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예술사상 (남도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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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호남의 예술사상 (남도화를 중심으로)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호남의 예술사상
(남도화를 중심으로)


1. 남도화의 탄생과 시대적 배경
2. 남도화파의 인물들
1) 학포 양팽손
2) 공재 윤두서
3) 소치 허련(허유)
4) 의재 허백련
5) 맺음말

▶ 생각해 볼 문제 ◀

본문내용

조형세 계를 추구하던
'의재산인(毅齋散人)'시대,
세 번째는 자신의 화풍을 완성하여 나간 '의도인(毅道人)'시대가 그것이다.
<허백련> <어형초제>
1958년 작인 이 작품에는 의도인(毅道人)이란 화가의 호가 들어있다. 이 호는 연대상으로 한국전쟁 직후인 1951년부터 타계할 때까지인 1977년까지 사용되었다. 작가 스스로 밝혔듯 이 정도(定道)를 걷고 싶은 마음에서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본따 '도(道)'자를 사용 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고기잡는 형과 나무하는 동생'이라는 의미의 작품 제목이 뜻하는 바도 '안빈낙도(安貧樂道)'하고자 하는 작가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주 제의식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의재는 두폭의 족자형식을 빌어 한족에는 여름 강가에 서 고기를 낚는 어부의 모습을, 다른 한쪽에는 겨울 산기슭에서 지게를 지고 내려오는 나뭇 꾼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5) 맺음말
지금까지 조선 초기 양팽손부터 근대 허백련에 이르기까지 남도화파를 이루는 인물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들에 의해 형성된 조선시대 회화는 그 특징이 3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사화나 파당을 피하여 낙향했거나 정착한 후손들에 의해서, 또한 역량 있는 문사들의 유배에 자극되어 형성된 점이다. 이처럼 형성된 이 지역의 회화는 조선시대에 이 지역이 정치세력에서 소외된 선비들의 은거지 혹은 유배지가 되어 문학, 음악, 학문 등 다른 분야의 문화에서 이루어진 현상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둘째는 위의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을 지연성과 전통성, 보수적인 경향이다. 이는 이 지역의 화가가 보여준 그들 전시대 전통화풍의 계승에서 나타난다. 즉 16세기 전반의 양팽손은 15세기 안견의 화풍을, 17세기 말, 18세기 초의 윤두서는 16-17세기 절파계 화풍을 19세기의 허련은 18세기 남종화풍을 유지하였다. 특히 이들은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화풍이나 회화세계를 이룬 경우에도 새로운 유행이나 화풍보다 전통화풍을 고수하였다는 데서 그 성격이 더욱 확실해진다.
셋째로는 전통성과 보수성에 의해 자극된 토착성이다. 이는 수도권에서 떨어진 지방이기 때문에 다른 문화유형이나 조형작품에서도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여겨진다. 토착화의 문제는 외래문화를 수용, 변모시킨 한국적 특징을 추출하는 관건이 되기도 하는데 남도의 현존하는 예를 들어보면 삼국시대 영산강 유역의 옹관묘제, 고려시대 화순 도암 운주사의 불탑을 비롯한 불교미술 등이 내재적인 표현력과 거친 미완의 힘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들과 전통회화의 특징을 관련시키는 데는 무리가 따르지만 남도회화의 토착적인 거칠고 호방한 화풍은 동질의 정서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 생각해 볼 문제 ◀
1. 남도화파 인물들의 특성상, 사대부적인 요소들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예술로써 남도화파 인물들의 현실에 대한 참여는 다소 소극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즉 김홍도와 같은 화가들처럼 민중의 삶을 대변하지 못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예술의 현실 대변 혹은 참여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얘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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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13.05.28
  • 저작시기2014.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49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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