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전 한국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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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해방전 한국교회목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사였지만 계속해서 NAE 파에서 무효를 주장하면서 에큐메니칼파는 용공주의 신신학 단일교회 운동이라고 왜친 소리에 장내가 몹시 소란하게 됐다이 일로 더 이상 총회를 계속 할 수 없어서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정회를 선언하고 나자 회의장내는 더욱 소란해지면서 에큐메니칼파와 Nae 파가 갈라서게 됐다. 에큐메니칼파는 즉시 서울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회하였으며 총회장에 이창규 목사가 피선됐다. 후에 이 파를 통합측이라 부르게 됐다. nae 파는 합동측이라 부르게 됐으며 그해 11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속회하고 양화석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자 예장은 두 교파로 분립하게 됐다.
그 후 두 파가 서로 등을 돌리고 갈라서자 자연히 남산에 소재하고 있던 장로회신학교도 둘로 갈라지게 됐다. 1959년 9월 이사회에서 계일승 박사를 교장으로 선임하였으며 이 일로 신학교에 교장이 2명이나 됐다.통합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통합측은 광나루에 교사를 마련하여 장로회신학교라 부르게 됐고 합동측은 ICC(국제 기독교연합회)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용산 역전에 빌딩을 매입하여 총회신학교라는 간판을 내결로 신학교를 운영하였다.이 일로 함께 공부했던 많은 이들이 상처를 안고 서로 갈라서야 하는 아픔을 격게됐다. 현재는 통합 측의 신학교는 장로회신학대학교로 발전하였으며 역시 합동측도 그 후 사당동에 자리잡고 총신대학교로 발전하여으며. 사당 캠퍼스는 학부만 운영하고 신대원은 경기도 용인시 양지리 캠퍼스에서 운영하고 있다. 두 신학교 모두 2001년 학교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갖기도 하였다.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5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05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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