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1910년대의 학우회
Ⅱ. 1910년대의 희곡
1. 신문물의 숭상
2. 남성의 이중성 비판
Ⅲ. 1910년대의 능금(사과)
Ⅳ. 1910년대의 계몽주의
Ⅴ. 1910년대의 국제정세
Ⅵ. 1910년대의 항일투쟁
Ⅶ. 1910년대의 고금서화관
참고문헌
Ⅱ. 1910년대의 희곡
1. 신문물의 숭상
2. 남성의 이중성 비판
Ⅲ. 1910년대의 능금(사과)
Ⅳ. 1910년대의 계몽주의
Ⅴ. 1910년대의 국제정세
Ⅵ. 1910년대의 항일투쟁
Ⅶ. 1910년대의 고금서화관
참고문헌
본문내용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황해도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국망 이후에도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다. 일제는 주차군 제2사단장에게 명하여 1910년 11월 하순부터 1911년 4월 중순에 이르는 4개월 동안에 의병진압 작전을 수행케 하였다. 제2사단장은 보병 제29연대장에게 29연대와 65연대의 2대대에서 보병 7중대와 기병, 공병 약간을 개성의 남천점의 서쪽으로부터 서흥, 재령, 해주의 탁영대, 연안, 배천의 다각형 지대 안으로 출동시켜 의병을 진압하였다. 이 작전으로 의병 190여명이 체포되어 황해도 지역에서 의병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황해도 의병에 대한 탄압은 1911년 9월 하순부터 11월 초순에 걸쳐 재개시되었다. 일본주차군 제2사단장은 보병 제3여단장 中村 소장에게 보병 16중대, 기병 2중대 및 약 80명의 헌병과 경찰관을 지휘, 출동시켰다. 일본군은 황해도를 곡산 등지의 동부지역과 봉산, 신천, 재령 등지를 서부지역으로 나누어 부대를 나누어 포위, 수색하며 의병을 압박하였다. 이 작전으로 의병 250여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곡산, 수안일대에서 활약하던 채응언을 비롯한 의병장들은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채응언은 잔여의병을 인솔하고 활동 중 1913년 6월 선암전투에서 체포되어 1915년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이처럼 일제에 의한 철저한 의병진압전이 시행되어 채응언이 체포된 후에는 황해도에서의 의병활동도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일본군에 의한 황해도에서의 작전을 끝으로 그 후 3~5명의 의병이 간혹 출몰하기도 하였으나, 의병은 거의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 다만 평산, 해주, 금천, 서흥 일대에서 활동하던 김정환의병은 장수산성 전투에서 일군의 습격을 격퇴하였으며 1914년 5월 중순 서흥군 제비여울수비대를 기습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율리면 유정리 토굴속의 본부를 공격당함에 최후 항전 중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 결과 황해도에서의 의병활동도 1914년 이후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이후 국내에서의 의병들의 투쟁은 지속되지 못하고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 독립운동으로 전환되었다.
Ⅶ. 1910년대의 고금서화관
1913년에는 새롭게 밀려들어온 서구적 생각과 근대적 시민사회의 확대 분위기를 배경으로 선구적인 생각과 행동의 인물인 해강에 의해 새로운 영업체제인 화랑이 생기게 된다.
그는 1902-1903년 무렵 도쿄에 가서 일본의 서화가들과 접촉하는 일이 있었다. 이 때에 화랑의 영업실태를 그곳에서 파악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생각을 행동으로 처음 보인 것이 1903년 당시 남부 석정동(지금의 소공동)에 [천연당 사진관] 이라는 당시 개화기에 나타난 최초의 한국인 사진관을 열고 그 안에 고금 서화관이라는 최초의 상업적 화랑을 부설했다. 당시 천연당 사진관은 왕족을 비롯하여 여러 대관 및 귀족층인사 그 밖에 해강과 친교가 두터웠던 많은 인사들이 자주 드나드는 하나의 시대적인 명소였다. 특히 천연당 사진관 안에 부설된 고금서화관은 개화기에 해강이 착안한 사진, 서화, 표구를 겸한 종합적인 화랑이었다.
해강은 사업적인 경영력을 발휘하는데, 1913년 12월에 화랑을 개설하면서 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은 광고를 게재한다.
