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정리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해당 자료는 10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0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요한복음 정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도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이 경륜적 삼위일체는 삼위일체론의 원래 정신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이단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숫사적 개념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바른 관점 = 바울이, 요한이, 마태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그 구원을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즉 초월하신 하나님이 내재적으로 구원을 이루어나가시는 것을 인간의 말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님으로 붙이고, 보내심, 보냄을 받음 등의 말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게 왜 이렇게 귀중한가? 바로 초월과 내재가 동시적으로 되어야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초월은 구원할 수 있는 전능자를 의미한다. 내재 밖에서만이 구원할 수 있다. 그런데 초월 상태로만 머물면 구원이 불가능. 내재로 오셔야 한다. 그래서 초월자로서 내재하시려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의 귀중함을 알려면 세 가지 고등종교 신론을 알아야 한다.1) 범신론(pantheism)-주로 인도계통의 종교. 힌두교. 불교는 개혁힌두교라 할 수 있는데. 이 힌두교와 불교는 신의 내재만 있고 초월이 없다. 온 우주가 신. 좀더 말하면 온 우주의 본질이 신이라고 한다. 이 본질이 투영된 것이 우리가 육감으로 체험하는 세계인 것이다. 이 본질이 다양한 것으로 현상하는 것이다. 다 신의 그림자, 투영, 현상(phenomena)이다. 이것은 플라톤 체계와 동일하다. 그래서 Monism에서 Dualism으로 전개되는 것이 똑같다. 그래서 인도 철학은 신론을 수레바퀴로 설명한다. 수레바퀴의 축은 돌지 않는다. 축은 영의 세계, 불변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 현상은 시간의 세계이다. 변화의 세계. 4고(苦). 낳고, 병들고, 죽고. 이것이 계속된다. 윤회. 영겁의 윤회이다.
여기서 구원론은 영겁의 윤회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자아가 없어야 한다. 우주의 본질에 뛰어들어 본질과 하나가 되고 자아가 없어져야 한다. 무아. 그럼 누가 그렇게 해야 하는가? 아무도 밖에서 도울 수 없다. 내가 해야 한다. 자력구원. 어떻게? 지식으로. 이 현상의 세계가 가짜임을 아는 지식. 이 지식을 베다(Veda). 플라톤 철학과 동일.
2) 이신론(deism) - 이슬람식 신론. 초월을 너무 강조해서 내재를 부인한다. 신이, 알라가 너무 거룩해서 이 피조세계에 오지 않는다. 이것을 부재의 신론이라고도 한다. 신이 세계를 정교하게 만들어놓고. 마치 시계공이 시계를 잘 만들어서 놓아두듯이, 신도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대로 돌아가도록. 완전한 숙명에 의해서 이루어짐. 인슐라=알라의 뜻대로. 숙명주의는 별로 소망이 없어서 구원을 말한다. 구원은 역시 자력구원. 코란을 잘 지키고 선행. 거의 모든 자력구원은 지식과 선행을 강조한다. 선행. 절하고, 성전에서 순교하는 것이 제일 좋음.
자력구원은 인간이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이고, 결국 휴머니즘에 바탕한다. 결국 신이 필요없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인도계열의 종교에서는 신이 따로 없고, 그 내 안에 신이 있다. 이슬람에서는 신이 있는데 나에게 오지를 않는다. 내가 가야한다.
그럼으로 진짜 구원이 있으려면 초월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야 한다. 이러한 신론을 Theism이라 한다. 유대인의 theism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바울, 요한 등이 이것을 위의 삼위일체로서 그려낸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즉 Unity), 그 분이 초월하시고 내재하셔야 하니까, 그러한 설명을 한 것이다. 만일 이것을 숫자 놀음(셋이 어떻게 하나되는가)으로 접근하면 엉뚱한 결론이 나타난다. 숫자 놀음에 대한 답은 모름이며, 하나님의 신비이다.
시간이 없네요.
한마디만 더할께요.왜 고별사의 주 내용이 아버지께로 올라감을 들어올려짐이라 하고 영광 받음이라 하는가? 십자가의 들림이 수난이 아니고 영광이라 하는가? - 내어줌의 형식은 요 3.16에서 말한 바 하나님 + 그의 아들 + 주셨다 + 목적(구원).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는 십자가의 사건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계시자인 하나님의 아들이 ①‘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영광의 원래 의미? 바로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남. 그의 본질에 직면하면 사람들이 놀라 찬탄하게 하는 것. 그래서 영광이 된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용서하시는 그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나고 그 분에게 놀라게 되며 찬탄하게 된다.- 이 행위는 대속과 새언약의 제사로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행위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함으로서 ②‘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셨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고 선언. 여기서 이슬람의 신과 다른 것이다. 이 차디찬 세상에 내동댕이쳐버린 것이 아니고.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함으로써 결국 아들은 ③자신을 계시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계시. 이는 결국 아들=아버지 구도의 계시이다. 그래서 ④하나님의 계시자는 하나님과 같음(계시의 제1원리 참조)을 보여줌으로, 예수의 본질이 드러난 것이다. 본질이 드러남이 무엇인가? 영광 받음이 아닌가? 예수의 계시자로서의 본질이 드러남으로 그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슬픈 수난이 아니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을 본 것. 사랑=자신을 내어줌. 이 십자가의 사건에서 사랑이 정의됨, 자신을 내어줌에서 정의됨. 인간의 근본문제는 자기주장. 죄. 이로 인한 죽음. 이 죽음을 이기는 방법은 거꾸로 자신을 내어줌(↔자기 주장). 사랑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모습이다. 사랑만이 치유의 힘이 있다. 우리 주변에서 알 수 있다. 사랑만이 치유의 힘이지만, 그것도 초월자의 사랑일 때 온 인류의 구원이 가능하다. 이게 예수의 메시아적 사건이다. 십자가 사건으로 하나님과 같아짐, 들어올려짐이 됨. 그래서 십자가로 들어올려질 때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자임을 알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조그만 잘못해도 진노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인상을 갖고 있는가? 자신을 내어줄 정도로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 것이다. 이것을 선포하려는 것이 요한복음이다. 요한의 복음.
  • 가격3,000
  • 페이지수31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0324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