히브리어와 유대교, 그리고 유대 민족의 구비전설(口碑傳說)에도 정통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의 부버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인상을 준 것은 하시디즘의 신봉자들과 함께 보낸 생활의 체험이었다. 그는 빈과 베를린의 여러 대학에서 철학과 미술사를 전공했고, 이 무렵에 대두하기 시작한 시오니즘 운동에 가담, 그 기관지의 편집을 맡았다. 1916년 시오님즘의 전파를 목적으로 한 '선민(選民)'지를 창간하여 그 주필로 활약한 한편, 독일 신비주의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19세기의 사상가들, 특히 키에르, 케고르,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등의 강력한 영향하에 변화를 보이면서 저 유명한 '나와 너'의 사상이 명확한 윤곽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1923년부터 10년간 프랑크 푸르트 대학에서 비교종교학 강의를 해오다가 1933년 나치스에 의해 국외로 추방되어 각국을 전전하다가 1938년 만 60세에 팔레스티나에 정착,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에서 사회철학을 교수로 활동하였으며 1965년 85세를 일기를 세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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