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로마 기사의 기원
Ⅲ. 정치적 상황에 따른 기사신분의 성장
Ⅳ. 기사신분의 성장 배경
Ⅴ. 기사신분의 신분으로서의 성격과 직업형성
Ⅵ. 사회이동과 그 의의
Ⅶ.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Ⅷ. 맺음말
Ⅱ. 로마 기사의 기원
Ⅲ. 정치적 상황에 따른 기사신분의 성장
Ⅳ. 기사신분의 성장 배경
Ⅴ. 기사신분의 신분으로서의 성격과 직업형성
Ⅵ. 사회이동과 그 의의
Ⅶ.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Ⅷ. 맺음말
본문내용
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보조관직자는 자신이 받들던 정무관이 직무를 다할 때에 금반지를 수여받는 관행이 있었다. 이렇게 수여된 금반지는 기사의 상징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기사신분으로 상승할 수 있는 가능성은 국가의 공직을 수행함으로써 부여될 수도 있었다.
공화정기의 기사신분이 체제의 지지자와 지배자로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에게 일정한 사회적 상승의 기회가 제시되어 있었고 소수이기는 하지만 관직과 장교직, 그리고 배심원으로의 진출이 제도적으로 열려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로 인한 사회적 상승의 기회를 엿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그들의 능력을 체제유지에 바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로마는 사회적 이동의 가능성을 열어 놓아 평민, 기사신분의 능력발휘를 유도 하였고 이들은 군역이나 공직수행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신분상승을 이루었던 것이다.
행정관이나 원로원 의원을 한 번도 배출한 적이 없었던 기사 가문 출신의 인물이 뛰어난 군사적 업적이나 탁월한 웅변술 덕분에 ‘명예로운 관직의 경력’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럴 경우 감찰관은 그를 원로원에 포함시키곤 했다. 그런 인물이 결국 집정관 자리에까지 오르면, 그는 ‘신인(新人, bomo novus)’이라고 불렸다. BC 3세기가 지나면서 노빌레스는 페쇄적인 집단이 되기 시작했다. BC 200년 이후로, 겨우 3,4명의 ‘신인’만이 로마 공화정을 통치하는 집단속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기사신분은 로마신분의 중간 사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였으며 그런 점에서 이들은 예비지배층으로 군림하였다. 이것은 하위 신분의 구성원도 자신들의 능력을 군복무나 공직수행을 통해 발휘하여 인정받은 경우 기사신분에 진출할 수 있었으며 기사신분 진출 후에도 원로원의 위치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희망의 여지를 남겨둔 것이었다. 즉 기사신분은 사회이동의 매개체였으며 계급체제 하에서 하층민의 불만을 상승의 가능성에 희석할 수 있었던 하나의 사회적 모델이 되었을 수 있는 것이다.
Ⅶ.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서기 69년부터 79년간에 로마황제의 자리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로마 사회에서 제2계급이라 해도 좋은 ‘기사계급’출신이다. 그런데도 기사 계급을 특별히 우대하지 않은 그의 균형감각은 충분히 칭찬할 만하다. 그렇긴 하지만, 여기서도 그는 앞사람이 세워 놓은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간 데 불과했다.
여기서 말하는 앞사람은 아우구스투스와 클라우디우스였다. 공화정시대에는 원로원 계급이 정치를 독점했기 때문에 ‘기사계급’은 경제 분야에서 활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행정에 등용한 것은 아우구스투스였다. 풍부한 경제 경험 덕에 실무능력이 뛰어난 그들을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실무 ‘관료’로 활용한 것이다. 따라서 공화정 시대에는 ‘경제계’로 총칭할 수 있었던 ‘기사계급’이 제정 시대에 들어선 뒤에는 경제만이 아니라 행정과 군사면에서도 전문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로마 사회는 원로원 계급·기사계급·평민계급·해방노예·노예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로마인은 공화정 시대부터 있었던 이 계급 구분을 철폐하지 않고 존속시켰다. 다만 이 다섯 계급 사이의 유동성은 인정했다.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장려했다. 노예에서 해방노예가 되고, 자격만 갖추면 로마 시민권을 가진 평민계급에 들어갈 수 있다. 기사계급 출신인 베스파시아누스도 군단에서 실적을 쌓고 공직을 거친 뒤 원로원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되었다.
