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상, 불교사상 의미, 불교사상 전개과정, 한용운(만해 한용운), 홍길동전]불교사상의 의미, 불교사상의 전개과정, 불교사상의 특징, 불교사상의 내용, 불교사상과 한용운(만해 한용운), 불교사상과 홍길동전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불교사상, 불교사상 의미, 불교사상 전개과정, 한용운(만해 한용운), 홍길동전]불교사상의 의미, 불교사상의 전개과정, 불교사상의 특징, 불교사상의 내용, 불교사상과 한용운(만해 한용운), 불교사상과 홍길동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불교사상의 의미

Ⅲ. 불교사상의 전개과정

Ⅳ. 불교사상의 특징

Ⅴ. 불교사상의 내용

Ⅵ. 불교사상과 한용운(만해 한용운)
1. 불교행정조직혁신론
2. 사원운영의 혁신론
3. 청년불교의 제창
4.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

Ⅶ. 불교사상과 홍길동전

참고문헌

본문내용

실 벽에가 걸어 놓기도 하였다.
蛟山의 信佛은 단순한 흥미로 불경을 본 수준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信佛이 문제가 되어 사헌부로부터 탄핵된 것이 삼척부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사헌부의 계청에 대하여 선조는 “자고로 문장을 좋아하는 이들은 간혹 불경을 보기도 하였다” 하면서 응하지 않았다. 이에 사헌부는 다시 계청을 올려 교산을 僧侶라고 하여 파직을 주장해 선조도 어쩔 수 없었다.
교산은 오랫동안 불경을 읽은 것은 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어서였다고 했다. 그것은 예교주의에 따라 存心醫生하는 일에 마음을 붙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불경을 읽었지마는 아직은 아내도 버리지 못하고, 육식을 금하지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信佛을 그대로 시인할 뿐 아니라, 불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자기를 탄핵한 이들에 대해 조금도 승복할 뜻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불교에 대한 그의 관심은 憲靜의 啓請에 따르면 宣祖가 말한 바와 같이 옛날부터 문장을 좋아하는 자들이 불경을 읽었던 것처럼 교산도 그러한 정도가 아니겠는가 한 것과는 달리 파직 당시에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일찍이 불교에 아첨했다고 하여 탄핵을 받은 적이 있는데 나는 佛敎를 業으로 삼지않았다. 다만 비방하지 않았을 따름인데 세상 사람들이 이를 살피지 않을 따름이다.
이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인한 파직에 대한 변명에 가까운 내용이다. 그 뒤 교산은 복직과 파면을 거듭하게 되는데, 파직되어 정배되어 있는 동안에 더욱더 불교에 침잠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교산의 문집에는 승려들과의 交流가 많았음을 볼 수 있는 글이 發見된다. 당시 士大夫들 가운데 불교에 관심을 가졌던 인사가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국가의 정책과 士是들의 일반적인 풍조가 불교에 극히 냉담했기 때문에 불교와 상관이 되는 글을 쓰거나 보지않으려 했다. 그러나 교산은 불교의 사상과 불경의 문장이 뛰어난 것을 격찬했으며, 금강산에 있는 도솔원 미타전의 비문을 지을 정도였다. 아울러 교산은 당시의 高僧 인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와도 특별한 친분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로써 볼 때 그가 학문적 호기심으로 불경을 보았다거나 한때의 치기로 佛心을 가졌다는 견해에는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고 보여진다.