본인이 서화미술에 30여년 적공(積工)으로, 증자(曾者) 8여 년간 유학 중원(遊學中原)에 열역(閱歷) 강남승경(江南勝景), 박람(博覽) 고인 진적(故人眞蹟)하여, 진.초.예.전(眞草隸箋) 각 서체며 화훼(花卉). 영모. 산수(山水) 등 화법의 득기진경(得其眞境),귀국 출사(歸國出仕) 10여년간에 구한국 황실 서화 수응(酬應)과 영친왕 서법 교수에 열성할 동시에 우부동경(又赴東京)에 학습 사진법(學習寫眞法)하여 천연당 개업이 어언 十栽라. 범아지구간(我智舊間), 기소염실이(旣所悉而), 금(今)에 서화 정도와 표구 영업을 발전키 위하여 본당 내에 서화관을 부설하고 응시휘호(應時揮毫)하며, 경향(京鄕) 제 명가의 서화를 연락 출품하며, 고등 표구사를 고빙하여 병풍.주련(珠聯). 횡축(橫軸) . 첩책(帖冊) 등을 정량표선(精良表繕)하며, 비문(碑文). 상석(床石). 목주련(木株聯). 목현판(木懸板). 간판의 액자(額子). 소자(小子)며, 조각. 도금(塗金). 취색(取色). 등사(等事)를 일절 염가수응(廉價酬應) 혹 소개하오며, 고서. 고화도 매수 혹 수탁전매(受托輾賣)하오니 위설사업자와 애기운치자(愛其韻致者)와 혼인수연(婚姻壽宴)과 교제상 기념품으로 기증코자 하시는 내외국 첨군자(僉君子)는 광림 우본당내(光臨于本堂內) 면의(面議)하시며, 외국. 내지(內地). 각 도군(各道郡)에 인환청구(引換請求)도 수응함. 경향 각지에 재하신 서화대가는 각기 소장(所長)으로 二,三 폭씩을 본관(本觀)내에 견본으로 출품하심을 요함.
경성 남부 석정동(京城 南部 石井洞) 천연당 사진관 내, 고금서화관. 전화 二四0五번. 주인, 해강 김규진.
광고문에 의한 고금서화관의 주요활동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의 서화활동과 밀착된 그의 작품판매를 주요사업으로 하고 그 다음으로 혼인이나 수연, 선물 또는 사교상의 선물로 서화를 사고 싶어 하는 사람과 서화가로서 고금서화관을 통해 작품을 팔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작품을 진열, 판매하는 중간 역할을 했다. 당시 이름있는 서화가들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해강으로서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둘째, 일급 표구사를 고용하여 각종 고급 표구 주문을 받는 것이다.
셋째, 주연. 현판 같은 글씨와 장식적인 조각 등을 해주었다.
넷째, 고서화를 사들이거나 위탁으로 전매하는 등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하여 [고금서화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참고문헌
◎ 김인덕(1995), 학우회의 조직과 활동, 국사편찬위원회
◎ 류시현(1999), 1910-20년대 일본유학 출신 지식인의 국제정세 및 일본인식, 고려사학회
◎ 박민영(2010), 독립군과 한국광복군의 항일무장투쟁,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 송지연(2008), 1910년대 계몽의 기획, 구보학회
◎ 원명수(1992), 1910년대 희곡의 페미니즘적 요소,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소
◎ 최원식(1999), 1910년대 친일문학과 근대성,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황해도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국망 이후에도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다. 일제는 주차군 제2사단장에게 명하여 1910년 11월 하순부터 1911년 4월 중순에 이르는 4개월 동안에 의병진압 작전을 수행케 하였다. 제2사단장은 보병 제29연대장에게 29연대와 65연대의 2대대에서 보병 7중대와 기병, 공병 약간을 개성의 남천점의 서쪽으로부터 서흥, 재령, 해주의 탁영대, 연안, 배천의 다각형 지대 안으로 출동시켜 의병을 진압하였다. 이 작전으로 의병 190여명이 체포되어 황해도 지역에서 의병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황해도 의병에 대한 탄압은 1911년 9월 하순부터 11월 초순에 걸쳐 재개시되었다. 일본주차군 제2사단장은 보병 제3여단장 中村 소장에게 보병 16중대, 기병 2중대 및 약 80명의 헌병과 경찰관을 지휘, 출동시켰다. 일본군은 황해도를 곡산 등지의 동부지역과 봉산, 신천, 재령 등지를 서부지역으로 나누어 부대를 나누어 포위, 수색하며 의병을 압박하였다. 이 작전으로 의병 250여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곡산, 수안일대에서 활약하던 채응언을 비롯한 의병장들은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채응언은 잔여의병을 인솔하고 활동 중 1913년 6월 선암전투에서 체포되어 1915년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이처럼 일제에 의한 철저한 의병진압전이 시행되어 채응언이 체포된 후에는 황해도에서의 의병활동도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일본군에 의한 황해도에서의 작전을 끝으로 그 후 3~5명의 의병이 간혹 출몰하기도 하였으나, 의병은 거의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 다만 평산, 해주, 금천, 서흥 일대에서 활동하던 김정환의병은 장수산성 전투에서 일군의 습격을 격퇴하였으며 1914년 5월 중순 서흥군 제비여울수비대를 기습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율리면 유정리 토굴속의 본부를 공격당함에 최후 항전 중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 결과 황해도에서의 의병활동도 1914년 이후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이후 국내에서의 의병들의 투쟁은 지속되지 못하고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 독립운동으로 전환되었다.