사회 구성원이 모두 평등하면 오히려 외부인을 소외시키게 된다.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당장 기존 구성원과 똑같은 권리를 인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정하면 기존 구성원들 사이에서 반발이 일어난다. 고대 로마처럼 사회 계급을 인정하되 계급간의 유동성을 인정하면, 외부인의 유입을 거부할 이유가 없어진다. 아직 실력을 보여주지 않은 사람은 우선 하층계급에 들어가게 하고, 그후의 신분 상승은 당사자가 하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실력을 보여준 사람은 당장 그 실력에 어울리는 계급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한다. 민주정을 지키기 위해 모든 구성원의 평등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던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가 뜻밖에도 다른 폴리스 출신이나 노예에 대해서는 폐쇄적인 사회였던 반면, 공화정 시대에는 원로원이 주도하는 과두정이었고 제정 시대에는 군주정으로 바뀐 로마가 아테네보다 훨씬 개방적인 사회였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고대 로마는, ‘그 시대의 한계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라는 조건을 붙이긴 했지만, 기회 균등을 실현한 사회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카이사르가 개척하고 아우구스투스가 지반을 굳히고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가 손질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견고해진 그 길을 걸어갔을 뿐이다.
Ⅷ. 맺음말
로마 공화정 시기에 사회적 신분은 오르도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공적인 기능의 수행과 관련되어 부여된 호칭이었다. 이런 호칭을 지닌 기사신분이 크게 성장하게 되는 계기는 로마의 팽창이라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원로원의 통제하에서 일정한 기능적 분화를 하며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기사신분이 법률적으로 권리를 부여받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계기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기사신분은 원로원에 대해서 견제세력으로 작용하기보다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대단히 소극적이었고 원로원 의원들에 못지않게 보수적이었다. 또한 기사신분은 제도적으로나 임시방편으로나 상위신분으로 상승할 기회를 가졌고 아울러 하위신분의 구성원도 자신들의 능력을 군복무나 공직수행을 통해 발휘하여 인정받은 경우 기사신분에 진출할 수 있었다. 따라서 기사신분은 사회이동의 매개였으며, 기사신분의 존재는 공화정기 로마 사회체제를 안정하게 해주는 장치였다.
<참고자료>
서양고대사강의, 한울아카데미, 1996, 김진경 외
로마공화정,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허승일
서양고대문명의 역사, 다락방, 2003, 루카 드 블로와 로바르터스 반 데어 스펙/옮긴이: 윤진
인물로보는 서양 고대사, 도서출판 길, 2006, 허승일 외
로마인 이야기, 한길사, 2007, 시오노 나나미
보조관직자는 자신이 받들던 정무관이 직무를 다할 때에 금반지를 수여받는 관행이 있었다. 이렇게 수여된 금반지는 기사의 상징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기사신분으로 상승할 수 있는 가능성은 국가의 공직을 수행함으로써 부여될 수도 있었다.
공화정기의 기사신분이 체제의 지지자와 지배자로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에게 일정한 사회적 상승의 기회가 제시되어 있었고 소수이기는 하지만 관직과 장교직, 그리고 배심원으로의 진출이 제도적으로 열려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로 인한 사회적 상승의 기회를 엿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그들의 능력을 체제유지에 바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로마는 사회적 이동의 가능성을 열어 놓아 평민, 기사신분의 능력발휘를 유도 하였고 이들은 군역이나 공직수행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신분상승을 이루었던 것이다.
행정관이나 원로원 의원을 한 번도 배출한 적이 없었던 기사 가문 출신의 인물이 뛰어난 군사적 업적이나 탁월한 웅변술 덕분에 ‘명예로운 관직의 경력’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럴 경우 감찰관은 그를 원로원에 포함시키곤 했다. 그런 인물이 결국 집정관 자리에까지 오르면, 그는 ‘신인(新人, bomo novus)’이라고 불렸다. BC 3세기가 지나면서 노빌레스는 페쇄적인 집단이 되기 시작했다. BC 200년 이후로, 겨우 3,4명의 ‘신인’만이 로마 공화정을 통치하는 집단속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기사신분은 로마신분의 중간 사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였으며 그런 점에서 이들은 예비지배층으로 군림하였다. 이것은 하위 신분의 구성원도 자신들의 능력을 군복무나 공직수행을 통해 발휘하여 인정받은 경우 기사신분에 진출할 수 있었으며 기사신분 진출 후에도 원로원의 위치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희망의 여지를 남겨둔 것이었다. 즉 기사신분은 사회이동의 매개체였으며 계급체제 하에서 하층민의 불만을 상승의 가능성에 희석할 수 있었던 하나의 사회적 모델이 되었을 수 있는 것이다.
