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공화국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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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 3공화국 대외관계,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대외관계
1. 대일관계 - 한일협정
(1) 의의
(2) 내용

2. 대미관계 : 베트남 파병
(1) 베트남 파병의 원인
(2) 베트남 파병 결과
(3) 베트남 파병이 경제에 미친 영향

본문내용

에 불과했던 수출액이 참전직후인 1966년에는 4배에 가까운 2,380만 달러에 이르고 있다. 베트남戰 참전 이후 한국의 對美수출 물량도 3배 이상 급증했으나, 對美 수출량의 증가분 중 정확히 어느 정도가 한국의 참전으로 발생된 것인가는 파악이 어렵다. 그러나 전투병력을 파견하기 시작한 1965년을 기점으로 급증하였으며 전쟁이 종결된 1973년까지 對美 수출의 증가 추세는 멈추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이나 대만과는 달리 산업기반이 극히 취약했던 한국 경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전쟁 특수로 인한 급격한 對美 수출 증가가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한국의 對베트남 수출이 가장 왕성했던 1965년~1969년 기간 중 1966년~1967년 기간의 주요 對베트남 수출 품목의 구성비와 전체 수출물량에서 이 품목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일반적인 수출품목과 對베트남 수출 품목간에 현격한 구분이 있었다. 당시 한국의 주요 수출품목들은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생산품-섬유류, 합판, 플라스틱 류, 가발 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對베트남 수출품목들은 철강, 기계류, 수송장비 등 비교적 중공업에 기반을 둔 제품들이었다. 철강제품, 수송장비, 화학제품 등의 경우 각각 총 생산량의 94.3%, 51.8%, 40.9%가 베트남으로 수출되었다. 이는 전략적 기간산업 발전에 대한 박정희 정부의 관심과 정책적 노력이 기존의 제 3공화국 경제정책관련 연구에서 제시된 시기보다 훨씬 이전임을 반증하는 중요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1967년에 들어서면서 미국 정부는 베트남 특수를 기대하고 있던 미국 내 생산업자들의 한국 특혜정책에 대한 극심한 항의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자 가장 많은 수의 한국군 병력을 파병한 제 2차 파병이 1966년 말에 완료됨에 따라 한국 정부에 대한 부담을 덜게 된 미국 정부는 1967년부터 수출품목에 대한 엄격한 제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미국이 이러한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기 시작한 후, 한국정부는 참전국가로서 對베트남 수출의 당위성을 지닐 수 있는 전쟁관련 물자들로 주요 수출품목을 교체하기 시작했다. 교체된 군납 목적의 수출품목들은 주로 한국이 이미 수출을 목적으로 적극 권장하고 지원해오던 섬유산업 중심의 군수 물자와 미국이 한국군에게 보급하던 C-Ration을 대체하기 위한 김치 등의 한국 음식을 담은 캔류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국이 한국의 캔 사업의 발전에 적극 협력한 데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派越 한국군의 전투의욕 향상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판단되었고, 미국이 지급하던 C-Ration보다 가격이 훨씬 낮았던 관계로 재정 부담을 줄일 수가 있었다. 둘째, 군사적인 지원보다 간접적인 경제적 지원을 통한 우방 지원을 선호하던 정책에 부합했으며, 셋째, 한국이 미국 업체들의 압력으로 對베트남 수출에 있어 중공업 품목의 수출을 우선하는 정책을 더 이상 추진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하고 있는 한국정부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1967년 3월 정일권 국무총리가 미국을 공식 방문했을 당시, 캔 공장의 설립에 미국이 적극 후원할 것을 약속 받았으며, 1973년 한국군이 완전 철수할 때까지 캔류는 가장 중요한 對베트남 수출품목의 하나가 되었다.
對베트남 무역으로 발생한 한국의 경제적 이득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총 2억 8천 3백만 달러에 달했다. 그 중 9천 4백만 3천 달러는 상업 수출로 인한 것이었으며 총 매출의 3분의 2는 전쟁관련 물자의 수출로 인한 것이었다.
무역부문의 경제적 수익이 한국의 수출 위주 고도성장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이 베트남 전을 통해 벌어들인 전체 경제적 이득의 4분의 1정도에 불과하다. 韓·美 양국은 공식적으로 派越된 한국군은 전원 '자유세계 수호를 위한 자발적인 지원자들'이라고 밝혔지만, 1964년의 非전투 목적의 공병대 파병을 위한 협의 과정에서 이미 임금에 대한 합의를 본 바 있다. 하지만 정규 전투 요원을 파병하기 시작한 1965년 말부터 한국정부는 비공식적으로 임금의 20~25% 인상을 요구하기 시작하여 결국 1966년 7월 제 2차 전투 병력 파월 직전 미국의 동의를 이끌어 냈다. 미국 측 입장에서는 한국의 파병을 통한 전투지원이 재정절감의 중요요소였다.
미국은 자국 병력을 파견했을 경우에 비해 5분의 1에 해당하는 인건비만 지불하고도 경쟁력 있는 병력을 쓸 수 있었으며 기타 비용 등에서 미군의 경우에 비해서 막대한 절감효과가 있었다. 한편 국내에서 불과 1달러 60센트의 월급을 지급 받던 한국군이 평균 40달러 이상의 월급을 받았으며, 사령부가 직접 군인들의 봉급을 관리, 본국으로 송금시켜 저축률과 외환 보유고를 늘려갔으며 1972년까지 약 2억 달러 이상이 송금되었고, 그 중 40%는 은행에 저축되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전사나 부상자에 대한 보상금이 늘어나기 시작하여 1972년까지 한국군에게 약 6천 5백만 달러가 지급되었다.
미국의 또 다른 특혜는 서비스·건설 등 분야의 한국 업체들과의 계약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국 업체들은 주로 건설·토목·물품수송·세탁소나 유흥업체 등의 서비스 업종에 주력했는데, 서비스업은 한때 50개 이상, 건설업체는 최다 12개의 회사가 공사를 진행하였다. 1972년까지 이들 업체로부터 송금된 외화 총 수입은 2억 3천 8백만 달러에 달했다. 건설업체들은 1966년 이후 군사기지 구축, 군사적 용도의 건물 건축, 교량토목공사 등에 주력했다. 1967년 이후 적용된 "Buy Amercian" 정책에 의해 한국 업체들은 주로 미국 기업들로부터 하청을 받아 공사하였는데, 이들 업체들이 벌어들인 공사 대금의 총 송금액은 1972년까지 6천 백만 달러에 달했다.
베트남에서 축적된 한국기업들의 건설·토목 기술 경험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중동 등 해외건설 사업을 통한 외화획득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군인을 포함한 베트남 진출 인력의 송금을 통한 저축률의 향상은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국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베트남 참전으로 발생한 외환 보유고의 증가는 1966년에 시작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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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5.21
  • 저작시기2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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