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부의 입장에서는 한민족의 \'불행\'보다는 선교활동의 자유와 교회의 보호가 궁극적인 과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선교사들은 개신교인의 정치활동을 봉쇄하고 교회가 민족운동의 통로로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하였다. 한말에 국권의 위기가 고조되고 국권의 상실이 가시화되던 시점에 전국적 차원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은 선교사들에 의한 교회의 \'비정치화\' 전략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한일합병\' 과정과 3.1운동 당시에 선교사들이 보여준 태도에서도 정교분리원칙을 내세운 선교사들의 선교 및 교회 지상주의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그러면 식민지 치하 한국 개신교인들은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었는가?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은 외국인 선교사들과는 달리 민족의 운명과 민족의 독립이라는 문제에 결코 무관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식민지 치하의 민중이라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민족운동에 동참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 동안 한국 개신교사 연구에서 드러난 다양한 형태의 개신교 민족운동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일제하 개신교의 민족운동은 하나의 일관된 성격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개신교의 민족운동이 일제에 전면적으로 항거하는 비타협적 운동보다는 사회운동, 계몽운동, 문화운동, 절제운동, 농촌운동 등의 표현에서 잘 나타나듯이 비정치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일제하 개신교는 \'정교분리 원칙\'이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확보된 \'상대적 자율성\'의 공간 안에서만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개신교의 민족운동은 사회주의 진영이나 비타협적 민족주의 운동 진영으로부터 \'민족개량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처럼 일제하 개신교는 \'과격한\' 민족운동이 아니라 \'온건한\' 민족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교회를 보호하는 동시에 당시 한국인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긍정적\' 이미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즉 개신교 \'주류\'가 \'적극적 친일\'이나 \'적극적 항일\'보다는 \'온건한\' 형태의 민족운동에 동참한 것이 교세 확장에 오히려 기여하였던 것이다. 만일 개신교가 \'과격한\' 형태의 항일운동으로 나아갔다면 교회의 존립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며 이와 반대로 \'적극적 친일\'로 나아갔다면 \'사회적 공신력\' 자체를 상실함으로써 해방 이후 종교지형에서 유리한 기반을 확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하 개신교는 민족운동에 \'적절히\' 동참함으로써 해방 이후 종교지형의 헤게모니 투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 개신교공화국과 반공이데올로기
이처럼 개항기에 \'문명\'과 \'힘\'의 종교로 수용되고 식민지 치하에서는 민족운동에 \'적절히\' 동참한 역사를 지닌 개신교는 해방 이후 선교활동과 교세확장에 더욱 유리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일제가 물러난 그 자리에 개신교 선교사들의 모국인 미국의 주둔군이 3년간 통치하게 되고, 그 뒤에는 다시 친미 반공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미군정에서 제1공화국으로 이어지는 이 15년의 기간 동안 개신교는 한국사회에서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이 시기에 개신교는 인적, 물적, 제도적 차원에서 타종교의 추월을 불허하는 확고한 기반을 닦았기 때문이다.
먼저 인적 측면을 보자. 일제의 급작스러운 퇴각으로 통치행정에 심각한 공백이 생기자 미군정은 현지 사정에 밝을 것으로 예상되는 선교사들에게 인사 추천을 부탁하였다. 특히 당시 미국 선교사의 아들이며 해군 대령인 윌리암스(G. Z. Williams)가 인물 추천을 주로 담당하였는데 그는 개신교인을 대거 천거하였다. 그 결과 제1공화국의 주요 국가기관과 고위직에는 개신교 인사들이 광범위하게 포진하게 되었다. 최고통치자인 이승만 대통령이 감리교회의 장로였고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이 감리교회의 집사였다는 사실은 이 시기 개신교의 사회정치적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 개신교가 문화 형성에 미친 영향
1) 침례교의 분열.
