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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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에 관한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민예의 배경
 1). 일본근대 상황
Ⅲ. 민예운동의 기본개념
 1). 민예의 의의
 2). 민예운동의 형성
Ⅳ. 야나기무네요시의 조선관
 1).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과의 만남
 2). 조선 민족미술관의 건립
Ⅴ. 민예운동의 전개
 1). 일본민예관의 건립
 2). 민예운동의 중심작가
  가)버나드리치(Benard Leach)
  나)도미모토 켄키치
  다)가와이 간지로
  라)하마다 쇼지
Ⅵ. 결론

본문내용

관동 대지진을 계기로 1924년 영국의 생활용기 등을 갖고 귀국하였으며, 그해 결혼을 한 후, 가와이의 집에 머무는 동안 이무렵 교토로 이주한 야나기를 가와이에게 소개하고 같은 이념 아래 평생의 동지로 지내기 시작하였다.
3년의 영국생활과 오끼나와의 쓰보야 가마에서의 작업, 그리고 귀국 후 마시코에서의 작업은 하마다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마시코의 건강하고 소박하며 도시에 물들지 않은 자연성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았으며, 그는 순수한 장인들을 스승으로 삼아 일관된 모습으로 자연스러운 건강함을 나타내고자 노력하였다.
1925년 도쿄 긴자의 구교도에서 일본에서의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1926년 야나기, 가와이, 도미모토 등과 “일본민예관설립취의서”를 발표하면서 민예운동의 전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4년에는 14년만에 일본을 방문한 리치가 머물면서 하마다, 가와이, 도미모토와 작업을 해나가기도 했다. 이 무렵 민예운동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서 1936년에 도쿄구장에 “일본민예관”이 건립되었고 조선민예품 수집을 위해 조선을 방문하였다. 1941년부터 1943년 동안은 조선, 만주 등 여러차례 여행하면서 민예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보다 확실하게 굳혀갔다. 1952년에는 문화사절단으로 야나기, 시가 나오야 등과 유렵을 방문하였으며, 영국에서 열린 “국제공예가협회” 회의에도 참석하였으며, 리치와 작품전을 갖고 같은 해 미국의 여러 대학을 방문하여 강연과 시범을 보여 그들에게 동양도자기의 제작기법을 소개하며 동양도자기의 미학을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1955년 일본정부로부터 “민예도기” 부문의 제1회 중요무형문화재기술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1957년에는 “문화재전문심의회전문위원”이 되었다. 1961년에는 오랜 동료인 야나기의 죽음으로 일본민예관의 관정에 취임했다. 1963년에는 미국에서 열린 “美日文化敎育會議”에 일본대표로 참석하였으며, 각국의 민속예술품 수집을 위해 세계 각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1970년에 열린 “일본만국전람회”의 일본민예관 관장으로 추대되기 하였으며, 평생에 걸친 제작활동을 통해 일본의 대표적 도예가로 특히 서구에 소개되었고, 1978년 83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하마다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일본의 전통적 기법의 활용과 함께, 조건시대의 귀얄문기법 등 세계 각 지방의 우수한 도자기술만을 선택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였다. 그는 개인도예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항상 民窯를 배우려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실용성을 우선으로 생각했고, 야나기, 가와이, 리치, 도미모토와 교류하면서 민예의 미에 대한 생각을 확고히 해나갔던 뛰어난 도예가였다. 위의 책, p82-85
Ⅵ. 결론
산업혁명 이후, 기계의 발달과 공예품의 저질화, 속에서 사라져가는 민예품을 보존하고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기물을 제작하여 공예품의 질을 향상시키고,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미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던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은 세계에는 유래가 없는 실천운동이었다.
본 논문에서는 각각의 민예의 배경과 민예운동의 기본이념,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관과 민예운동의 전개로 나누어 연구하였다.
첫 번째로 민예의 배경에는 1910년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중간층, 무산(無産)대중의 증가로 인해, “민중”이란 개념에 퍼져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야나기도 민중에 대한 의미를 찾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두 번째 민예운동의 기본개념에서는 민중의 ‘民”과 공예의 “藝”의 약칭으로써 실용적인 공예품이라는 민예의 성격을 규정하고, 야나기가 민예운동의 형성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자연의 미와 지방의 미, 불교미학에 관해 서술함으로써 야나기가 민예운동의 확립기에는 미의 표준을 규정하고 미의 이론을 체계화하기 위해 이에 반대되는 움직임에는 엄격하게 대처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세 번째로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관으로 야나기가 3.1운동을 통해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과,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한국 도자기를 처음 접했으며, 그 후 한국여행을 하면서, 동양의 미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야나기는 민중의 때가 묻은 이조시대의 민예품에 관심을 갖고 수집 하였으며, 3번째 조선 여행 때, 아사카와 카쿠미와 의논한 끝에 “조선민족미술관”의 설립을 구체화하고 이를 실천하여 개관할 당시 2000여점이 조금 모자라는 소장품을 가지고 경복궁 내 집경당에 설립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 번째로는 민예운동의 전개로써 조선예술과의 만남을 통해 동양의 미에 대한 관심에 높아진 야나기가 같은 미술관을 일본에도 세우고자 염원하면서, 일본의 민예품을 수집하는데 열중했으며, 이는 “일본민예관”의 건립으로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며, 4명의 민예작가들에 관해 서술하면서 그들의 민예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및 새로운 기술의 발달로 인해 진정한 공예의 가치는 사라져가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근대기 일본 뿐 아니라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야나기가 주장하던 실용성과 단순성을 갖고 있으면서 질적으로 훌륭한 공예품은 현대에서도 찾기 어려운 것이 되어가고 있다. 야나기가 꿈꿨었던 이상적인 공예의 미가 이 시대에 정실하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본 연구에서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다. 야나기의 민예운동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전개과정에 관해 살펴보고자 하였으며, 이 논문을 통해 야나기의 사상과 근대 일본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나카미 마리 저, 김순희 옮김 야나기 무네요시 평전 (효형출판) 2005
논문
박계리 저, 20세기 한국회화에서의 전통론 (이대) 2005
박정희 저, 조선민족미술관과 아사카와 다쿠미 (동덕여대) 2005
김성경 저, 야나기 무네요시를 중심으로 한 한국 공예관에 관한 연구 (성신여대) 2001
박미선 저, 야나기 무네요시를 중심으로 한 민예운동에 관한연구(홍대) 1995
천천춘 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미론과 종교철학 (이대)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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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3.02
  • 저작시기2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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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3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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