그는 儒敎에 관하여서도 利己的인 학문자세를 경계하고 利他的인 학문자세를 중시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佛敎에 있어서도 현실을 외면하고 山中 修道에만 傳染하는 僧侶나 佛子를 올바른 佛敎徒로 보지 않았으며, 鐘이나 想을 만드는 神僕의 불교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와 같은 교산의 佛敎 사상은 “洪吉童傳” 곳곳에 용해되어 있다.
“홍길동전”에는 역설적으로 사회적 비리를 척결하기 위한 첫 번째 대상으로 視牲이 등장한다. 그것은 사대부중을 구제해야할 불교와 사찰이 오히려 사리사욕을 채우는 탐관오리처럼 백성 위에 군림하는 현실을 뒤집는 장면으로 드러난다.
일일은 제인이 이르되
“아등이 벌써 합천 해인사를 쳐 그 재물을 탈취코자 하나 지략이 부족하여 거조를 발치 못하였더니, 이제 장군의 의향이 어떠하시니꼬?”
“내 장차 발군 하리니 그대 등은 지휘대로 하라”
하고 청포흑대에 나귀를 타고 종자 수인을 데리고 나감 왈,
“내가 그 절에 가 동정을 보고 오리라”
하고 가니, 완연한 재상가 자제라, 그 절에 들어가 먼저 수승을 불러 이르되,
“나는 경성 홍판서 댁 자제라. 이 절에 와 글공부하러 왔거니와, 명일에 백미 이십 석을 보낼 것이니 음식을 기어이 차리면 너희들로 한 가지로 먹으리라.”
하고 시중을 두루 살펴보며 후일을 기약하고 동구를 나오니 제승, 기꺼하더라. 길동이 돌아와 백미 수십 석을 보내고 중인을 불러 왈, “내가 아무 날은 그 절에 가 이리이리 하리니 그대 등은 뒤를 쫓아와 이리이리 하라.” 하고 그날을 기다려 종자 수십 인을 대리고 해인사에 이르니 제승이 맞아 들어가나, 길동이 노승을 불러 문왈, “내가 보낸 쌀로 음식이 부족지 아니하더뇨?”
노승 왈 “어찌 부족하리이까 황감하여이다.”
길동이 상좌에 앉아 상을 받아 술을 마시더니 문득 모래를 가만히 입에 넣고 깨무니 그 소리가 큰지라. 종자에게 분부하여 제승을 다 한 줄에 결박하여 앉히니, 사안이 황겁하여 아무리할 줄 모르는지라 이윽고 대적 수백여 명이 일시에 달려들어 모든 재물을 다 제 것 가져가듯 했다.
물론 교산 자신이 불교에 심취해 있었으면서도 해인사를 가장 먼저 습격한 것에 대하여 다소 의아한 점도 있다. 수련도장인 사찰에서 잔치를 열며 술을 마시는 것도 엄숙성을 격하시키고자 하는 것이며, 일부러 모래를 씹어 度僧 을 결박하여 곤욕을 가하는 것과 중의 복장으로 변복을 하고 관군을 속이는 것 등 佛子들을 조롱하기 위한 행동도 그러난다.
傳來한 바와 같이 교산이 추구했던 불교적 志向은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통한 중생구제임을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무위도식하면서 백성들에게 고통만을 주는 직업적인 事到僧들을 탄핵한 것이지 排佛思想과는 전혀 무관하다 하겠다.
따라서 홍길동의 해인사습격은 視牲의 僧侶에 대한 응징이라기보다는 악독한 토호들을 응징
하였다 는 점에 그 意志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아무리 교산이 獨室한 佛心을 가졌다 하더라도 당시 사회의 反佛敎的 분위기를 전혀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에 대한 信佛에 대한 餞烈을 희석시키기 위해 해인사를 습격하는 장면을 창조했을 것이라는 가정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바탕에서 교산이 “洪吉童傳”을 창작한 시기를 七書의 獄事가 있었던 1613년 직전에 서양갑 등을 고무하기 위해 지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참고문헌
강선화(2008) - 만해 한시에 나타난 불교 사상, 근역한문학회
권기종(2009) - 불교사상과 국가의 발전, 대한불교천태종
도흥열(2002) - 현대사회와 불교사상, 충북대학교사회과학연구소
이정아(2007) - 불교사상에 나타난 사회복지의 개념, 한려대학교
이병욱(2009) - 한국근대불교사상의 세 가지 유형, 한국신종교학회
안형관 외 1명(2008) - 불교사상의 이해와 소통을 위한 불 명호 고찰, 한국동서정신과학회
  • 가격6,5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3.07.22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6426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