1921년 당시의 교회명칭은 동아기독교회였던 것이 1947년 대한기독교회를 세워 분립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대한기독교침례회로 이름이 바꾼 교단을 미국 남침례회 선교부의 도움으로 교안을 세워갈 수 있었다. 6.25 전쟁으로 한국사회를 위해 구호사업을 전개하면서 미국 남침례회의 규약을 따라 연맹총회로 바꾸고 교단 명칭도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으로 변경하였다.
미국 남침례회의 원조로서 교세는 확장했다. 그러나 분열의 주요 원인은 선교자금을 둘러싼 교권투쟁이었다. 주류축과 비주류축의 투쟁이었다. 주류축은 동아기독교 맥을 이어온 사람이고, 비주류축은 다른 교단에서 영입되어온 사람들이다. 마침내 1968년 4월 두 교단이 통합하며 한국침례회연맹이 탄생하였다. 한국침례회연맹은 1976년에 교단이름을 다시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바꾸었다.
2) 새로운 교단의 등장
해방이전에는 한국기독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중심을 차지하고 그 주위에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 성공회, 복음교회 등 군소교파 그리고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등 기독교계 신흥종파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해외에서 새로운 교단들이 생겨나면서 기독교의 지형은 더욱 복잡한 양상이 띠게 되었다. 교단으로는 오순절교회, 루터교, 나사렛교회, 퀘이커, 모르몬교 등이 있었다.
나사렛교회는 19세기말 20세기초 감리교 중심으로 전개된 미국의 성결, 오순절 운동 과정에서 등장했다. 오순절교회는 해방이전 영국선교사들을 통해 오순절계통의 교회들이 세워지면서 시작했지만, 나사렛교회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성결, 오순절운동에서 출발한 오순절계 교단의 가장 큰 특징은 물세례와 구별되는 성령세례를 강조했다는 점이다. 특히 1953년에 세워진 순복음 신학교출신의 종용기와 최자실이 개척한 천막교회가 세계 최대규모의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발전하면서 오순절 운동은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루터교는 개신교회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전세계적으로 교세가 가장 큰 개신교 교파의 하나다. 그러나 루터교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해방이후 1958년이다. 기독교한국루터교회는 21세기초 40여개의 교회로 발전했다. 퀘이커는 17세기 영국에서 시작한 소종파로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퀘이커는 친우회라 한다. 1959년 미국인 친우회원 미
그러면 식민지 치하 한국 개신교인들은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었는가?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은 외국인 선교사들과는 달리 민족의 운명과 민족의 독립이라는 문제에 결코 무관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식민지 치하의 민중이라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민족운동에 동참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 동안 한국 개신교사 연구에서 드러난 다양한 형태의 개신교 민족운동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일제하 개신교의 민족운동은 하나의 일관된 성격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개신교의 민족운동이 일제에 전면적으로 항거하는 비타협적 운동보다는 사회운동, 계몽운동, 문화운동, 절제운동, 농촌운동 등의 표현에서 잘 나타나듯이 비정치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일제하 개신교는 \'정교분리 원칙\'이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확보된 \'상대적 자율성\'의 공간 안에서만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개신교의 민족운동은 사회주의 진영이나 비타협적 민족주의 운동 진영으로부터 \'민족개량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처럼 일제하 개신교는 \'과격한\' 민족운동이 아니라 \'온건한\' 민족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교회를 보호하는 동시에 당시 한국인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긍정적\' 이미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즉 개신교 \'주류\'가 \'적극적 친일\'이나 \'적극적 항일\'보다는 \'온건한\' 형태의 민족운동에 동참한 것이 교세 확장에 오히려 기여하였던 것이다. 만일 개신교가 \'과격한\' 형태의 항일운동으로 나아갔다면 교회의 존립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며 이와 반대로 \'적극적 친일\'로 나아갔다면 \'사회적 공신력\' 자체를 상실함으로써 해방 이후 종교지형에서 유리한 기반을 확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하 개신교는 민족운동에 \'적절히\' 동참함으로써 해방 이후 종교지형의 헤게모니 투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 개신교공화국과 반공이데올로기
이처럼 개항기에 \'문명\'과 \'힘\'의 종교로 수용되고 식민지 치하에서는 민족운동에 \'적절히\' 동참한 역사를 지닌 개신교는 해방 이후 선교활동과 교세확장에 더욱 유리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일제가 물러난 그 자리에 개신교 선교사들의 모국인 미국의 주둔군이 3년간 통치하게 되고, 그 뒤에는 다시 친미 반공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미군정에서 제1공화국으로 이어지는 이 15년의 기간 동안 개신교는 한국사회에서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이 시기에 개신교는 인적, 물적, 제도적 차원에서 타종교의 추월을 불허하는 확고한 기반을 닦았기 때문이다.
