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정치세력과 왕위계승
Ⅲ. 정치세력과 세도정치
Ⅳ. 정치세력과 임시정부
Ⅴ. 정치세력과 경종대
Ⅵ. 정치세력과 한민당
참고문헌
Ⅱ. 정치세력과 왕위계승
Ⅲ. 정치세력과 세도정치
Ⅳ. 정치세력과 임시정부
Ⅴ. 정치세력과 경종대
Ⅵ. 정치세력과 한민당
참고문헌
본문내용
를 부인하는 도배가 있다면 어찌 3천만 민중이 용허할 바랴”라며 임시정부 대 인민공화국이라는 대립구도를 조장했다. 그리고 같은 날 한민당 발기인을 주축으로 하는 임시정부와 및 연합군을 환영하는 환영준비회가 조직되었다.
한민당의 임정봉대론은 곧 중경에 있는 임정에 전달되었다. 宋鎭禹는 1945년 9월 10일 중국기자 曾銀波를 통해 인공반대와 임정절대지지의 내용을 담은 서신을 김구에게 보냈다. 趙炳玉元世勳은 김구김규식申翼熙에게 인민공화국은 친일파 정부이며 임정이 귀환하면 봉대할 것이며 미군정의 지지 하에 임정환영대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여기에 고무된 김구는 1945년 9월 18일 장개석을 만난 자리에서 명망성 있는 지사들이 국민대회를 소집하여 임정이 귀국하기를 독촉하고 있다며 우선 趙素昻嚴大衛金英甲 등을 개인자격으로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민당의 임정봉대론은 김구의 기대처럼 임정 자체의 확대강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우익진영 내 유일한 민족해방운동단체라 할 수 있는 임정의 정통성을 활용함으로써 친일전력을 갖고 있는 자신들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남한정계의 대립구도를 자신들에게 불리한 민족 대 반민족 구도가 아닌 좌익 대 우익 구도로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임정요인들이 귀국한 후에는 임정 내 명망성을 가진 일부 지도자들을 개별 영입함으로써 한민당을 중심으로 우익진영을 강화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한편, 중간우파적 성향의 안재홍을 대표로 하는 국민당도 결성 초기부터 임정봉대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임정봉대론은, 우익 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종국에는 좌익주도의 정계구도를 역전시키겠다는 의도보다 임정이 우익진영의 대립분열하는 경향과 영웅주의적 할 거라는 구태를 청산하고 민족통일전선에 참여할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임정이 환국하자 한민당을 중심으로 임정봉대를 천명했던 우익진영은 자신들의 임정지지도를 과시하기 위한 실천을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우선, 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는 우익이 주도하는 임정개선 환영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환영대회는 한민당이 1945년 9월 7일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한 이래 지속적으로 준비되어 온 것이기도 했다.
환영대회에서 한민당 대표 송진우는 “임시정부가 중핵이 되어서 모든 亞流 支派를 구심력적으로 凝集하므로써 국내통일에 절대의 영도를 발휘하는 동시에 우리의 자주독립 능력을 국외에 宣示하여 급속히 연합국의 승인을 요청”할 것을 임정요인들에게 호소하면서 임정승인문제가 임정봉대론의 현실화를 위한 전제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간접적으로나마 피력했다. 김구와 이승만은 임정은 결코 某一階級 某一黨派의 정부가 아니라 전 민족 각 계급 각 당파의 공동한 이해입장에 입각한 민주단결의 정부이므로 그 기치아래 일치단결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한민당을 주축으로 임정에 대한 공개적인 재정지원이 모색되었다. 김성수 일가가 경영하는 京城紡織도 임정에 ‘건국대업’자금으로 사용하라며 700만원을 선뜻 헌납했다. 1945년 12월 23일에는 宋鎭禹金性洙金東元張澤相 등에 의해 임정 재정 마련을 위한 愛國金獻誠會가 결성되기도 했다.