Ⅶ. 1910년대의 고금서화관
1913년에는 새롭게 밀려들어온 서구적 생각과 근대적 시민사회의 확대 분위기를 배경으로 선구적인 생각과 행동의 인물인 해강에 의해 새로운 영업체제인 화랑이 생기게 된다.
그는 1902-1903년 무렵 도쿄에 가서 일본의 서화가들과 접촉하는 일이 있었다. 이 때에 화랑의 영업실태를 그곳에서 파악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생각을 행동으로 처음 보인 것이 1903년 당시 남부 석정동(지금의 소공동)에 [천연당 사진관] 이라는 당시 개화기에 나타난 최초의 한국인 사진관을 열고 그 안에 고금 서화관이라는 최초의 상업적 화랑을 부설했다. 당시 천연당 사진관은 왕족을 비롯하여 여러 대관 및 귀족층인사 그 밖에 해강과 친교가 두터웠던 많은 인사들이 자주 드나드는 하나의 시대적인 명소였다. 특히 천연당 사진관 안에 부설된 고금서화관은 개화기에 해강이 착안한 사진, 서화, 표구를 겸한 종합적인 화랑이었다.
해강은 사업적인 경영력을 발휘하는데, 1913년 12월에 화랑을 개설하면서 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은 광고를 게재한다.
본인이 서화미술에 30여년 적공(積工)으로, 증자(曾者) 8여 년간 유학 중원(遊學中原)에 열역(閱歷) 강남승경(江南勝景), 박람(博覽) 고인 진적(故人眞蹟)하여, 진.초.예.전(眞草隸箋) 각 서체며 화훼(花卉). 영모. 산수(山水) 등 화법의 득기진경(得其眞境),귀국 출사(歸國出仕) 10여년간에 구한국 황실 서화 수응(酬應)과 영친왕 서법 교수에 열성할 동시에 우부동경(又赴東京)에 학습 사진법(學習寫眞法)하여 천연당 개업이 어언 十栽라. 범아지구간(我智舊間), 기소염실이(旣所悉而), 금(今)에 서화 정도와 표구 영업을 발전키 위하여 본당 내에 서화관을 부설하고 응시휘호(應時揮毫)하며, 경향(京鄕) 제 명가의 서화를 연락 출품하며, 고등 표구사를 고빙하여 병풍.주련(珠聯). 횡축(橫軸) . 첩책(帖冊) 등을 정량표선(精良表繕)하며, 비문(碑文). 상석(床石). 목주련(木株聯). 목현판(木懸板). 간판의 액자(額子). 소자(小子)며, 조각. 도금(塗金). 취색(取色). 등사(等事)를 일절 염가수응(廉價酬應) 혹 소개하오며, 고서. 고화도 매수 혹 수탁전매(受托輾賣)하오니 위설사업자와 애기운치자(愛其韻致者)와 혼인수연(婚姻壽宴)과 교제상 기념품으로 기증코자 하시는 내외국 첨군자(僉君子)는 광림 우본당내(光臨于本堂內) 면의(面議)하시며, 외국. 내지(內地). 각 도군(各道郡)에 인환청구(引換請求)도 수응함. 경향 각지에 재하신 서화대가는 각기 소장(所長)으로 二,三 폭씩을 본관(本觀)내에 견본으로 출품하심을 요함.
경성 남부 석정동(京城 南部 石井洞) 천연당 사진관 내, 고금서화관. 전화 二四0五번. 주인, 해강 김규진.
광고문에 의한 고금서화관의 주요활동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의 서화활동과 밀착된 그의 작품판매를 주요사업으로 하고 그 다음으로 혼인이나 수연, 선물 또는 사교상의 선물로 서화를 사고 싶어 하는 사람과 서화가로서 고금서화관을 통해 작품을 팔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작품을 진열, 판매하는 중간 역할을 했다. 당시 이름있는 서화가들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해강으로서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둘째, 일급 표구사를 고용하여 각종 고급 표구 주문을 받는 것이다.
셋째, 주연. 현판 같은 글씨와 장식적인 조각 등을 해주었다.
넷째, 고서화를 사들이거나 위탁으로 전매하는 등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하여 [고금서화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참고문헌
◎ 김인덕(1995), 학우회의 조직과 활동, 국사편찬위원회
◎ 류시현(1999), 1910-20년대 일본유학 출신 지식인의 국제정세 및 일본인식, 고려사학회
◎ 박민영(2010), 독립군과 한국광복군의 항일무장투쟁,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 송지연(2008), 1910년대 계몽의 기획, 구보학회
◎ 원명수(1992), 1910년대 희곡의 페미니즘적 요소,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소
◎ 최원식(1999), 1910년대 친일문학과 근대성,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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