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목 차 -
1. 의령군의 연혁
2. 의령의 전설
①남천 의령구름다리의 전설
②효열비에 쓰인 이야기
3. 의령의 상징
①마스코트 :홍의장군
② 소싸움캐릭터 : 범이와꺽쇠
4. 문화유산
①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②보천사지 삼층석탑
5. 주요관광지
①의령구름다리
②봉황대
③백산 안희제선생 생가
1. 의령군의 연혁
2. 의령의 전설
①남천 의령구름다리의 전설
②효열비에 쓰인 이야기
3. 의령의 상징
①마스코트 :홍의장군
② 소싸움캐릭터 : 범이와꺽쇠
4. 문화유산
①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②보천사지 삼층석탑
5. 주요관광지
①의령구름다리
②봉황대
③백산 안희제선생 생가
본문내용
현기증이 날 정도이지만 사방을 둘러보면 주변의 자연경관이 한눈에 들어와 흡사 전망대에 올라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꿈의 구름다리는 충익사, 의령천, 남산 산림욕장을 연계한 새로운 관광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②봉황대
봉황대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일원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이곳에서 벽계저수지를 향해 꺾어드는 길 초입의 산과 바위 그리고 정자이름이 모두 봉황대다.의령읍에서 동북간으로 의령 기점 약20km 지점. 이 봉황대는 한마디로 기암괴석이 연출하는 일대장관이다.설악의 절경인들 이에서 더 하랴, 가히 금강산 절경의 부분 축소판이라 할 것이니 신비한 자연의 조화 앞에는 누구라도 넋을 빼앗기기에 꼭 알맞은 아름다운 경관이다.
봉황대 돌계단을 따라서 오르면 암벽사이로 자연 동굴이 하나 있고 이 동굴을 지나면 좁은 석문이 앞을 가로 막는다.이 석문을 간신히 빠져 나서면 또 다시 동굴을 하나 만나게 되는 바 이 곳에는 사시사철을 철철이 넘쳐흐르는 약수터가 있어, 봉황대를 찾는 이들은 여기서 일단 시원한 목을 축이기도 한다.
봉황대 중턱에는 약간의 평지를 깎아 누대 하나를 마련해 두었으니 이름하여 봉황루이다.50여명이 앉아 놀 수 있는 봉황새의 머리처럼 생긴 이 봉황루에서는 인근의 유생들에 의해 잦은 시화 모임도 있었다고 하니 지금은 가고 없는 옛 사람들의 풍류를 잠시 엿보는 듯 현실의 눈에 선연하다.바로 옆에는 세계 최대 동굴법당으로 잘 알려진 일붕사라는 큰 절이 있어 불자들의 내왕이 많은 곳이다
③백산 안희제선생 생가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168번지
-항일애국지사인 백산 안희제선생이 태어나서 자란 집으로 안채와 집사실의 2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조기와 및 슬래트로 되어 있다.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 구조이고 집사실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 구조이다.이들 가옥은 조선 후기 민가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다.뒷산에는 백산선생이 학문을 닦았던 고산제가 남아 있으며, 백산 생가는 후세인들의 산교육장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안희제 선생 소개
1885년 부림면 입산리에서 고고한 아침해를 받아 큰 인물 한 사람이 나왔으니 그분이 바로 민족의 선각자 백산 안희제 선생님이시다.선생님은 일찍이 후학 양성에 뜻을 두어 1907년 상남학교를 세웠으며 1908년에는 의신학교, 1909년에는 동래구명학교와 대구 교남학교를 설립하는 등 신학문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창 혈기 왕성하던 27세 때는 만주에서 대동청년단을 조직한 후 소련으로 망명하여 독립순보를 간행하기도 하였다.이후 서른 살 되던 해 조국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세워 일제치하의 조선 독립을 위한 자본금 마련에 진력 하셨고 1926년에는 언론창달을 위해 시대일보를 인수하였는가 하면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및 1943년 만주 대종교단 사건으로 구금되어 옥고를 치루다 출옥 4시간 만인 1943년 8월 3일 평생의 소원이던 조국독립을 지켜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운명하셨으니 조국광복을 위해 희생한 대한의 큰별 역사에 찬연하다.
②봉황대
봉황대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일원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이곳에서 벽계저수지를 향해 꺾어드는 길 초입의 산과 바위 그리고 정자이름이 모두 봉황대다.의령읍에서 동북간으로 의령 기점 약20km 지점. 이 봉황대는 한마디로 기암괴석이 연출하는 일대장관이다.설악의 절경인들 이에서 더 하랴, 가히 금강산 절경의 부분 축소판이라 할 것이니 신비한 자연의 조화 앞에는 누구라도 넋을 빼앗기기에 꼭 알맞은 아름다운 경관이다.
봉황대 돌계단을 따라서 오르면 암벽사이로 자연 동굴이 하나 있고 이 동굴을 지나면 좁은 석문이 앞을 가로 막는다.이 석문을 간신히 빠져 나서면 또 다시 동굴을 하나 만나게 되는 바 이 곳에는 사시사철을 철철이 넘쳐흐르는 약수터가 있어, 봉황대를 찾는 이들은 여기서 일단 시원한 목을 축이기도 한다.
봉황대 중턱에는 약간의 평지를 깎아 누대 하나를 마련해 두었으니 이름하여 봉황루이다.50여명이 앉아 놀 수 있는 봉황새의 머리처럼 생긴 이 봉황루에서는 인근의 유생들에 의해 잦은 시화 모임도 있었다고 하니 지금은 가고 없는 옛 사람들의 풍류를 잠시 엿보는 듯 현실의 눈에 선연하다.바로 옆에는 세계 최대 동굴법당으로 잘 알려진 일붕사라는 큰 절이 있어 불자들의 내왕이 많은 곳이다
③백산 안희제선생 생가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168번지
-항일애국지사인 백산 안희제선생이 태어나서 자란 집으로 안채와 집사실의 2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조기와 및 슬래트로 되어 있다.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 구조이고 집사실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 구조이다.이들 가옥은 조선 후기 민가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다.뒷산에는 백산선생이 학문을 닦았던 고산제가 남아 있으며, 백산 생가는 후세인들의 산교육장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안희제 선생 소개
1885년 부림면 입산리에서 고고한 아침해를 받아 큰 인물 한 사람이 나왔으니 그분이 바로 민족의 선각자 백산 안희제 선생님이시다.선생님은 일찍이 후학 양성에 뜻을 두어 1907년 상남학교를 세웠으며 1908년에는 의신학교, 1909년에는 동래구명학교와 대구 교남학교를 설립하는 등 신학문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창 혈기 왕성하던 27세 때는 만주에서 대동청년단을 조직한 후 소련으로 망명하여 독립순보를 간행하기도 하였다.이후 서른 살 되던 해 조국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세워 일제치하의 조선 독립을 위한 자본금 마련에 진력 하셨고 1926년에는 언론창달을 위해 시대일보를 인수하였는가 하면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및 1943년 만주 대종교단 사건으로 구금되어 옥고를 치루다 출옥 4시간 만인 1943년 8월 3일 평생의 소원이던 조국독립을 지켜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운명하셨으니 조국광복을 위해 희생한 대한의 큰별 역사에 찬연하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