Ⅶ.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서기 69년부터 79년간에 로마황제의 자리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로마 사회에서 제2계급이라 해도 좋은 ‘기사계급’출신이다. 그런데도 기사 계급을 특별히 우대하지 않은 그의 균형감각은 충분히 칭찬할 만하다. 그렇긴 하지만, 여기서도 그는 앞사람이 세워 놓은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간 데 불과했다.
여기서 말하는 앞사람은 아우구스투스와 클라우디우스였다. 공화정시대에는 원로원 계급이 정치를 독점했기 때문에 ‘기사계급’은 경제 분야에서 활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행정에 등용한 것은 아우구스투스였다. 풍부한 경제 경험 덕에 실무능력이 뛰어난 그들을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실무 ‘관료’로 활용한 것이다. 따라서 공화정 시대에는 ‘경제계’로 총칭할 수 있었던 ‘기사계급’이 제정 시대에 들어선 뒤에는 경제만이 아니라 행정과 군사면에서도 전문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로마 사회는 원로원 계급·기사계급·평민계급·해방노예·노예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로마인은 공화정 시대부터 있었던 이 계급 구분을 철폐하지 않고 존속시켰다. 다만 이 다섯 계급 사이의 유동성은 인정했다.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장려했다. 노예에서 해방노예가 되고, 자격만 갖추면 로마 시민권을 가진 평민계급에 들어갈 수 있다. 기사계급 출신인 베스파시아누스도 군단에서 실적을 쌓고 공직을 거친 뒤 원로원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되었다.
사회 구성원이 모두 평등하면 오히려 외부인을 소외시키게 된다.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당장 기존 구성원과 똑같은 권리를 인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정하면 기존 구성원들 사이에서 반발이 일어난다. 고대 로마처럼 사회 계급을 인정하되 계급간의 유동성을 인정하면, 외부인의 유입을 거부할 이유가 없어진다. 아직 실력을 보여주지 않은 사람은 우선 하층계급에 들어가게 하고, 그후의 신분 상승은 당사자가 하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실력을 보여준 사람은 당장 그 실력에 어울리는 계급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한다. 민주정을 지키기 위해 모든 구성원의 평등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던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가 뜻밖에도 다른 폴리스 출신이나 노예에 대해서는 폐쇄적인 사회였던 반면, 공화정 시대에는 원로원이 주도하는 과두정이었고 제정 시대에는 군주정으로 바뀐 로마가 아테네보다 훨씬 개방적인 사회였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고대 로마는, ‘그 시대의 한계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라는 조건을 붙이긴 했지만, 기회 균등을 실현한 사회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카이사르가 개척하고 아우구스투스가 지반을 굳히고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가 손질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견고해진 그 길을 걸어갔을 뿐이다.
Ⅷ. 맺음말
로마 공화정 시기에 사회적 신분은 오르도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공적인 기능의 수행과 관련되어 부여된 호칭이었다. 이런 호칭을 지닌 기사신분이 크게 성장하게 되는 계기는 로마의 팽창이라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원로원의 통제하에서 일정한 기능적 분화를 하며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기사신분이 법률적으로 권리를 부여받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계기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기사신분은 원로원에 대해서 견제세력으로 작용하기보다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대단히 소극적이었고 원로원 의원들에 못지않게 보수적이었다. 또한 기사신분은 제도적으로나 임시방편으로나 상위신분으로 상승할 기회를 가졌고 아울러 하위신분의 구성원도 자신들의 능력을 군복무나 공직수행을 통해 발휘하여 인정받은 경우 기사신분에 진출할 수 있었다. 따라서 기사신분은 사회이동의 매개였으며, 기사신분의 존재는 공화정기 로마 사회체제를 안정하게 해주는 장치였다.
<참고자료>
서양고대사강의, 한울아카데미, 1996, 김진경 외
로마공화정,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허승일
서양고대문명의 역사, 다락방, 2003, 루카 드 블로와 로바르터스 반 데어 스펙/옮긴이: 윤진
인물로보는 서양 고대사, 도서출판 길, 2006, 허승일 외
로마인 이야기, 한길사, 2007, 시오노 나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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