먼저 인적 측면을 보자. 일제의 급작스러운 퇴각으로 통치행정에 심각한 공백이 생기자 미군정은 현지 사정에 밝을 것으로 예상되는 선교사들에게 인사 추천을 부탁하였다. 특히 당시 미국 선교사의 아들이며 해군 대령인 윌리암스(G. Z. Williams)가 인물 추천을 주로 담당하였는데 그는 개신교인을 대거 천거하였다. 그 결과 제1공화국의 주요 국가기관과 고위직에는 개신교 인사들이 광범위하게 포진하게 되었다. 최고통치자인 이승만 대통령이 감리교회의 장로였고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이 감리교회의 집사였다는 사실은 이 시기 개신교의 사회정치적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 개신교가 문화 형성에 미친 영향
1) 침례교의 분열.
1921년 당시의 교회명칭은 동아기독교회였던 것이 1947년 대한기독교회를 세워 분립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대한기독교침례회로 이름이 바꾼 교단을 미국 남침례회 선교부의 도움으로 교안을 세워갈 수 있었다. 6.25 전쟁으로 한국사회를 위해 구호사업을 전개하면서 미국 남침례회의 규약을 따라 연맹총회로 바꾸고 교단 명칭도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으로 변경하였다.
미국 남침례회의 원조로서 교세는 확장했다. 그러나 분열의 주요 원인은 선교자금을 둘러싼 교권투쟁이었다. 주류축과 비주류축의 투쟁이었다. 주류축은 동아기독교 맥을 이어온 사람이고, 비주류축은 다른 교단에서 영입되어온 사람들이다. 마침내 1968년 4월 두 교단이 통합하며 한국침례회연맹이 탄생하였다. 한국침례회연맹은 1976년에 교단이름을 다시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바꾸었다.
2) 새로운 교단의 등장
해방이전에는 한국기독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중심을 차지하고 그 주위에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 성공회, 복음교회 등 군소교파 그리고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등 기독교계 신흥종파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해외에서 새로운 교단들이 생겨나면서 기독교의 지형은 더욱 복잡한 양상이 띠게 되었다. 교단으로는 오순절교회, 루터교, 나사렛교회, 퀘이커, 모르몬교 등이 있었다.
나사렛교회는 19세기말 20세기초 감리교 중심으로 전개된 미국의 성결, 오순절 운동 과정에서 등장했다. 오순절교회는 해방이전 영국선교사들을 통해 오순절계통의 교회들이 세워지면서 시작했지만, 나사렛교회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성결, 오순절운동에서 출발한 오순절계 교단의 가장 큰 특징은 물세례와 구별되는 성령세례를 강조했다는 점이다. 특히 1953년에 세워진 순복음 신학교출신의 종용기와 최자실이 개척한 천막교회가 세계 최대규모의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발전하면서 오순절 운동은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루터교는 개신교회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전세계적으로 교세가 가장 큰 개신교 교파의 하나다. 그러나 루터교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해방이후 1958년이다. 기독교한국루터교회는 21세기초 40여개의 교회로 발전했다. 퀘이커는 17세기 영국에서 시작한 소종파로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퀘이커는 친우회라 한다. 1959년 미국인 친우회원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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