이처럼, 권력기반을 강화할 목적으로 임정봉대론을 활용한 국내 우익진영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임정승인문제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환국교섭과 환국이후의 활동에 장애가 될지 모르는 승인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기를 포기했던 임정과는 달리 한민당의 경우 이미 환국한 임정요인들에게 속히 열국의 승인을 받도록 노력할 것을 거듭 요구했다. 그러나 친일 전력을 갖고 있는 그들로서는 일본을 대체한 새로운 권력자인 외세=미국과 그 하수인인 미군정의 대한정책에 유달리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정부가 임정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들도 감히 임정봉대론을 계속 표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참고문헌
▷ 강내희(2010), 임시정부가 꿈꾼 교육·문화 정책과 그 굴절, 한국사회사학회
▷ 권기석(2001), 19세기 세도정치 세력의 형성 배경 하, 진단학회
▷ 양립창(2011), 한국정치세력과 남북관계발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 윤수남(1997), 한국 의회정치세력에 대한 일연구 : 한민당·민주당 등을 중심으로, 한국역사연구회
▷ 전기웅(1990), 고려 경종대 의 정치사회구조 와 그 주도세력, 부산대학교
▷ 최재석 외 1명(1990), 신라 왕위계승의 계보인식과 정치세력 - 평화시의 정치세력이 왕위계승을 좌우할 수 있는가?, 한국사회사학회
한민당의 임정봉대론은 곧 중경에 있는 임정에 전달되었다. 宋鎭禹는 1945년 9월 10일 중국기자 曾銀波를 통해 인공반대와 임정절대지지의 내용을 담은 서신을 김구에게 보냈다. 趙炳玉元世勳은 김구김규식申翼熙에게 인민공화국은 친일파 정부이며 임정이 귀환하면 봉대할 것이며 미군정의 지지 하에 임정환영대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여기에 고무된 김구는 1945년 9월 18일 장개석을 만난 자리에서 명망성 있는 지사들이 국민대회를 소집하여 임정이 귀국하기를 독촉하고 있다며 우선 趙素昻嚴大衛金英甲 등을 개인자격으로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민당의 임정봉대론은 김구의 기대처럼 임정 자체의 확대강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우익진영 내 유일한 민족해방운동단체라 할 수 있는 임정의 정통성을 활용함으로써 친일전력을 갖고 있는 자신들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남한정계의 대립구도를 자신들에게 불리한 민족 대 반민족 구도가 아닌 좌익 대 우익 구도로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임정요인들이 귀국한 후에는 임정 내 명망성을 가진 일부 지도자들을 개별 영입함으로써 한민당을 중심으로 우익진영을 강화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한편, 중간우파적 성향의 안재홍을 대표로 하는 국민당도 결성 초기부터 임정봉대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임정봉대론은, 우익 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종국에는 좌익주도의 정계구도를 역전시키겠다는 의도보다 임정이 우익진영의 대립분열하는 경향과 영웅주의적 할 거라는 구태를 청산하고 민족통일전선에 참여할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임정이 환국하자 한민당을 중심으로 임정봉대를 천명했던 우익진영은 자신들의 임정지지도를 과시하기 위한 실천을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우선, 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는 우익이 주도하는 임정개선 환영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환영대회는 한민당이 1945년 9월 7일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한 이래 지속적으로 준비되어 온 것이기도 했다.
환영대회에서 한민당 대표 송진우는 “임시정부가 중핵이 되어서 모든 亞流 支派를 구심력적으로 凝集하므로써 국내통일에 절대의 영도를 발휘하는 동시에 우리의 자주독립 능력을 국외에 宣示하여 급속히 연합국의 승인을 요청”할 것을 임정요인들에게 호소하면서 임정승인문제가 임정봉대론의 현실화를 위한 전제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간접적으로나마 피력했다. 김구와 이승만은 임정은 결코 某一階級 某一黨派의 정부가 아니라 전 민족 각 계급 각 당파의 공동한 이해입장에 입각한 민주단결의 정부이므로 그 기치아래 일치단결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한민당을 주축으로 임정에 대한 공개적인 재정지원이 모색되었다. 김성수 일가가 경영하는 京城紡織도 임정에 ‘건국대업’자금으로 사용하라며 700만원을 선뜻 헌납했다. 1945년 12월 23일에는 宋鎭禹金性洙金東元張澤相 등에 의해 임정 재정 마련을 위한 愛國金獻誠會가 결성되기도 했다.
이처럼, 권력기반을 강화할 목적으로 임정봉대론을 활용한 국내 우익진영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임정승인문제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환국교섭과 환국이후의 활동에 장애가 될지 모르는 승인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기를 포기했던 임정과는 달리 한민당의 경우 이미 환국한 임정요인들에게 속히 열국의 승인을 받도록 노력할 것을 거듭 요구했다. 그러나 친일 전력을 갖고 있는 그들로서는 일본을 대체한 새로운 권력자인 외세=미국과 그 하수인인 미군정의 대한정책에 유달리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정부가 임정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들도 감히 임정봉대론을 계속 표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참고문헌
▷ 강내희(2010), 임시정부가 꿈꾼 교육·문화 정책과 그 굴절, 한국사회사학회
▷ 권기석(2001), 19세기 세도정치 세력의 형성 배경 하, 진단학회
▷ 양립창(2011), 한국정치세력과 남북관계발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 윤수남(1997), 한국 의회정치세력에 대한 일연구 : 한민당·민주당 등을 중심으로, 한국역사연구회
▷ 전기웅(1990), 고려 경종대 의 정치사회구조 와 그 주도세력, 부산대학교
▷ 최재석 외 1명(1990), 신라 왕위계승의 계보인식과 정치세력 - 평화시의 정치세력이 왕위계승을 좌우할 수 있는가?, 한국사회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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