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의 변천사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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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복싱의 변천사에 대해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고대의 복싱
2. 중세와 현대의 복싱
3. 한국복싱의 발전사

본문내용

두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회장단의 기능 상실로 집행부가 마비되었으나, 9월 임시총회에서 자유당 국회의원 이재학 대신 집권 민주당의원 유진산과 김형삼을 각각 회장과 부회장으로 추대함으로써 한국 복싱협회는 제 기능을 회복했다. 새로 구성된 집행부에서는 우리나라 복싱계도 선진 외국의 추세에 따라 커미션제도를 도입할 것을 결의함으로써 복싱 발전의 기틀을 더욱 다져갔다.
Korea Box Commission이 주관한 첫 경기로 1960년 11월 30일에 동양타이틀전이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강세철 선수는 필리핀의 러시 메이언 선수를 맞아 주니어 미들급 초대챔피언 결정전에서 5회 2분 22초만에 KO승을 거둠으로써 국내를 축제분위기로 만들기도 하였다.
4) 도약기
우리 나라에 복싱이 전래(1916년) 된 지 꼭 반 세기만인 1966년 6월 25일 김기수 선수가 이탈리아의 벤 베누티를 물리치고 WBA 미들급 타이틀을 획득함으로써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세계 정상 도전에 성공하였다. 이는 광복과 전란 이후 복서인이 국민에게 준 최대의 선물이었다.
프로 복싱계에서 신화를 창조한 것은 1974년 7월 3일 WBA 밴텀급 타이틀전이다. 홍수환 선수가 적지 남아공화국에서 챔피언 카라스키야선수를 맞아 4번 다운되고서도 상대를 KO시키고 새 챔피언이 된 것이다. 이 경기에서 보여준 홍수환의 승부근성은 국내의 많은 복서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각 체급 세계 챔피언들의 탄생 및 우수한 선수들이 등장하였다.
아마추어 복싱계도 그 활동이 활발해져서 1961년에 대한석탄공사, 1962년에 해군 등 정부투자기관과 국군부대에 복싱부가 창설되었으며, 1963년 7월에 제 1회 성의경배쟁탈 전국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전국에 복싱체육관이 70여 개나 확장 운영되고, 복싱인구도 점차 증가하였다.
특히 선진제국 복싱 기량을 도입하기 위해서 유명한 복싱 코치들이 많이 초청되었다. 1963년 10월에는 동경 올림픽을 대비하여 미국인 Joe Herman을 초청, 선수 훈련 강화에 박차를 가했고, 1972년에는 영국인 Terry Spinks가, 1982년에는 미국인 Christo G. Hitopolous, 1983년에는 Robert Dorsey, 1985년에는 캐나다 Bolish Gitman 등이 초청되어 한국 복싱의 새로운 기술 개발에 일조 하였다.
1982년, 한국 화약의 김승연 회장이 아마 복싱연명 회장에 취임함으로써 복싱 선수의 기량 개발과 복싱인의 활동이 한층 활발해질 수 있었다. 그 결과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금. 은. 동메달 각 1개씩 획득하여 한국 복싱의 저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그 여세를 몰아 1986년 10회 아시안게임에서는 12체급 전체에서 금메달 획득이라는 복싱 역사상 초유의 획기적 성과를 거두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복싱계가 짧은 연륜 속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던 것은, 1962년에 시작된 경제개발 5년 계획의 추진으로 국민들의 경제생활이 향상되었고, 국력신장의 여력이 체육계에 쏟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정부와 기업체에서 복싱인의 활동을 적극 뒷받침하기 시작했으며, 그에 힘입어 복싱 인구의 저변이 확대 되어갔던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1960년대에 전국이 복싱체육관이 40개이던 것이 1970년대에는 70개, 1988년 초에 이르러서는 360여 개로 늘어난 데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복싱인들의 국제활동 및 국제관련단체와의 교류 등에도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다. 1946년 행방 이듬해 4월에는 국제아마추어 복싱연맹(AIBA)에 가입하였고, 1960년에는 3명의 국내 복싱인이 국제 심판자격 (Licence)을 획득했으며, 1988년에는 9명으로 증가했다. 1982년이래 김승연 회장이 AIBA 부회장 겸 FAAB 회장으로 활동한 사실은 1974년 9월 탄자니아에서 개최된 AIBA총회에서 김택수 회장이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이후 복싱 외교의 신장세를 나타내 준 것이라 하겠다.
도약기에 있어서 복싱의 발전은 국가의 정책적인 지원과 그에 따른 복싱의 저변인구 확대, 그리고 전국적인 체육관의 확장 등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대한체육회에서는 1976년부터 연금제도를 마련, 국위를 선양한 선수들에게 훈련비를 지급하는 우대책을 마련했다. 이 제도는 1948년 제 14회 런던올림픽대회 이후 지난 제 23회 LA올림픽과 아시안게임까지 국제대회에서의 전적을 점수제로 계산한 후 금장. 은장. 동장으로 구분 매월 지급하고 있으며, 우수 선수들을 육성시킨 체육관 관장에게도 이 제도를 적용하고 있다.
이와 함께 1981년부터 전국 소년체전에 복싱을 정식 종목으로 채택하여 중학생들에게까지 확대시켜 나갔다. 이에 앞서 1977년 11월 이후 우수선수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온 古 김명복배 학생선수권대회 등도 좋은 자극제 역할을 했다.
복싱의 저변인구가 이처럼 확장일로에 있게 되자, 종전에 대한 아마추어복싱연맹에서만 주관해 오던 경기를 중. 고등연맹, 대학연맹 및 전국 가지의 시. 도 연맹에서도 독자적으로 각종 복싱대회를 개최할 수 있게 되어,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의 기회가 전국적으로 균등하게 확산되었다.
이들 연맹의 지원에 힘입어 국내 선수들간의 시합 뿐 아니라 외국 선수들과의 경기도 자주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국제 경기의 참가 횟수나 경기폭도 넓어졌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의 선수들이 올림픽경기나 아시안게임 외엔 참가하지 못했으나 그 후 King's Cup, Pre-sident's Cup World Cup, 주니어 선수권 대회, CISM 대회, TAMMER 대회 등 다양한 국제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상 고찰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 복싱이 짧은 연륜 속에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결코 이에 만족할 수는 없다. 따라서 앞으로 복싱의 큰 발전을 위해서는 훌륭한 지도자와 선수 양성에 지속적인 교육투자 및 장기적인 계획수립과 집행에 주력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실업팀의 결성과 함께 훌륭한 선수들의 은퇴 후 생활보장, 이를테면 직장 알선 등의 장기적인 대책도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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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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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2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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